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87화 (287/287)

〈 287화 〉 공백기 : 루이스 편

* * *

"아."

검이 또 다시 부러졌다. 천변무궁류의 출력을 버티지 못한 탓이다.

검왕검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이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역시……, 내게는 검왕검이 필요한 것일까.

"……아냐. 내가 그동안 지나치게 검왕검에 의존하고 있었던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생각을 고쳐 먹었다.

물론 무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실력 부족이다.

신체 강화 마법과 마찬가지다. 신체 강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마력으로 증폭된 신체 능력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관절과 인대, 골격을 보호하는 것이니까.

그 점을 무시하면 증폭된 신체 능력은 오히려 육체를 망가트린다.

무기도 마찬가지. 무기를 강화 하는 것과 동시에 강화된 능력이 무기를 부수지 않게 보호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천변무궁류의 경우, 다루는 마력의 단위가 지나치게 높은 탓일까. 이따금씩 나조차 제어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검이 버티지 못한 건 그 때문이다.

검왕검을 쓰면 부러질 걱정 없이 출력을 높일 수 있겠지. 하지만 검왕검에도 한계는 있었다. 애초에 검왕검을 잃게 된 이유가 그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나는 과연 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 * *

오늘 분의 재활 훈련을 끝마친 후 집에 돌아왔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은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는데,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나야."

짧은 말이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목을 주무르면서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오른쪽으로 틀어묶은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뒤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으, 죽겠다."

그리고 침대 위에 엎어져서 어린애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쟤도 이제 스물다섯인데, 몇 살을 먹어도 애 같다. 차라리 샤를로트가 더 어른스럽겠다.

"……야, 백신현."

"왜?"

도대체 언제까지 저럴까 싶어 다시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는데, 갑자기 루이스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나를 불렀다. 입술은 왜 또 저만큼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입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거야?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입은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지금 루이스는 매끈한 정장 차림이다. 흰 블라우스 위에 검은 재킷을 걸쳤고, 하의는 빳빳한 타이트 스커트. 스타킹과 부츠까지 검은색이다.

전체적으로 칙칙한 톤이지만 루이스의 금발이 워낙 화려한 탓에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균형이 맞아 보인다. 잘 어울린다.

물론, 루이스에게 안 어울리는 옷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너어……"

차가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루이스가 도끼눈을 뜨고 있다. 입술도 여전히 삐죽 나온 상태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사건 수습하러 다니는 거지?"

"흥, 맞아. 너도 알고 있었으면서."

루이스가 고개를 획 돌린다. 그러다 또 다시 숨을 토해내면서 침대 위에 쓰러진다. 꽤 피곤한 것 같다. 특히 정신적인 피로가 엿보인다.

"귀찮은 일은 진짜 하기 싫었는데……, 선생님은 처세술이 젬병이고…… 넌 재활 하느라 바쁘고……"

내가 따라 갔더라면 루이스의 고생이 크게 줄어들었겠지만 나의 도움은 오히려 루이스 쪽에서 거부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힘이 부족하면 얕보일 수밖에 없는 바닥이라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그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루이스의 의지를 존중해서 재활에 집중 하고 있다.

루이스가 혼자서 못하는 일이 있다면 또 모를까. 이쪽은 연금술사와 다르게 처세술에도 능한 편이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맞지 않은 일인 건 사실이라서, 미팅을 한 차례 끝마치면 루이스의 상태가 보통 이렇다.

"인간이 밉다……."

물론 저 정도까지 나가는 건 좀 심하긴 한데.

대부분 그 순간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튀어 나오는 말인데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일을 회피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내버려두고 있다.

또, 루이스가 쉬운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와 루이스가 반대 입장이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나도 처세술은 능숙한 편이지만 속에서는 스트레스가 그득그득 쌓여 갔겠지.

겨우 이 정도로 끝난 걸 보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있잖아, 있잖아. 내 말 좀 들어봐……"

루이스가 다시 상반신을 일으켰다. 손이 심심했는지 품에는 내 베개를 안고 있다. 그거 오늘 빨 생각이었는데…… 에이, 됐다. 당사자는 신경 안 쓰는 거 같으니까 상관 없겠지.

"그래서, 그때 그 아줌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크으으으……, 지금도 이가 바득바득 갈리네."

사건의 수습을 위해서 뛰어 다니는 고충은 나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루이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면서,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니다 싶은 부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가끔은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잘못된 생각은 아닐 거다.

참,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하지만 불꽃도 심지가 다하면 꺼지는 것처럼, 루이스의 분노도 오래 가지 않았다. 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기분이 많이 풀어졌는지, 점점 대화가 일상적인 화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사건의 뒷수습으로 바쁜 루이스는 미팅을 위해서 수많은 도시를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그런 과정에서 새롭게 보고 배운 것이 많은 것 같았다.

보지 못한 도시, 먹어보지 못한 음식, 그런 화제를 입에 담을 때마다 루이스의 표정에 조금씩 웃음기가 돌기 시작한다. 여유가 날 때 같이 가보자면서 얼떨결에 약속도 잡았다.

"후우……, 이제야 좀 개운해졌어."

속에 쌓여 있던 울분을 모조리 해소했는지, 루이스는 한결 밝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시선을 맞춘다.

"너도 고생했어. 내 투정 들어주느라."

"투정이라는 자각은 있었어?"

"왜,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

알면서 그러는 거면, 그게 더 악질인 거 아니냐.

차마 입에 담을 말은 아니라서 조용히 속으로 삼킨다. 그런데 갑자기 루이스가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말했다.

"알면서 그러는 거면 그게 더 악질인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귀신 같구만. 내 마음이라도 읽는 줄 알겠다.

"흥, 네 생각이야 뻔하거든?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좀 더 제대로 숨기라구."

거 참, 성가신…….

"아, 지금은 성가진 여자라고 생각했지?"

"너 진짜 대단하다."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역시, 서로 너무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까 거짓말이 전혀 안 통한다. 도대체 어디에서 걸린 거람? 심장 소리와 불수의근에도 실수는 없었는데.

나는 자세를 유지한 상태로 질문했다.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네가 좀 성가신 것 같아서 그래?"

"윽……"

정곡이었는지, 루이스가 흠칫했다.

보기보다 이 여자는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다. 자아성찰을 너무 심각하게 하는 바람에 가끔씩 삽을 풀 때도 있지만, 최소한 과대평가를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루이스는 뻔뻔했다. 품에 안은 내 베개를 꽉 끌어 안은 채 고개를 획 돌린다.

"미이이이이이이……, 안하네요! 성가신 여자라서!"

그러고 나서, 또 다시 침대 위에 쓰러진다. 조금 전의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좀 부끄러웠는지 잠시 동안 쓰러진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10대 시절이라면 모를까, 스물다섯이나 된 여자가 입에 담기엔 조금 창피한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루이스의 행동이 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악의를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투정, 들어줘서 고마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툭 던져진 말이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뭘 당연한 거지."

"……백신현 넌 늘 그런 식이더라. 그런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왜, 이상해?"

"몰라. 이 바보야."

그건 또 무슨 괴상한 화법이냐.

어이가 없어서 살짝 웃었는데, 갑자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한쪽에 놓여 있는 둥근 테이블을 가져와서 놓고, 의자까지 끌어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내 체형에 맞춘 탓에 테이블의 높이가 꽤 높다. 루이스가 턱을 괴며 고개를 들었다.

"내 이야기는 끝이야. 이제 네 차례."

"나?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없는데."

적어도 루이스의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루이스의 요구에 응한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 빼기도 그렇다.

"검이 자주 부서져서 고민이라면……, 역시 내 검은 네가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의 루이스에겐 검이 없다. 미팅 현장에 가지고 나오기에는 흉흉한 물건이긴 하다.

부츠의 크기를 보았을 때 단검 한두 자루는 숨겨서 가지고 다니는 것 같으니, 아예 비무장은 아니지만.

루이스가 진지한 시선으로 다시 질문했다.

"내 검을 쓰면 그럴 걱정은 없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괜찮아. 검을 계속 부러트리는 건 내 실력이 아직 미숙해서 그런 거니까."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응, 나도 이 이야기는 그만 할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스의 시선에는 어느 새 나이에 걸맞는 배려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난 네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얘기해줘."

시선을 마주친 상태를 유지하면서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발음한다. 의미가 잘못 전달되지 않게.

루이스는 그런 배려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까웠던 시선이 천천히 멀어진다. 루이스가 조용히 웃는다.

"서로, 고생이 많네."

"맞아. 쉬운 게 하나도 없어."

마주 보며 웃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고, 결승점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겠지. 오늘의 루이스처럼.

하지만 이 길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오늘의 루이스가 그러했듯이.

"……있잖아, 백신현. 다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응."

잠시간의 침묵 후 루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이 맞았다.

"오늘 내가 입은 옷……, 어때?"

"잘 어울려. 네가 평소에 입는 옷보다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지적인 느낌도 들고."

물론, 루이스는 거적대기를 걸쳐놔도 잘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특별히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저렇게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

"그, 그래……?"

루이스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눈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예쁘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봤을 텐데, 이런 말 한 마디에 좋아하는 게 참 특이하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듯이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몇 초간의 짧은 텀을 두고 나서, 다시 시선을 맞췄다.

다음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루이스가 뭘 원하고 있는지, 눈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럼…… 내가 이 옷을 입은 그대로……, 한 번 해보고 싶어……?"

K2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