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153화 (153/235)

EP.153 마지막 올림포스 가디언 (6)

자식을 낳는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이는 보통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처음 아이를 낳아보는 이에게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하게 된다.

많이 아프다던데.

낳다가 죽는 이도 있다던데.

최대한 몸조심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혹시'라는 게 있지 않은가.

혹시 뭔가 잘못되면 어쩌지?

아무리 신의 아이라고 한들, 아니 오히려 신의 아이라서 인간의 몸으로 아이를 낳다가 위험해지는 거 아닐까?

세멜레는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이 수척해지고 있었다.

제우스는 매일밤 세멜레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위로했지만, 배가 부풀어오를 수록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으로 옆에서 지켜주고 위로해 줄 뿐이었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미워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임신을 하고 나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성을 가르쳐줬으면서, 제우스는 자신을 더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태어날 아이가 소중한 건 알지만, 그간 하루에도 몇 차례 몸을 섞던 제우스가 자신을 더는 안지 않으니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얘는, 미쳤네.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 지금 그게 말이야, 방구야?"

"애 낳는데 애한테 집중해야지, 이게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섹스는 애 낳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 때까지만 참아. 우리 때는 말이야, 임신해서 배 불러오기 시작한 때부터 섹스를 안 했다고. 알아?"

세멜레의 임신 소식에 한 자리에 모인 언니들은 세멜레의 그런 심정을 타박했다.

"그리스 남자들이 얼마나 섹스를 거칠게 하는 지 알아? 여자의 뱃속은 신경쓰지 않고 마구 쑤셔박는다고. 그에 비해서 너는 어때? 제우스 님이 얼마나 상냥하게 대해주시냐고."

"정말, 동생만 아니엇으면 무슨 개소리냐고 한 바탕 욕을 쏟아냈을 거야."

"언니들...."

세멜레는 뭔가 울컥했다.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언니들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아이 양육에 있어서 선배인 것은 맞지만, 이들은 모른다.

제우스가 안아주는 그 손길.

제우스가 속삭여주는 그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 지를.

제우스는 카드모스와의 약속으로 자신을 임신시키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지만, 만약 바랄 수만 있다면 아이는 한 명으로 족하고 평생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웃긴다, 너. 지금 제우스 님이 네 남편으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완전 미쳤네. 야, 제우스 님이야. 인간인 우리가 함부로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없는 분이라고."

"그래.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불경한 일이야. 테베 왕국에 저주를 내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언니들의 연이은 타박에 세멜레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제우스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좀처럼 가만히 있게 놔두지를 못했다.

"아이를 낳으면...제우스 님은 떠나시겠지?"

"글쎄다. 그건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크흠, 제우스 님 지금 안 듣고 계시겠지?"

"아아. 위대하고 거룩하신 신들의 아버지시여.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결코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언니들은 손을 맞잡고 기도한 뒤, 세멜레에게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세멜레. 남자는 결국 보지로 유혹하는 거야. 보지 하나만 제대로 잘 간수하면, 몸관리만 제대로 하면 결국 남자는 넘어오게 되어있는 법이라고."

"그래. 나를 봐. 내가 첩으로 들어갔지만 결국에는 내가 더 아들 많이 낳았다? 그 비결이 뭐겠어? 정실이라는 년 제끼고, 첩실년 보내고. 그렇게 하면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 사랑을 얻어내려면 여자는 독해져야해. 특히 너는 상대방보다 '끕'이 한참 아래잖아?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너보다 대단한 분들이니?"

"으, 으으...."

진실도 칼날처럼 휘두르면 심장을 후벼팔 수 있지 않을까.

세멜레는 언니들이 하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그냥 나는...."

"정신 차려. 우리는 너를 응원하는 거야. 네가 잘못되면 우리 자매들, 그리고 우리 왕국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런데도 우리는 너를 믿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어. 동생이니까."

"흐, 흐윽...!"

세멜레는 눈을 감았다.

언니들의 위로와 응원을 받으며, 그녀는 계속 머릿속에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로 이대로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닐까.

"하아...."

언니들이 잠든 사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잠시 혼자 밤산책을 나온 세멜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예쁘게 걸린 보름달은 여신처럼 아름다웠고, 세멜레는 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작은 자신을 돌이켜보며 배에 손을 올렸다.

"아가야...."

만약.

이대로 끝이라고 한다면....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이 끝난다면....

"네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보이는구나."

"!!"

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멜레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

"나?"

금빛의 머리.

심홍빛과 같은 드레스.

그리고 머리에 쓴 티아라.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인은 원숙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고, 세멜레는 올림포스 신들을 조각한 신상을 통해 바로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알기는 아는 구나."

올림포스 여신들의 정점.

가정과 출산의 수호자.

그녀가 행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낳을 아이도 제대로 낳을 수 없다고 하는 여신.

제우스의 아내.

헤라.

"인간의 몸으로 신의 아이를 가진다? 가당치도 않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세멜레는 눈물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싸쥐며, 헤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뱃속의 아이만큼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 남의 남편에게 꼬리를 친 주제에 모성은 있다 이거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발, 아이만큼은...!"

이것은 헤라의 일방적인 폭거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와서 자신이 안겠다고 선언하여 임신했을 뿐이다.

어찌 인간이 신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까.

어찌 인간이 신의 폭거에 항거할 수 있을까.

불합리한 처사라고 한들, 누구에게도 항의할 수 없다.

상대는 신이고, 자신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후후, 가여운 것. 자신이 속았다는 것도 모른 채 아이를 가지다니...."

"......네?"

"정녕 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제우스의 아이인 줄 아느냐?"

"......예?"

순간.

세멜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헤라의 말이 그녀는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그게 무슨...?"

"내가 만약 네 뱃속의 아이가 제우스의 아이였다면, 나는 너를 당장 죽이고 뱃속의 아이만 데려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

상대는 신이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러나...쯧쯧."

헤라는 세멜레를 비웃었다.

"자신이 품은 남자가 진짜인지 사기꾼인지도 모르면서 출산 직전까지 오다니. 불쌍하구나."

"그, 그런...?! 아, 아니예요! 그분은...!"

"그분이 맞다면?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겠니?"

"......."

제우스가 맞다면.

헤라는 당장 세멜레 뿐만 아니라 테베 전체를 뒤집어 엎어도 이상하지 않다.

"의심하는구나. 좋다. 그것 또한 네 운명일 터."

헤라는 안개 속으로 서서히 몸을 가렸다.

"만약 상대가 진짜 제우스라면, 네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다."

"그게 무슨...?"

"제우스는...."

헤라는 얼굴을 붉히며 옅게 웃었다.

"너같은 인간 따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자지를 가지고 있거든. 제우스와 섹스를 해서 인간이 살아남는다? 오호호, 그런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지."

헤라는 한껏 세멜레를 비웃었다.

"좋아 죽는 날은 몇 번이고 있었겠지. 하지만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다? 제우스가 가짜라는 증거다. 제우스는...."

스륵.

헤라는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자를, 자지로 죽여버리니까."

"......."

마치 닭장과도 같은 기묘한 냄새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난 뒤.

세멜레의 마음 속에 한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의심'.

"으, 흐흐흑...!!"

세멜레는 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떨궜다.

눈에 차오른 눈물은 하염없이 배에 떨어질 뿐이었다.

* * *

세멜레의 출산일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새로운 반신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까지 고생한 세멜레를 위해 한 가지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세멜레."

출산이 임박한 날.

이제 곧 '산통'이 오겠다 싶은 날이 오기 직전.

"나의 아이를 낳아줘서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제우스 님."

"그래. 착하지."

나는 세멜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녀는 나의 키스에 상당히 어색하게 반응했고, 나는 그 반응이 다소 의아했다.

"왜 그러니?"

"아, 아뇨. 이렇게 제우스 님께 사랑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싶어서...."

"...하. 너는 사랑이 반드시 육체적 관계를 맺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리석도다.

사랑과 미의 여신도 오직 섹스만을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단다. 반드시 몸을, 살을 섞고 관계를 맺는 것 만이 사랑이 아닌 게야."

"그럼...."

세멜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물론."

"그러면...."

세멜레는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를 낳고난 뒤에, 저를 한 번 더 안아주세요."

"하, 그게 소원이냐? 물론이지."

"진짜로."

"...뭐?"

세멜레는.

"제우스 님의 진짜, 신의 자지로 저를...안아주시겠어요? 사랑하신다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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