〈 195화 〉 부캐의 시작 (2)
* * *
인간이 되었다.
미케네 왕국의 왕세자로서, 나는 어린아이부터 자라는 고욕을 치러야 했다.
인간으로서 티탄신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역시 신체 능력이 티탄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 좋다는 것.
SSS급 수백억짜리 슈퍼카를 타다가 폐차 직전의 쓰레기를 몰고 다니는 그런 기분.
그냥 비유할 필요 없이, 올림포스산을 5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몸이 순식간에 100m를 ?5초 만에 들어갈 정도로 헐떡이는 몸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는 다르지만!
현재, 나의 나이 20살.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20살이 되는 동안, 나는 왕세자로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수련을 거듭했다.
전차도 몰아보고, 육체를 완성하고, 인간의 몸에 맞는 전투기술을 다시 배웠다.
그 결과, 이제는 100m 거리를 7초면 주파할 수 있는 엄청난 육신이 되었다.
저기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면, 모든 경기의 우승자를 헤라클레스로 도배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미케네의 차기 국왕 소리를 들을 정도.
다만.
왕손이 아니라 '왕세자'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나를 물리적으로 낳아준 두 부모가 죽었기 때문.
내가 태어난 이후, 암피트리온과 알크메네는 죽었다.
헤라가 젖을 물려주며 모유를 먹여준 아이라는 게 그리스 전역에 소문이 다 퍼졌고, 그 소식은 가이아가 부리는 기간테스에게도 전해졌다.
기간테스가 미케네를 습격했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났고, 제우스는 암피트리온을 이용해 괴물과 싸우다가 암피트리온과 기간테스를 자폭시켰다.
제우스는 다른 곳에서 본체로 또다른 기간테스를 상대하느라 아제우스에 신경을 미처 쓰지 못했다.
아마도 가이아가 직접 병력을 배치하여 노렸기에 제우스가 미처 대처하지 못한 것 같았고, 결국 자율주행 상태에 가깝던 암피트리온은 인간 아제우스의 몸으로 기간테스와 동귀어진했다.
암피트리온의 죽음 이후, 알크메네 또한 심장병으로 죽은 걸로 정리했다.
아무래도 제우스도 헤라도 아제우스든 플레이야스든 제우스의 분신인 나를 아들로 대하는 건 조금 꺼렸기에, 우리는 마침 기회다 싶어 부모 개체를 정리했다.
그 덕분에 헤라의 영광을 죽이러 오는 기간테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헤라가 정말로 영광을 내려준 존재라면 헤라클레스의 부모가 죽을 리가 없다는 이유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가 사제들을 통해 퍼뜨린 이야기를 그대로 믿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태어난 이후 '부모를 잡아먹은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딱히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대부분 내가 왕세자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걸 시기하고 음해하는 또다른 왕족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기간테스들을 하나둘 쓰러뜨리며, 헤라클레스가 비로소 진정으로 그리스 최고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여정을 나설 때가 되었다.
왕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나설 때.
그 시작으로 가장 좋은 명분은 역시 '부모의 복수'이리라.
* * *
미케네의 늙은 왕, 엘렉트리온은 두 가지 고민으로 며칠 동안 계속 잠을 설쳤다.
왕은 늙었다.
슬슬 왕위를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했다.
아니, 진작에 물려줘야 했다.
어쩌면 그때, 알크메네가 아이를 낳아 미케네를 향해 수많은 왕국에서 찬사를 보냈을 때 국왕의 자리를 넘겼어야 했다.
"사위...."
왕은 왕성 한쪽에 세워진 암피트리온의 석상을 보며 한탄했다.
그는 창 한 자루를 들고 기괴하게 생긴 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뱀의 목을 창으로 조르며 뱀을 교살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기고 있는 상황.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암피트리온은 뱀에게 물려 뱀의 독에 중독되었고, 죽어가면서도 거대한 뱀의 목을 졸랐다.
석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암피트리온은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독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미케네의 국민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독을 뒤집어쓰고 죽음과 맞서 싸웠다.
그 행보는 실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영웅은 죽어버렸다.
그런 영웅이 진정으로 국왕이 된다면 그 테베의 카드모스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번영시킬 수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늙은 왕의 자식과 사위 중에는 암피트리온만큼 대단한 자가 없었다.
아아.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구나.
구혼의 현장에서 딸을 강제로 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광기 어린 미친놈인 줄 알았지만, 그런 행위를 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자였다.
그런 능력자를 보고 나니, 다른 자식들이나 사촌, 조카들이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엘렉트리온은 무려 20년 가까이 왕위를 이어왔다.
'그'가 성장하기를 바라며.
이미 나이가 찬 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뒤에서 몰래 서로 뜻을 모아 그를 어떻게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늙은 왕은 옥좌를 지켰다.
암피트리온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아니면 이 왕국을 누가 이끌 수 있으랴!
헤라클레스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암피트리온의 유전자를 가진, 그 강인하고 올곧은 전사가 왕이 되어야만 늙은 왕은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그걸 위해서라도 그를 곤란하게 하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폐하. 헤라클레스 왕세자가 알현을 청합니다."
"오오, 그래?! 마침 잘 됐군. 들어오라고 하라."
늙은 왕은 뻣뻣해진 허리를 애써 세우며 헤라클레스를 맞이했다.
끼이익.
알현의 방, 강철의 문이 좌우로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갑옷을 입은 것 같은 근육질 육체는 암피트리온의 모습을 너무나도 쏙 빼닮았다.
솔직히 불경하기는 하지만, 감히 제우스 신과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폐하를 뵙습니다."
"오오, 그래. 왕세자여. 오늘은 어인 일로 왕궁에 방문하였는가?"
"키타이론산에 거대한 사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자는 겉모습은 사자이나, 마치 뱀처럼 교활하게 움직이며 산의 양과 소를 잡아먹는다고 들었습니다."
"음...!"
늙은 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헤라클레스가 그 정보를 들은 걸까.
"제가 가겠습니다."
"안 된다."
"어째서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 괴물은 몹시 위험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을 위한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힘이 있는 자,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그 힘을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왕께서는 제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끄응...!!"
늙은 왕은 속이 타들어 갔다.
"결코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미케네 최강의 전사가 미케네의 땅에 나타난 괴물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동요할 것이며, 괴물은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늙은 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걸 어떻게...?!"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년 전, 부친께서 싸웠던 그 뱀의 자식이 아닌가. 뱀이 사자와 교배하여 낳은 사자가 뱀의 지능을 가지고 지금 산에서 짐승들을 잡아먹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어느 정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이 되면, 놈은 가축이 아니라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하겠지요."
"......."
"허락하여주십시오, 폐하."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 헤라클레스. 세상에 고통받는 인간을 지키고 싶습니다."
"뭐라?!"
"괴물은 미케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저는 가장 힘들고 어려워하는 약자의 편에서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허어...!"
늙은 왕은 뒷골이 당겼다.
"가만히 있으면 미케네의 왕이 될 수 있다! 어찌 그 길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도리? 무슨 도리? 너는 왕족이다. 나의 딸 알크메네와 미케네 최강의 전사, 암피트리온의 아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합니다."
"!!"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늙은 왕은 헤라클레스의 자세에서 더 이상 자신이 굽힐 수 없는 굳은 심지를 느꼈다.
설령 신이 와도 저 강인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겠지.
"너는 도대체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냐? 그 옛날 제우스 신을 도왔던 영웅 카드모스가 되어 테베와 같이, 네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그저."
헤라클레스는 오른 주먹을 자기 가슴에 쿵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약자를 돕기 위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고자 할 뿐입니다."
"......!"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으음...!"
더 이상 말릴 방도는 없었다.
"알겠다. 가라! 가서, 네가 이 미케네의, 아니 그리스 최고의 전사라는 걸 증명하라! 언젠가 내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 그리스 전역에서 헤라클레스의 이름이 울려 퍼지도록 하라!"
"폐하의 명에 따릅니다."
헤라클레스는 당찬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늙은 왕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암피트리온의 육신에 내 딸의 성향이라니. 아아, 저런 자가 왕이 되어야 하거늘...."
왕관을 스스로 내려놓고.
그는, 영웅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 * *
왕성을 나온 뒤.
"으아. 동정은 누구랑 섹스해서 뗄까."
나는 산을 오르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