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23화 (23/235)

EP.23 나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3)

크로노스가 농경의 신이라면, 레아는 대지의 여신이다.

가이아의 뒤를 이어 땅을 관장하며, 대지는 그녀의 영역이다.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가 대지와 마찬가지인 레아에게 씨를 뿌린다는 것에 나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하아, 하아, 하아."

나는 레아를 데리고 탈출했다.

과거 내가 태어났던 때, 레아의 방 구석에서 가이아가 마치 산파처럼 받았던 그 구멍은 어느새 내가 레아를 안고 미끄러져도 될 정도로 넓어졌다.

카가가각.

그래도 어렸을 때와 달리 옷 한 벌, 그것도 레아가 다치지 않게 안고 내려가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 정도 고통은 티탄신의 육신에 아무런 고통도 아니다.

콰득!

"제우스!"

"구슬 꽉 쥐세요!"

레아가 걱정해야하는 건 내가 아니다.

그녀가 품에 움켜쥐고 있는 다섯 색깔의 구슬이다.

크로노스가 그것을 먹고 토해낸 곳에서 꺼낸 구슬들.

저것이 분명 포세이돈부터 시작하는 나의 동생들(이 될 존재)이리라.

'내가 알던 것이랑 다른데?!'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분명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무지개빛으로 오바이트를 하고, 옛날 옛 적 사라진 다섯 아이가 이젠 모두 어른이 되어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기억은 틀린 내용이 아니었다.

쥬피터킥을 날려 기습을 걸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기란 힘들었다.

'거기서 죽이려고 했으면 내가 죽었어.'

크로노스의 힘은 크로노스 본인의 힘도 있지만, 그가 우라노스를 잘랐던 낫에도 있다.

내가 레아의 방으로 도망치지 않았더면, 그 낫이 자기 혼자서 날아와 내 목과 자지를 뎅겅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구슬을 회수한 레아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했다.

나 혼자서는 무리고, 나와 비슷한 다섯 명의 힘이 모여야 크로노스를 이길 수 있다.

"크으윽!!"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레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쿵!

두 발이 땅에 닿으며 전신이 울린다.

충격이 조금 크기는 하지만, 바닥은 진창과도 같아서 큰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레아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눈치챈 듯 했다.

"레아!"

나는 그녀에게 눈치를 준 뒤, 바로 내가 떨어진 늪으로 레아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레아는 다섯 구슬을 옷 속으로 품고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구구구구.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레아의 등에 손을 올리고 그녀를 토닥이며, 스멀스멀 서서히 우리를 집어삼키는 진흙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비겁한 놈!! 어디있느냐!!]

하늘에서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태양을 이끄는 태양마차부터 시작하여, 크로노스의 지시를 받은 신족들이 하나 둘 하늘을 뒤덮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와라! 나와서 나와 맞서 싸워라! 어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냐!!]

콰과광!!

하늘에서 떨어진 보랏빛 벼락이 대지를 때렸다.

그 충격에 땅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나무가 우지끈 쓰러졌다.

저것이 크로노스의 영토라서 그런 거지, 그리스가 아닌 외적의 땅이었으면 홍해마냥 땅이 반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도망치기를 잘했어.'

위험한 객기를 부려서는 일도 그르치는 법.

삼십육계에도 줄행랑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있고, 권토중래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고자킥 한 번 날렸으면 됐어.'

지금은 그저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조용히.

저벅, 저벅.

하지만.

"여기인가?!"

"네, 네!"

"!!"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레아의 등으로부터 다급한 두근거림이 전해진다.

"걱정마세요. ...어머니."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들키지 않을 겁니다. 지금 밖에...한 명은 저희를 도우러 온 자니까요."

프로메테우스.

"뭐하는 거야! 여기 아니야!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고!"

그 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 하지만 도망을 쳤다면 분명…!"

"가이아 여신의 품으로 도망쳤겠지! 너는 내 예지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 허억, 허억. 동쪽이다! 동쪽으로 달려가! 당장! 잡지 못하면 크로노스님의 진노가 우리를 덮칠 것이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지시를 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역시 크로노스 휘하의 티탄이면서 올림포스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관록은 허명이 아니다.

예언의 신이 아니라 줄타기의 신이 아닐까.

덕분에 또 도움을 받게 되었고, 우리는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크로노스가 농경의 신이라고 해도,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놓은 비상탈출구를 눈치챌 수 있을까?

결코.

구구구.

"레아!"

나는 레아를 다시 안아들었다.

늪 아래로 빨려들어온 우리는 지하 동굴에 떨어졌고, 아래에는 거대한 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작.

거대한 뱀은 우리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 또한, 계획에 있었으니까.

"휴. 살았군요."

"제우스…? 이건 대체?"

"가이아께서 보내신 인도자입니다. 잘 부탁한다."

쿠르륵.

거대한 뱀은 알겠다는 듯 화답했고, 서서히 땅속으로 더욱 파고들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마치 크로노스의 진노에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모양새라 다소 미안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크로노스를 물리칠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나의 형제자매들.

...그런데 왜 아직도 구슬인 거지.

* * *

대지는 갈라지고, 하늘을 뒤덮이고.

크로노스, 레아를 잃다!

레아가 탈출한 건지, 아니면 레아가 납치당한 건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생명의 어머니 가이아가 레아를 데려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고, 크로노스 또한 가이아가 있는 땅을 노리며 매일같이 찾아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이아가 만든 또다른 자식들, 기가스라는 골렘들을 상대하며 체면을 구겼다.

가이아의 영토에서, 우라노스의 혈액이 뿌려진 땅의 흙을 이용해 만들어진 기가스들은 크로노스의 군대를 간신히 막아냈다.

-레아가 가이아의 신전에 있을테니, 안에 들어가서 확인만 하고 나오겠다.

-가이아의 신전을 어딜 흙발로 들어올 생각을 하느냐, 썩 꺼져라!

레아의 실종을 두고 두 세력은 크게 싸우게 되었고, 크로노스 또한 전선에 나서며 대륙은 혼란에 휘감겼다.

'정작 레아는 여기에 있는데.'

"흐끅, 레아님…."

메티스로부터 받은 접착제로 뿔을 다시 복구하는데 성공한 아말테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레아를 간병하며 눈물을 흘렸다.

크로노스의 영토에서 나왔다는 안심, 그리고 자식들을 되찾았다는 안도.

"그래, 아말테아. 내 아들을 잘 키워줘서...정말 고마워. 네가...제우스의 또다른, 아니 진정한 어머니야."

"흑…!"

레아는 아말테아를 치하하며 한편으로는 쓰게 웃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씁쓸해하는 눈빛이 나를 훑었다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너무 다른 사람 대하듯 해버렸나?'

내 배 아파서 낳아 아기 때 생이별한 자식이 장성하여 돌아왔는데, 마치 생판 남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많이 섭섭할 거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야지 엄마라고 하면 안 되지.'

레아는 여자다.

여신 티탄이다.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타르타로스에 처박으면 그녀는 과부가 된다.

'미망인은 못 참지.'

제우스도 인정하리라.

'예전에 어딘가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레아를 덮쳤다고 한 것 같기도.'

그러니까 덮쳤지.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제우스라면 낳아준 어머니고 나발이고 일단 덮쳤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철저하게 대하고 있다.

'당근 따먹기 위해서지.'

내게 젖을 물려주고 키워준 유모도 따먹었는데, 레아라고 그만 둘 쏘냐.

'참지 마, 내 안의 제우스.'

아무리 내가 원전을 무시하기로 했다고 해도, 딱 하나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제우스의 행적.

제우스가 범한 여자는 범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제우스라는 이름에 대해 실례이며, 제우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나는 레아를 취해야한다.

'크로노스가 괜히 레아를 곁에 두고 계속 범했던게 아니네.'

신좌에 오른 남자가 한 명의 여인을 계속 품는다?

그건 여인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의 레아는 젊은 유부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버렸다.

그러니 떡각을 봐야한다.

나는 얼마든지 박고 쌀 수 있지만, 레아가 내게 가진 거부감을 없애야한다.

'가이아도 나한테 박혔는데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가이아도 아말테아로 변해서 내게 박혔다.

당사자들이야 이에 대해 말하면 극구 부인할테고, 내가 이걸 알아챘다고 하면 가이아가 부끄러워하며 앞으로 안 해줄테니 일부러 함구하고 있다.

사실 본인은 알 것이다.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조임이 다른데 어떻게 눈치를 못 채.'

남자를 아는 보지와 모르는 보지는 조임과 허리 놀림부터 차이가 나는데, 내가 설마 아말테아의 조임을 눈치채지 못할까.

하지만 나는 가이아가 아말테아로 변한 채 나와 섹스를 한다는 걸 모른다.

가이아 또한 내가 자신의 변신을 눈치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모르쇠하며 섹스를 할 뿐이다.

가이아조차 나와 하는데 거부감이 없는데, 레아가 내게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요만큼도 없는 것이다.

'직접 하는 것과 간접적으로 하는 것의 차이인가?'

그걸 지도 모른다.

일단 가이아는 변신을 한 상태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실정이고, 레아는 변신을 할 이유가 하등 없다.

'안 되는데.'

무조건 레아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미래가 순탄해진다.

제우스가 침대에 들일 대상에 있어서 오직 예외는 좆달린 사내 새끼들 뿐이다. 여자도 미인이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을 하던 도중, 크레타 섬에 '그녀'가 나타났다.

"레아, 그리고 제우스."

"가이아 님."

가이아가 나타났다.

아말테아의 모습이 아닌, 레아와 쏙 빼닮은 모습으로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 다섯 아이들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네…."

레아는 품에 안은 다섯 구슬에 눈물을 흘렸다.

"...방법이 있으나, 레아 이건 네가 선택을 해야하는 문제다."

가이아는 나를 슬쩍 흘겼다가 레아의 앞에 섰다.

"아이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할게요!"

레아는 듣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어떤 방법이라고 해도?"

"네! 다시 그 아이들이 자라서 커가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아니, 장성한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네가 다시 낳는 수밖에."

"...네?"

레아는 표정이 굳었다.

"제우스. 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네가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줘야겠다."

"제가요?"

"그래. 이렇게 된 아이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레아의 뱃속에 이 구슬들을 다시 집어넣고,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는 방법 뿐."

"그, 그건 설마…!"

"레아의 안에 사정하거라, 제우스."

손자 사랑은 역시 할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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