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 강간마 제우스 (4)
레토, 실종.
이 경우는 가출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이유는 하나.
자괴감.
그녀는 헤라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쌍둥이를 낳으면 그들이 내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질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그녀는 헤라가 자신을 질투하고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첫번째 딸인 헤파이스토스는 여자의 몸으로 대장장이 노릇을 하고, 두번째 딸 '아레스'는 아테나 보다 못한 콩라인 전쟁의 신이 될 거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데메테르나 헤스티아의 딸도 아니고 레토라는 또다른 여신에게서 나온 쌍둥이가 내 다음가는 권력을 차지한다고 하니 복장이 뒤집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다만.
거기까지다.
헤라는 그렇다고 두 아이들을 시기하여 죽이려는 악녀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지.'
크레타 섬에서의 1년 10개월.
나는 레아와 함께 나의 동생들을 키우며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실시했다.
인성교육!
나는 인권과 윤리와 도덕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생각나는대로 씨부렸고, 온갖 전래동화의 이야기를 그리스 식으로 탈바꿈하여 창작했다.
어쩌면 다섯 여신들은 원전의 그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제우스로서 어쩔 수 없이 이 여자 저 여자 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여자를 마구잡이로 빼앗는 짓을 저지르는 걸 능동적으로 하는 짐승으로 태어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의 유교인이 제우스를, 그리고 제우스의 다섯 여동생들을 상식과 인륜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즉, 지금의 헤라는 질투심이 조금 있어도 그걸 나한테 침대에서 푸는 여자가 되었다.
결코 레토와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할 여자가 아니다!
'망할 티탄 상식!'
그런데 티탄들의 상식은 다른 모양이다.
현실의 이복형제도 서로 돕고 살며 안쓰러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레토는 티탄의 상식으로 헤라를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해는 된다.
괜히 나에게 상담을 해봤자 팔은 안으로 굽을 것이고, 까딱 잘못하면 '크로노스'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생겼을 것이다.
예를 들어, 헤라가 레토의 쌍둥이 자식들을 잡아먹어 뱃속에 집어넣는다거나.
레토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미래까지 그려졌을테니 상당히 두려웠을 터.
도대체 왜 티탄들은 이러는 걸까.
새롭게 만들어지는 올림포스의 휴머니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들의 티탄 상식은 나의 올림포스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잦았다.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면 결론은 하나.
'운명에 대한 예언'.
티탄 신이 내린 예언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피할 수 없기에, 그걸 마치 필연처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피하기 위해 티탄은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인간마냥 발악을 하게 되는 셈이고.
'이건 안 돼.'
앞으로도 이러면 안 된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운명과 예언을 통제해야한다.
현재, 헤라가 레토를 직접 찾으러 떠난 사이.
나는 레토의 가출 문제에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를 찾으러 올림포스 밖으로 나왔다.
메티스의 문제.
레토의 문제.
그 모든 일의 원흉.
"오랜만입니다, 가이아."
이들에게 직접 예언을 내려준 당사자, 가이아를 찾았다.
* * *
"오랜만입니다, 제우스. 더욱 늠름해졌군요."
"가이아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가이아의 영지.
전쟁의 포화를 빗겨가 이제는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으나, 올림포스보다 못하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올림포스를 직접 가꾸어가다보니 체감이 된다.
'조화의 정원.'
데메테르가 꾸미는 화원은 자연 그 자체에 티탄들이 동화되어가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식물도 서로 약육강식으로 살아가는 만큼, 다른 식물보다 햇빛을 더 잘 받고 더 예쁜 꽃을 피우는 경우가 있는 반면 시들고 줄기가 꺾인 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연이다.
가이아의 정원은 그 어떤 꽃도, 식물도 시들어있지 않았다.
생기가 없다.
그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가이아 또한 마찬가지.
이전에는 몰랐지만, 내가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난 뒤에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가이아는 정말이지, 신 다웠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제우스가 이렇게 찾아온 일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제 도움이 필요합니까?"
"도움이라고 하면 도움이고, 부탁이라고 하면 부탁이고, 협조라고 하면 협조가 되겠죠. 그리고...명령이라고 하면 명령이고."
다소 고압적인 단어에 가이아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조용히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나를 흘겼다.
"명령이라?"
"가이아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건 즉 내가 불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라는 거군요."
가이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보십시오. 제우스, 그대가 그렇게 긴장하면서 묻고자 하는 게 뭡니까?"
"모든 존재의 운명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둬주십시오."
한 마디로, 이거다.
예언, 멈춰!
"가이아께서는 선한 의도로 예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예언으로 인해 숱한 이들이 결국 피해를 본 경우도 있죠."
"나의 잘못이다?"
"예."
시작은 돌려말했어도, 한 번 물꼬를 튼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레토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무분별한 예언은 멈출 필요가 있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지 말라? 슬픈 미래가 다가오더라도?"
"미리 예방하자는 취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독이 될 수도 있고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IF'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생각하게 되어버리면, 사람은 그에 따른 피로감에 현재를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설령 힘든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올림포스는 예언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예언에 따라 정해지는 미래 따위 바라지 않는다.
"후후, 예언을 하나 할까요?"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제우스, 당신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 몰락할 겁니다."
가이아는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전면에서 반기를 들자, 그녀는 내 미래를 예언해버렸다.
"그대는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입니다. 하지만...그렇다고 서로 싸우면 하늘과 땅이 먼저 소멸하게 되겠죠. 그런 건 그대도 사양일 겁니다. 하지만."
가이아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쥐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그대가, 결국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죽을 겁니다. 그대는 자멸하게 되겠죠."
"가이아. 그거 아십니까?"
나는 가이아의 손목을 잡아 떨어뜨렸다.
"가끔가다보면 말입니다, 가이아의 예언은 마치 선전포고처럼 느껴집니다."
"뭐라고요?"
"일단 되는대로 말한 다음, 그걸 실제로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뭐...."
처음으로, 가이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으나, 애써 속을 다독이며 계속 가이아를 압박했다.
"틀립니까? 크로노스가 낳은 자식 중 한 명...아니 크로노스의 자식이 크로노스를 물러나게 만들었지요. 당신은 거기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그렇지 않습니까?"
"제우스…! 그건 내 딸인 레아가 고통을 받았기에…!"
"만약 진정으로 고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로노스에게 화풀이 식으로 예언을 내리지 말았어야죠. 가이아께서 그런 예언을 내린 계기가 무엇입니까?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기 전, 가이아 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 아닙니까.
타르타로스에 갇힌 키클롭스나 헤카톤케이레스와 같은 이들을 지옥에서 꺼내는 것.
그것이 가이아가 크로노스에게 바란 것이었으나, 크로노스는 이들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지옥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이아가 예언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예언이 레아가 자식을 다섯 명이나 잃고 한 명을 떠나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메티스가 아테나로서 스스로를 죽여야 했던 것.
레토가 괜히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
그 모든 것은 운명과 예언으로부터 나온다.
"후, 후후…. 제우스. 가이아의 예언은 절대적입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걸 아십니까, 가이아? 저도 하나 예언을 하겠습니다."
나는 감히 가이아를 향해 협박성 예언을 남겼다.
"올림포스와 가이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우스가 인간 여인과 낳은 자식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뭐라고…? 인간…?!"
놀랍겠지.
고작 하등 동물이라고 생각한 인간을 상대로 자식을 낳을 생각을 하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그 자식이 감히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예언은 절대적이라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그러니...그 예언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자.
"만약 가이아께서 예언을 내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이아 여신이여.
"계속 티탄 신들의 미래를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여 비극을 남기려고 한다면."
나랑 싸울 거면 헤라클레스와 싸울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그 때는 전쟁이다, 가이아."
나의 올림포스에 정해진 운명은 없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긴다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나는 가이아의 허리를 잡고, 그녀와 키스하기 직전까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널, 따먹겠다."
강간마 제우스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