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2 제우스, 당하다 (2)
올림포스를 떠난 여신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올림포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제우스의 명령으로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여신들 중 누구도 올림포스로 가지 못하게 했고, 제우스는 여신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내가 승리를 한다면 푸른 번개를 일으켜 하늘에 승전보를 울릴 것이다.
제우스는 자신의 승리를 어떻게 공표할 지 분명히 언급했다.
평소처럼 번개가 친다면 제우스가 이긴 것이니 여신들은 올림포스로 돌아오면 될 것이고, 만약 평소와는 다른 번개가 친다면….
"아아, 제우스 님…."
배에는 여신들의 안타까운 기도가 울려퍼졌다. 다른 여신들이 불운한 소리 하지 말라며 여신들을 다그쳤다.
그리고.
콰과광!
하늘에서 보랏빛 번개가 울려퍼졌다.
올림포스를 중심으로 검은 안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여신들은 비명을 질렀다.
하늘과 번개는 오직 제우스만의 영역이며, 이것이 제우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곧 여신들이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 제우스의 패배.
제우스는 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우스는 티폰이라는 괴물에게 패배했다.
여신들을 명령이라는 이유로 굳이 따로 보낸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그, 그거야…."
여신들은 하나 둘 올림포스의 중역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보다도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던 이들이며, 누구보다도 제우스와 가까운 이들.
그래서 제우스라는 구심점을 잃은 여신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들에게로.
"...배는 계속 움직인다. 우리는 일단 아주 먼 남동쪽으로 간다."
헤라의 단호한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올림포스가 저렇게 되었는데 괜찮습니까?"
"...제우스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제우스는 그 어떤 여신도 자신이 푸른 번개를 치기 전까지는 올림포스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헤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다시 한 번 더 언급하며 여신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이걸 어기는 여신이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지금의 올림포스에 간다는 건, 헬리오스 같은 남자신들에게 강간당한다는 거야."
헬리오스를 예로 들어 헤라는 내심 헬리오스에게 미안했지만, 올림포스 인근에는 티탄 신들이 누구 지나가는 여신 하나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우스가 부르기 전에 가는 건 제우스를 배신하는 일이야."
헤라의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여신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서슬퍼런 헤라의 눈은 '자신 있으면 다른 남자랑 몸을 섞어봐라'는 듯 힐난을 하고 있어, 감히 그 누구도 올림포스로 제우스를 지키러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정말 되는 거야?"
"언제까지? 해도 뜨지 않고, 어둡기만한데 정말 이래도 돼?"
"......몰라."
여신들의 불안감은 여전히 커지는 가운데, 헤라만이 올림포스를 향해 바라보며 담담히 눈을 감았다.
"나는 믿어."
* * *
하늘에는 달이 떠있다.
태양이 사라지고, 마치 달이 태양을 잡아먹은 것처럼 달만이 덩그러니 하늘에 떠있다.
즉, 지상에 어둠만이 가득 내려앉았다.
만물을 비춰야 할 햇빛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들은 횃불에 모든 것을 의지한 채 낮과 밤의 구분없이 오들오들 떨어야했다.
"뭐지."
페니키아의 왕자, 카드모스는 변하지 않는 밤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늘이 왜 이 모양이야."
일어나려고 했는데 계속 밤이었다.
혹시 자신이 자다가 깨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못 잤나 싶어 다시 잠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고 말았다.
너무 많이 잤을 때나 일어나는, 허리가 아파서 도무지 더이상 누워있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태양이 뜨지 않는다.
하늘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카드모스는 고뇌했다.
과연 이 일이 자신이 있는 땅만 그런 걸까?
지금은 멀리 나오게 되었지만, 고국인 페니키아에도 혹시나 어둠이 깔리게 되는 건 아닐까?
"...안 돼."
카드모스는 어둠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누이가 납치된 전적이 있기에,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햇빛에 관한 건...달의 여신을 찾아가야하나? 난감하군. 내게는 누이를 찾아야 하는 의무가 있거늘."
자신이 여정을 나온 근본적인 이유인 '누이'를 찾아나서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태양의 실종 사태를 해결해야하는가.
"...누이, 미안하오."
카드모스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한 누이보다 인류 전체를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어느 신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과거 제우스 신의 피가 조상 중에 섞여 우수한 육체로 태어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듯, 카드모스는 조금도 피로해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올림포스'.
그는 제우스 신이 있는 올림포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올림포스 산 인근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허."
발정난 원숭이들이 가득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신성한 신들이었으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티탄 신들은 여자를 범하고 있었다.
어디서 잡아온 건지, 인간 여성이나 님프를 상대로 거칠게 자지를 흔들고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 그 자체.
심지어….
"우웁…!"
한 님프를 상대로 다섯 명의 남자가 동시에 달려든 상황.
카드모스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그만 구역질이 치솟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 여럿을 거느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 여럿을 거느리는 건 순리에 어긋나는 일.
-하물며 남자 여럿이 여자 한 명을 두고 성을 나눈다?
-씨발, 다른 놈이 좆 박은 보지에다가 내 좆을 박으라는 건가!
카드모스는 자신의 상식이, 자신의 이성이 틀리지 않았음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도저히 제우스의 지배 하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펼쳐지고 있으니, 카드모스는 차마 계속 볼 수 없었다.
한 남자가 여자 여럿을 거느릴 수는 있어도, 한 여자를 상대로 여러 남자가 달라붙을 수는 없는 노릇.
여인을 향해 구애를 하는 남자가 많을 수는 있어도, 그들이 한 여인을 두고 집단으로 범하는 것은 페니키아 왕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뭔가 있다.'
카드모스는 직감했다.
올림포스의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어쩌면 위대한 제우스 신에게 큰 변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응?"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카드모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나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누구도 카드모스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카드모스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누군가는 카드모스를 눈치챌 법 한데, 그들은 카드모스를 마치 지나가는 벌레처럼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
카드모스는 조심스레 안쪽으로 다가갔다.
알몸의 티탄 남신들은 누구도 카드모스를 신경쓰지 않았다.
"아."
용기를 내어 가까이 와서 보니, 티탄 신들의 머리에는 전부 뭔가 이상한 것이 씌워져 있었다.
그제서야 카드모스는 깨달았다.
이들이 뭔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우오오! 님프 보지에 싼다!"
...조종을 받는다기 보다는 섹스에 미쳐있게 만든 것 같기도 했지만, 최소한 인간 남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
인류를 위하여.
제우스를 위하여.
설령 이대로 죽더라도 명계의 신인 하데스가 자신의 용기에 감탄하여 누이의 행방을 알려주지는 않을까.
카드모스는 마음을 다잡으며 올림포스 산을 올랐다.
신들과 님프들 중 누구도 카드모스를 막지 않았다. 그는 기어이 홀로 당당히 올림포스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와…!"
올림포스 산 중턱에서 보이는 광경은 그의 가슴을 웅장해지게 만들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산의 절반이 깎여나가있고, 대지는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져있고, 나무는 전부 꺾이고 불에 타 재만 남아있었다.
페니키아 인근에 있는 거대 괴수조차 함부로 얼굴을 들이밀지 못할 만큼 거대한 상처가 대지에 남아있었다.
그것이 제우스 신과 누군가가 싸운 흔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하아, 하아.
"!"
어디선가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자…?"
카드모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올림포스 산 아래에서 들었던 여인들의 신음은 어디까지나 강제로 당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이 신음은 스스로 조절하는 신음이다.
남자를 향한 비웃음이 깔려있는 듯 했고, 카드모스의 귀에는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하아, 항, 하아...좋아…."
"크읏…."
애써 신음을 참는 소리.
밖의 여인들이 남신들에게 강간당하며 신음을 참으려고 한다면, 동굴 속 누군가는 남자였다.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당하고 있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늘이 뒤집혀도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되는 일이다.
그래,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
"후후, 제우스. 따먹히는 기분은 어때?"
"!!"
카드모스는 숨이 턱 막혔다.
여자의 말을 해석하느라 머리가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결코 믿을 수 없다.
지금, 저 여자는 제우스가 따먹힌다고 한 건가?
"하항, 여전히 눈빛은 반항적이네. 좋아, 그 눈빛. 그래야 강간하는 재미가 있지."
여자가 '제우스'라고 부르는 자를 강간한다.
카드모스의 머릿속에서 뭔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태양의 소실.
신들의 전투.
제우스의 패배.
...그리고 제우스가 강간당한다.
저 여자는, 제우스를 이기고 범하는 자다.
"이, 이런-"
"쉿…!"
뒤에서 누군가가 카드모스를 눌렀다.
카드모스는 자신을 덮는 것에 놀랐으나, 곧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 누구?"
제우스를 범하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만 소리를 냈어도 금방 걸릴 것 같았고, 카드모스는 숨조차 쉬지 않고 숨을 죽였다.
"...누가 여자 찾으러 이 안으로 온 건가? 칫, 여기에는 한 명도 없다니까. 하아, 흥이 식었네. 이대로 넣고 있어야지."
여자는 하품과 함께 더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제서야 카드모스는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우, 걸리는 줄 알았네."
뒤에서 들려온 긴장된 목소리.
"저기, 누구…."
"나? 헤르메스."
전령의 여신, 헤르메스는 카드모스와 함께 뭔가를 뒤집어 쓴 채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인간. 도와줘. 제우스 님을 구해야 해."
"제우스...님? 그럼 저기있는 저…."
"그래."
청년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미소년이라고 해야할까.
"저 반항적인 금발 남자애가 제우스 님이야. 티폰에 의해 힘이 빼앗기고 있는."
"......."
제우스는 티폰에 의해 착정으로 힘을 흡수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