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78화 (78/235)

EP.78 정실결전 (3)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이 하나만 먹으면 질린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리고, 또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지는 법.

혈관에 치즈가 가득하니, 김치든 피클이든 뭔가로 씻어낼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올림포스에는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밖에 없다.

매운맛과 감칠맛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담백하고 느끼하고 기름진 맛의 향연이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크레타 섬, 동굴에서 지낼 때 온갖 요리를 연구했다.

그 연구 결과를 몇 가지 집대성하여 우리 가족끼리 즐기는 음식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올림포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맛, 제우스 님! 요리하는 남자라니! 섹시해!

-저도 한 입만 주세요!

여신들이 내 요리를 보고 환장해서?

아니다.

여신들은 내가 부엌에 들어가려고 하자마자 환장을 했다.

뭔가 다른 음식을 만들려고 해도, 나는 부엌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는 거 아니예요!

유교가 너무 일한다.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도 요리장 중에 남자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올림포스는 부엌을 마치 금남의 구역처럼 정하고 기겁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느 정도냐고?

알몸으로 목욕하는 샘에 대놓고 들어가는 건 괜찮지만,

정장으로 부엌에 들어가는 건 기함을 하며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

"...끙."

수많은 여신들은 내가 부엌에 들어와 조리 도구를 잡는 것 자체에 기함을 했다.

이를 통해 나는 동굴에서의 삶이 기존 티탄들의 삶과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레아나 내 여동생들은 내가 요리를 하는 것에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이유는 하나.

-어머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 닭을 삶아봤단다.

-어머님은 역시 생명의 어머님이시군요. 닭이 너무 설익어서 저희가 아주 약간의 힘만 부여해도 금방 살아나서 새벽을 향해 목청껏 소리칠 것 같은 상태입니다!

내가 레아보다 요리를 잘했으니까.

아말테아로부터 배우기도 했고, 나는 크레타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요리를 깨우쳐야만 했다.

나, 제우스.

그리스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남자 티탄.

그런 나와 비교를 했을 때, 레아는 뭐든지 전부 숯으로 만들어 땅으로 되돌려보내는 대지의 여신이었다.

-요리 해본 적 없습니까?

-...없단다.

어떻게 전직 자취생의 생존요리보다도 못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레아는 순도 100% 여신이었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적통으로 태어나면서 최정점의 삶이었고, 크로노스에게 결혼당하여 동굴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그 삶이 바뀌지는 않았다.

주생활과 성생활을 제외한 의, 식생활 모두 그리스 최고 주신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여자였다.

-어머니, 오르튀스의 삶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화려한 보석이 반짝이지만 새장 안에 갇혀사는 것보다, 손에 흙 묻히며 너희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구나.

-크으.... 안되겠네, 레아. 나 섰어.

-가, 갑자기?! 아, 안 돼...! 손에 흙 묻히겠다고 했지 엉덩이에 묻히겠다고는...아항...!

레아는 크레타 섬의 생활에 맞춰서 생활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게 현대 사회에서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심각한 금기인 걸 몰랐다.

"쳇."

입안이 간지럽다.

또 올리브만 입에 집어넣으려고 하니 입안이 심심해서 견딜 수가....

"아!"

유레카.

나는 곧장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다.

"헤라야!"

"...오빠?"

헤라는 한창 베를 짜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자기 자신을 감싸기 위함인 듯, 그녀는 옷감을 만드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도와줘, 헤라에몽."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알렸다.

헤라는 내 말에 허탈해하면서도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오빠가 부엌에 이제 들어가면 안 되지. 오빠는 그냥 조용히 옥좌에 앉아 있으면 돼. 그러다가 '넥타르', 그러면 애들이 넥타르 가져와야지."

물은 셀프라는 상식을 가지고 살던 내게 그건 너무 어려운 처사다.

"그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만들 줄 모르는 걸."

"으휴. 알았어. 두 시간...정도면 되겠지? 가서 떡치고 와."

헤라는 베를 멈추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가 말한 대로 이곳 저곳을 어슬렁거리다가 나의 아이를 임신한 여신을 덮쳤다.

찌걱, 찌걱.

2시간 뒤.

헤라는 '그것'을 가져왔고, 나는 헤라가 따로 만들어온 음식에 눈물이 다 날 뻔 했다.

"크으.... 이거지."

"정말,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좋아한다기 보다는 고향의 맛이지. 크레타 섬에서 이걸 얼마나 많이 먹었냐. 응?"

얇게 편 밀가루 반죽.

안에 삶고 쪄서 다진 고기와 채소.

내가 따로 주문하지 않았어도 철저히 나의 기호에 맞춰서 선택된 재료들.

그리고 그걸 기름에 굽든 튀기든 삶든 찌든 어떤 방법으로든 익혀내기만 하면 끝나는 음식.

무엇을 숨기랴.

만두다.

아니, 스파나코피타인가?

메티스는 내가 말한 음식을 스파타코피타라고 말했고, 나는 안에 들어가는 재료를 듣고 기겁을 했다.

시금치와 치즈로 만든 만두? 윽.

아무렴 어떠랴.

안에 대충 고기넣고 채소넣고 기름에 지지면 그게 다 만두지.

'만두만 먹던 때가 생각나네.'

어떻게든 100g 당 싼 만두를 찾아서, 그걸 냉동실 안에 꽉꽉 채워서 해동해서 먹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군만두를 구워먹으면 기름을 써야하니까, 기름 살 돈도 없어서 끓는 물에 빠르게 삶아 먹던 나날이 생각난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건 크레타 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살아야만 했던 동굴 라이프.

"오빠, 맛있어?"

"그래. 역시 헤라가 제일이야."

그 고난의 행군 속에서 나는 헤라의 요리에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요리를 보고 내 옆에서 배웠고, 이제는 나보다도 더 뛰어난 요리 솜씨를 익혔다.

넵튠이 물을 다스리며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쓸어버리고,

하데스가 죽은 자들이 감히 지상에 들끓지 않게 사령술을 다루는 동안,

헤라는 내가 언제든지 집에서 쉴 수 있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오빠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네. 정말."

"......."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헤라를 내심 우승 후보, 아니 '어우헤'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편해.'

메티스와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헤라의 품은 내가 언제든지 와서 누울 수 있고, 안을 수 있고, 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는 안락감이 있었다.

메티스가 아테나로 환생한 이후, 나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는 안식처를 잃어버렸다.

이전에는 메티스의 품에 안겼다면, 지금은 눈치를 보고 만나야 하는 상황.

그런 의미에서 헤라는 내게 요람과도 같은 안식을 줬다.

헤라를 정실로 공언한다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꽁냥거려도 다들 질투나 하겠지.

'그럼 아테나는?'

아테나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헤라라는 정처를 두고 불륜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나는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던 사람이다.

이미 아이도 숱하게 낳은 시점에서, 단지 아이를 낳았다는 것 만으로 나의 아내라고 한다면 그리스 전역에 내 아내들로 영지를 각각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티탄 여신들이 그리스 최고 주신, 제우스에게 바라는 역할이자 의무였다.

종마로서 가장 우수한 존재!

좆이 아무리 작아도 우수한 자식만 낳을 수 있다면 된다.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자식들, 그러니까 메티스의 사촌은 무려 6천 명이나 존재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티탄 여신들을 조금 많이 임신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흠결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9할 타율로 임신시키고 난 뒤에 나에 대한 지지가 더 높아지기만 했지.

헤라는 그걸로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좆을 좆대로 놀려도, 그녀는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나를 믿었다.

"헤라."

"응, 오빠."

"너는 내가 다른 여자랑 하는 거, 싫어?"

"싫지."

내 건방진 물음에 헤라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답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 걸 어떻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겠어? 당연히 싫지."

헤라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레아 어머니도 그렇고, 다른 언니 동생들도 그렇고 솔직히 싫어. 나만 독차지하고 싶고, 나만 오빠 아이를 낳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헤라는 쓰게 웃으며 내 볼을 손바닥으론 눌렀다.

"내가 약한 걸 어떻게 하겠어."

"그건...."

"나 혼자서는 버거워. 그러니까 차라리 인정하는게 나아. 그게...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니까."

자기 혼자서는 감당을 할 수 없으니, 아예 처음부터 인정해버리고 내게 자유를 주겠다.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올림포스 최고 주신의 아내'는 안 된다.

"헤라야."

나는 헤라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너에게 정실결전에서 이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줄게."

"뭐...?"

헤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헤라가 이길 수밖에 없는 아주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오, 오빠. 그건 반칙이잖아. 이건...아니야."

"뭐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렇지만...그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언니들이나 동생들한테는 너무 미안한 걸."

"이미 얘기 끝났어. 다른 동생들이랑 다 이야기를 하고 온 거야."

"뭐...?"

헤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다른 사람들이...인정했다고? 나를? 내가 정실이 되는 걸...양보했다는 거야?"

"그래. 뭐...네 명의 전언을 모두 전하면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전할게. 헤라, 잘 들어."

나는 헤라의 어깨를 붙잡고 단단히 일렀다.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야. 오직 너만이 내 마지막 부인이 될 수 있어."

"그건...."

"넵튠은 바다를 다스리고, 하데스는 지저를 다스리지. 데메테르는 땅을 다스리고, 헤스티아는 화로를 관리해야해.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올림포스를 다스릴 수 있을만큼의 능력은...솔직히 모자라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헤라가 적임이다.

"제우스의 정실이 된다는 건 나와 함께 올림포스를 다스린다는 거야. 모든 여신 중의 최고 여신이 되어야 한다고. 서열 상으로도 네가 최고 여신이 되는 게 맞지 않겠어? 넵튠과 하데스처럼 하나의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지만...그 다음으로 중요한 곳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어디?"

"내 침대."

"풋...."

헤라는 고개를 떨궜다.

"정말이지.... 이미 큰 선물을 받았는데 너무 큰 선물을 또 주는 거 아니야?"

헤라는 만삭이 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좋아. 그렇게 할게. 오빠의 정실 자리, 내가 가져가겠어."

"고마워, 헤라."

"...그런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나를 왜 정실로 선택한 거야? 혈통이나 서열, 그리고 다른 걸로 따지면 데메테르나 헤스티아도 할 수 있었잖아."

"별다른 이유 없어."

진짜로 별 거 아닌 이유다.

"나한테는 다른 여자들보다 네가 제일 예쁘니까."

취향저격.

그것만큼 평생의 반려를 고르는데 확고한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그거면 안 돼?"

"...충분해."

헤라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장 예쁘다고 했으면서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가만 안 놔둘 거야."

"어떻게?"

"침대에서 죽여버릴 거야."

"...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다.

이 때.

나는 확실하게 정했어야 했다.

그녀가 말한 다른 여자의 범위와 내가 생각하는 여자의 범위가 천지차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런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실결전.

짜---악.

헤라는 내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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