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122화 (122/235)

EP.122 에우로페 (1) 플레이야스 시대의 개막

페니키아에는 보물이 있다.

이 보물은 다른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그 보물의 정체는 바로 사람, '에우로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헤라 여신의 조각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여인이 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에우로페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페니키아 왕국의 살아있는 보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남자라면 누군들 다 노리고 있는 아리따운 여자였다.

페니키아의 국왕, 아게노르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에우로페의 모습에 한탄했다.

"내 딸이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탈이구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여인이 아름다우면 좋은 거죠."

"아름답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있소. 바로 우리의 선조 중 그 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오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아게노르의 말에 부인이자 왕비, 텔레파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오.

최초로 제우스의 아이를 낳은 인간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영웅 에파포스를 낳았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이를 잘 키운 대가로 저 멀리 다른 나라의 여왕이 되어, 여신으로 칭송받았다고 하더라.

그러나 그 과정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제우스가 이오에게 반해서 이오를 안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오는 원래 어떤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그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그러던 와중에 제우스가 남자의 자리를 가로채고 이오를 임신시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티탄, 위대한 제우스조차 그 모습을 보고 범하려고 달려드는 미모.

"에우로페가 이오처럼 될까 두렵소."

"불경한 말 하지 마세요, 여보. 제우스 님이 들으실 수 있어요."

"...하아. 그렇지. 들으시면 오히려 더 아이를 만나러 오실테지. 씁, 그건 안 될 일이오."

아게노르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에우로페가 머무는 별궁이 있었고, 별궁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창을 든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에우로페의 남동생들, 카드모스, 포이닉스, 킬릭스도 있었다.

어째서 세 왕자들까지 대대적으로 나서서 밤늦게 경호를 서고 있는가.

그것은 며칠 전, 왕궁의 기둥에 갑자기 화살이 박혔기 때문이다.

화살 끝에는 얇은 천이 하나 묶여있었고, 하얀 천에는 동물의 피로 쓴 듯한 글귀가 남아있었다.

-페니키아의 보물, 에우로페는 내가 데려가겠다. 괴도 쥬지.

범행의 예고장이었다.

감히 어떤 자인지는 몰라도, 한 왕국의 왕을 조롱하듯 왕좌의 옆 기둥에 화살을 쐈다.

언제든지 왕을 죽일 수 있었다는 말이지만, 정체불명의 괴도가 노리는 건 왕의 목숨이 아닌 공주였다.

"부디 큰일이 없어야 할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에우로페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이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봐요."

텔레파사는 별궁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병사들과는 사뭇 다른 세 명의 여인이 서로 병장기를 들고 당당히 서있었다.

금발에 태닝을 한 거친 전사 여인.

긴 흑발에 눈을 감고 있으며 실실 웃는 듯한 여인.

그리고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체구를 가진, 소녀라고 평하는 게 옳을 것 같은 여인.

그들은 모두 야릇한 눈빛으로 괴도 쥬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우로페의 이야기가 퍼지자마자 바로 달려온 여자들이에요. 역시 여자의 편은 여자라고요. 호호."

"...반대 아닌가?"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닐세. 흠흠."

아게노르는 옆에서 느껴지는 제우스의 번개와도 같은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세 여전사를 살폈다.

"...저 여자들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리겠지."

"당연하죠. 카드모스가 이기기 어려워 할 정도로 강한 전사들이잖아요."

"그러게. 어디서 저런 여인들이 나타났는지 모르겠어."

여인의 몸으로 남자보다 더 강할 수 있을까, 라는 평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햐면 여인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라는 평가가 더 어울리기 때문에.

"정말 저들은 무엇일까? 정체가 뭐길래 그리도 강한 것일까?"

"모르죠. 에우로페를 지키기 위해 위대한 신께서 보내주신 전사일지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게노르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괴도 쥬지도 불쌍하게 되었군. 저 셋에게 잡히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할테니."

"강간이라뇨? 정당한 처벌이라고 해야죠. 에우로페를 범하려고 했으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괴도 쥬지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괴도 쥬지를 우리가 잡으면 우리가 마음껏 그를 '사용'하겠노라 말했다.

"저들은 도대체 뭘까."

정체불명의 여인들은 먹이를 노리는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들이었다.

마치, 괴도 쥬지를 잡기 위해 모인 것 처럼.

* * *

최초의 플레이야스 이후.

우리는 많은 플레이야스를 만들어냈다.

헤파이스토스는 여신들에게 플레이야스를 만들어줬고, 여신들은 인간의 시선에서 인간 세상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신들은 플레이야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순결을 서약했다.

-제우스 님 말고 다른 존재랑 몰래 섹스하려고 생각하면 플레이야스에 의식을 넣을 수 없어요.

제작자, 헤파이스토스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플레이야스는 인간을 체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무리 영혼과 의식의 일부라고는 해도, 제우스 님 이외의 남자와 살을 부대끼는 건 제우스의 딸인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나, 아폴론이 태양빛이 닿는 곳의 모든 플레이야스를 감시할 거야. 그리고 만약 아버님이 아닌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쏴버리겠어.

-섹스는 밤에 주로 하지. 불륜을 저지르는 자, 나 처녀신 아르테미스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누구든 플레이야스로 제우스 이외의 자와 살을 섞는다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유니콘을 타고 달려와 플레이야스의 심장에 활을 꽂아넣을 것이니.

-물론 플레이야스를 받는 여신 여러분은 결코 제우스 님 이외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인간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맞죠?

-당연하지.

-그래서 폭발 기능을 함께 넣었습니다. 행여나 누가 의식을 잃은 플레이야스를 범하더라도, 다른 남자의 물건이 닿으려고 하면 닿기도 전에 몸이 폭발하도록 만들었답니다.

-.......

불륜을 하는 자, 폭발할 지어니.

-건전하게 인간을 체험하고 오세요.

헤파이스토스의 엄포에 여신들은 성행위 이외의 것들을 인간 세상에서 즐기기 시작했다.

-인간! 짜릿해! 재미있어!

-인간에게 반말을 듣다니!

-인간에게 명령을 듣다니!

-신들 앞에서는 절절 메던 것들이 뒤에서는 이렇게 뒷담화를 한다고? 이야, 이거 너무 재미있는데?

초기에는 플레이야스에 의식을 담아두는 시간이 필요하여 신이 잠시 잠들어야 했지만, 이제는 신과 플레이야스가 동시에 의식을 가지게 되어 많은 신들이 애용을 하기 시작했다.

신의 의식은 올림포스의 일을.

인간의 의식은 지상의 유희를.

바야흐로, 본격적인 유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올림포스의 수많은 신들은 플레이야스에 빙의하여 세상을 누비기 시작했고, 플레이야스끼리는 서로 존재를 눈치채도 모른 척하거나 함께 행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 하나.

-이 세상 어딘가에 쥬피터가 있다.

-그 자를 찾아야 해.

-쥬피터 따먹고 싶다!

제우스의 플레이야스, 쥬피터를 강간하는 것.

이유는 단 하나.

제우스의 아들을 낳기 위해서.

-인간 이오가 제우스의 아이를 낳은 것처럼, 잘하면 우리도 가능성이 있다!

-여신의 몸으로는 딸을 낳았지만, 플레이야스로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어!

-내 아들은 영웅이 될 거야!

여신들은 인간 세상에 자신의 영향력을 뿌리는데 심취했다.

그래서 직접 제우스의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어머니 여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다니며 신앙을 높이고자 했다.

사랑하는 위대한 제우스와 섹스를 하고.

쥬피터라는 새로운 남자와 섹스를 하는 듯한 불륜(?)도 즐기고.

사랑하는 이의 아들을 낳아 아들을 길러보기도 하고.

아들이 신의 이름을 드높이며 신앙이 더욱 높아지는 일련의 과정은 여신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쥬피터가 아니더라도 여신들은 인간 체험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쥬피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히 아랫배가 욱씬거리는 법.

-얘, 그 소식 들었어? 제우스 님이 페니키아의 공주를 보고 입맛을 다셨대!

-뭐? 사실이야? 그러면...혹시 따먹으러 오시나?

-앗. 여자를 범하려는 파렴치한 '인간'은 용서할 수 없지!

-강간은 강간으로 복수한다! 호호호!

마침 들려온 유언비어는 많은 플레이야스를 페니키아로 달려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괴도 쥬지의 등장.

쥬지.

쥬, 피터, 지.

* * *

"경계가 더럽게 삼엄하군."

나는 페니키아 왕국의 별궁을 살폈다. 그곳에는 페니키아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몇몇 플레이야스까지 눈에 불을 켜고 침입자를 찾고 있었다.

"씁. 그냥 예고장 없이 몰래 따먹으러 갈 걸 그랬나."

조금 후회가 된다.

얌전히 예고도 없이 에우로페의 별궁으로 들어갔으면 아주 안전하게 납치를 하는 건데, 이렇게 경비가 삼엄하니 안 들키기에는 조금 무리인가 싶기도 했다.

"그건 안 되지."

이건 '게임'이다.

내기에서 이기면 엄청난 포상이 딸려있고, 나는 무조건 승리하여야 한다.

"가자, 나의 파트너."

나는 괴도가 사용하는 단검, 케라우노스를 움켜쥐고 지붕을 달렸다.

과거 오르튀스 산에 숨어들어 레아를 구출했던 때처럼, 아주 은밀하게 별궁의 안으로 숨어들었다.

"누구-"

까앙.

"휴, 목격자 없음."

나는 식량창고 안에 숨어들었다.

오늘 에우로페를 납치하기로 했기 때문에, 여기서 오랫동안 숨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역시, 당신이라면 이곳으로 올 줄 알았어."

내 앞길을 가로막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하얀 머리칼에 커다란 가슴을 가진 여검사였다.

"나, 나는 키벨레! 여자를 강간하려는 악적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하아."

나는 눈앞의 여인이 누군지 바로 실체를 알아냈다.

"이봐."

나는 케라우노스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비키지 않으면 따먹는다."

플레이야스가 누구든지.

쥬피터 앞에 걸리면, 따먹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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