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아라크네 (1)
* * *
인간은 신보다 당연히 못한 존재다.
내가 전직 인간이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고, 내가 현직 올림포스 주신이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신은 존귀하고 고귀한 자.
태초부터 티탄신들이 이 땅에 존재했고, 티탄은 인간들에게 수많은 것들을 내려다보내줬다.
시작은 불을.
그리고 점차 인간들에게 하나둘 선물을 보내줬고, 인간들은 지금 문명을 구축했다.
언제나 그렇듯.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하는 말처럼.
인간들은 때때로 선을 넘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판도라의 상자로 인간들을 멸망시켰던 때.
그 때, 나는 인간들이 분명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여 세상을 멸망시켰다.
그 뒤로 살아남은 인간들은 감히 신을 모독하는 행위는 하지 못했고, 신을 상대로 뭔가를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신은 신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소문을 들었다.
자기가 베 짜는 실력이 그 어떤 신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인간이 있다더라.
옷감 만드는 실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서, 여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더라.
그 어떤 여신도 자신의 앞에서는 베 짜는 실력을 감히 뽐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는 소문을.
악의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그 소식이 내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신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이 널리 퍼졌다는 뜻.
"오랜만에 제우스로 직접 확인해봐야겠군."
플레이야스를 이용해 내려가는 것도 안 되고.
들킬까봐 두근두근하는 아제우스 중 하나를 부르는 것도 안 된다.
변장한 신, 제우스로서 확인하러 가야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처럼, 평범한 청년유피테르로 변장을 하고 내려가려고 했다.
"같이 가요."
"아테나?"
"저도 한 번 보고 싶네요. 여신보다 더 베를 짜는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그 여자를."
내가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더니, 아테나가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신들이 모독을 당했다는 것도 있겠지만, 인간 주제에 여신보다 더 베 짜는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게 화근이었나보다.
하긴.
나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제우스 신보다 섹스 잘 함ㅋ
라고 하는 자가 있으면, 한 번은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헤라 여신 안으면 3초 안에 자지러지게 할 수 있음ㅋ
제우스 신이 그렇게 조루라며?
제우스 꼬추 나보다 작음ㅅㄱ
라고 계속 소리가 들려온다면,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아테나, 아니 오랜만에 '미네르바'와 함께 그 베 짜는 실력이 그렇게 좋다는 여인이 사는 인간들의 도시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리디아.
그 인간들의 도시에서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여자의 이름은.
아라크네, 였다.
* * *
리디아. 주점.
"정보를 대충 모아보니까, 여기 사람들 중에 고위층은 다 아라크네가 짠 옷을 입고 다닌데요."
"확실히 재질이 좋기는 좋군."
나와 미네르바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구한 아라크네의 옷감을 책상 가운데 놓고 살폈다.
"어때? 네가 이거 만들면."
"......."
"애매해?"
"직접 해봐야 알겠지만, 확실히 실력은 대단하기는 하네요."
미네르바마저 확실하게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실력.
옷감을 만드는 여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건 분명하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아라크네는 거미 아니냐?'
아무리 내가 신화는 좆도 모르는 놈이라고 해도, 아라크네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는 건 알고 있다.
아라크네 하면 거미.
모티브로 나오든, 아니면 이름을 따오든 아라크네라는 이름이 거미와 상당히 관련이 깊다는 건 나의 상식과 지식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단순히 이름이 같다고 하기에는 아라크네라는 이름이 너무 유명하지 않은가.
"혹시 그 여자, 거미가 아닐까?"
"뭐라고요?"
"거미가 인간으로 태어난 거지. 그래서 거미줄 짜던 실력이 베 짜는 실력으로 진화한 거고."
"그러면 팔이 최소한 여섯 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리까지 포함해서 사지가 아니라 팔지, 여덟개의 팔다리가 달린 여자로."
"가이아가 만들어낸 기간테스 같은 외형이 되겠군."
팔 네 개 정도는 쿼드랑이로서 어떻게 넘어갈 수 있어도, 헥사드랑이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그게 미소녀도 아니고 거미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 그런 괴물이 아니라 진짜 평범한 여자인간이라면? 진짜 실력이 좋아서 이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 여자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들, 함부로 신과 인간을 비교하면 안 되죠."
미네르바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감히 신을 넘볼 수는 없어요. 그건 진정한 불경으로 다스려야 하는 거라고요."
"안다. 불경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물건을 보니까 확실히 아까워서 그렇지."
나는 눈앞에 놓인 검은 원단을 향해 직접 가위를 들었다.
"...유피테르?"
"있어봐. 이런 원단을 그냥 두면 아깝잖아."
딱히 재봉에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제우스 신의 손재주는 재봉도 천재는 아니더라도 '수재' 정도의 능력은 낼 수 있다.
"이게 진짜 원단만큼은 좋아보이기는 하네. 왜, 원래 그런 거 있잖아. 실력은 엄청 좋은데, 성격이 지랄맞은 경우."
"꼭 누구를 말하는 것 같네요."
"누구? 나 누구라고 말한 적 없다."
나는 단숨에 원단을 자르고 원단 속 실을 엮은 다음, 하나의 물건을 만들어냈다.
"미네르바. 입어봐."
"읏....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낸 거죠?"
"너한테 입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까 바로 만들어진 거지."
"정말, 변태가 따로 없다니까."
미네르바는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건넨 옷을 입었다.
두 개의 구멍 사이로 각각 발을 집어넣고, 쭉 위로 당겨 골반에 걸리게 만들었다.
"됐어요?"
"크으, 이거지."
레이스 달린 팬티.
기존의 수영복 같은 팬티와는 달리, 좋은 원단과 나의 욕망이 합쳐지니 소위 '승부속옷'이라고 부를 만한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이거 샘플로 들고 가서 아라크네한테 한 번 만들어보라고 할까? 손님인 척 위장하고."
"원단 만들어내는 실력이 뛰어난 거지, 의상을 만들어내는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또 모르지. 신조차 모독할만큼 뛰어난 재능이 그쪽으로도 있을지."
"...유피테르. 지금 진심으로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미네르바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라크네라는 인간을 티탄 여신으로 만들 생각이세요?"
"아직은 아니야."
생각은 있다.
"정말로 실력있는 인간이라면. 여신으로 태어나야 할 영혼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거라면,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있다면 한 번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유피테르는 너무 인간들을 많이 배려해주세요."
"그만큼 내가 인간들을 사랑한다는 거지."
좆간 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 애가 싸가지 없는 여자면 나도 건드릴 생각 없어. 그 시간에 아테나 보지를 건드리겠지."
"......저기요?"
미네르바는 다소 복잡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테나 처녀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잖아요."
"뒷처녀 건드리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
"스틱스 한테 확인 받고 왔어. 뒤는 괜찮데."
이미 아르테미스도 뒷처녀는 아제우스에게 따였다.
대외적으로 아직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어때? 생각 있으면 나중에 한 번 고민해봐."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뭘. 알았어요. 대신, 이거 입고 하라는 말은 하지 마요."
사락.
미네르바는 바로 팬티를 벗어버렸다.
원단은 마음에 들지만, 원단의 제작자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가보죠.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시간은 소중한 법이잖아요. 어서요."
나는 미네르바와 손을 잡고 목표 장소, 아라크네의 집으로 향했다.
확실히 원단으로 제법 큰 돈을 만졌는지, 아라크네의 집은 상당히 크고 넓은 2층집이었다.
"미네르바. 일단 대화는 나한테 맡겨."
"알겠습니다."
아라크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아테나에게 함부로 일을 맡기는 것보다는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게 훨씬 낫다.
똑똑.
"실례하오. 아라크네 양의 집이오?"
[씨발, 누구야?]
오우.
인성 합격.
"나는 테베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유피테르라고 하오."
[...그래서요?]
"그대가 만든 원단이 그렇게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소. 원단을 사서 가공한 뒤, 왕가에 납품을 할까 생각 중인데...."
끼이익.
문이 열렸다.
"......."
그리스에서 흔한 얼굴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일진상의 아라크네는 흑발의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쭉 훑었고,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유피테르 몸이 어디가서 꿇리는 몸은 아니지.'
자지 하나로 모든 티탄 여신들을 설득한 몸이다.
인간이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원단을 왕가에 납품한다고요?"
"그렇소. 실력있는 자의 원단이라면 당연히 왕가에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슬쩍, 떠본다.
"그러다가 왕가에서 제법 좋은 값을 받는다면, 그걸로 좋은 장사가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에게 바치기도 하고."
"......그건 싫은데."
바로 말이 짧아지는 것 봐라?
"신에게 공양할 거면 나가요. 신이 내 원단을 받고 싶으면, 여기 와서 직접 사가라고 하지."
"......신에게 그런 태도는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은데."
"하. 물건 사러 온 거야, 아니면 설교를 하러 온 거야?"
아라크네는 대놓고 짜증을 냈다.
"제우스 신 자지 냄새만 맡아도 가랑이 벌려대는 여신들을 향해, 내가 왜 존경심을 가져야 하지?"
"......."
"신들이라면 좀 더 정숙하고, 경건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허구한날 제우스 신이랑 섹스할 생각만 하고 말이야."
"......."
"그게 여신이야? 제우스 전용 창녀들이지. 하여튼 여신이라는 것들이.... 그런 년들한테 원단 줘봐야 뭐하겠어? 야시시한 옷이나 만들어서 섹스하는데 쓰겠지. 나는 내 원단 그딴 식으로 쓰이는 꼴은 못 봐."
미네르바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뭐, 내가 틀린 말했어?"
"맞는 말이군."
나는 손을 들었다.
"처맞는 말."
짜ㅡ악.
"애새끼가 싸가지가 없네."
"유피테르...!"
"...아."
아라크네는 일격에 기절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