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공백기 : 샤를로트 편
* * *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소매 속을 파고든다. 늘 하는 아침 운동이다. 나와 파비아는 언제나 이 시간에 외출했다.
"흐아아아아……"
파비아가 늘어져라 하품을 한다.
어제 저녁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 그 짓을 해댔기 때문일까. 파비아는 조금 졸려 보였다. 하지만 나는 파비아더러 오늘은 쉬는 게 좋겠다고 권유를 했었다. 그걸 거부하고 따라 나온 건 그녀 쪽이다.
파비아와 함께 제피로스의 거리를 달린다.
그렇게 10분 정도 달렸을까. 갑자기 파비아가 내 옷깃을 잡아 끌면서 이름을 불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파비아는 호기심이 강한 편이라 걸핏하면 나를 붙잡곤 하니까.
"사제사제, 저거 봐!"
"저건……"
파비아에게 옷깃을 붙잡힌 채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향한 그 방향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수녀복을 입은 금발의 소녀, 샤를로트였다.
"아."
샤를로트도 이쪽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이쪽으로 다가왔다.
표정에서 반가움이 묻어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한동안 샤를로트가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신현 씨, 파비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봉사활동?"
샤를로트 뿐만 아니라 수녀원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는 상황이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 질문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곳은 많거든. 그런 곳에 나와서 우리가 도와주고 있는 거야."
"좋은 일 하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나는 종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샤를로트의 종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신현 씨하고 파비아는? 산책?"
"비슷해."
파비아가 샤를로트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샤를로트가 의문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파비아는……, 혹시 밤에 못 잤어? 피곤해보여."
"나?"
갑작스런 질문에 파비아가 눈을 깜박였다. 샤를로트의 말처럼 파비아가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건 샤를로트의 눈썰미가 비상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파비아가 후후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 좋다. 경험 상, 파비아가 잘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있지. 내가 사제랑……"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할 생각이야?"
"아이이잉……"
어째 예상이 빗나가는 법이 없다. 파비아가 헛소리를 하기 전에 뺨을 꼬집어서 쭉 잡아당겼다. 찹쌀떡처럼 길게 늘어난다.
"신현 씨랑? 파비아가? 무슨 소리야?"
"운동 얘기야. 나 재활 훈련 중이잖아."
"아."
샤를로트는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쓴다는 점에서는 그 짓도 운동 축에 들어간다.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신현 씨……. 그 팔……"
"아, 이거?"
나는 왼팔을 살짝 들어서 보여주었다. 접합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피부색도 안정되었다. 접합한 부위에 남아 있는 자국을 제외하면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다시……, 붙였구나……. 그리고……"
샤를로트의 시선이 잠시 푸근해졌다가 다시 경직된다. 그 시선은 내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그 자리에 검왕검은 없었다.
"역시……, 가 버린거야……?"
"그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지는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맹세였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다.
샤를로트는 백신아의 마지막 순간에 입회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내 상태를 보고 그냥 때려 맞춘 것일까.
그게 아니면……
"샤를로트, 너 혹시……"
"신아가 찾아 왔었어."
그 때, 샤를로트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을 입에 담았다.
백신아가, 찾아 왔었다…….
"그건 무슨 소리야?"
"몇 주 전이었을까…….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틀 위에 신아가 앉아 있었어. 흰 머리카락에 원피스를 입은……,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아이가 신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
샤를로트가 회상하는 듯한 시선이 되었다. 난데없이 남의 집에 찾아가서 창틀 위에 앉는 무례한 행위. 그리고 외형적 특징. 집요하게 캐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아는 백신아였다.
"그런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어. 마치 유령처럼……, 몸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거든. 그 아이는 길게 대화할 시간이 없다면서 내게 몇 마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어."
크흠, 하고 샤를로트가 헛기침을 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샤를로트 아씨는 추후 세계의 흐름을 크게 좌우할 존재가 될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시길. ……무예도 사랑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샤를로트가 크게 머뭇거렸다. 녀석에게는 조금 이른 표현이었을까.
아니, 이건 그냥 샤를로트가 너무 특이한 거다. 샤를로트도 이제 열다섯이니까.
그런데 사랑? 샤를로트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나는 전혀 짐작가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백신아는 나도 모르는 뭔가를 캐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가? 백신아의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여성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맞아. 신아는 떠났어."
검에 손을 얹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검은 검왕검도, 루이스의 검도 아니었다. 검왕검이 여기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느껴지는 차이가 상당히 크다.
하지만 이겨낼 거라고 맹세했다.
나는 위대한 스승의 제자이니까.
"신현 씨, 괜찮아……?"
"괜찮아. 내가 신아하고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거든. 서로 풀 수 있는 건 모두 풀고 나서 헤어진 거야."
샤를로트의 머리 위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응……. 신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괜찮아."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샤를로트의 수녀원 동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수녀들에게는 조금 자극적인 광경이었는지, 얼굴을 붉힌 사람이 많았다.
나도 아차 싶었다. 샤를로트는 명목상이라도 수녀였다.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런데 샤를로트는 내 손이 떨어지자 오히려 아쉬운 티를 냈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신현 씨.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
나는 샤를로트의 입장을 고려해서 조금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샤를로트는 오히려 내 손을 잡고 수녀원의 다른 사람들이 있는 방향으로 끌어 당기려고 했다.
이 조그만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샤를로트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수녀원에……, 신현 씨가 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
"네가 먼저 부탁을 할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라는 거겠지. 알았어,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와줄게."
"고마워, 신현 씨."
샤를로트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시선에서 신뢰가 느껴진다.
"그리고 파비아도, 한 번 봐줬으면 좋겠어."
"아, 응!"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놓치고 있던 파비아까지 호출했다. 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와 다르게 파비아는 바깥에 나오면 자신감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거의 이중인격 수준이다.
수녀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순 여자들 뿐이라서 그런지 내가 다가오니까 조금 주춤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어째 연령대가 다들 샤를로트와 비슷해 보인다. 원래부터 이런 환경을 골라서 샤를로트를 들여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나의 존재가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인지,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그 중에서, 인솔자로 있는 어른에게 말을 걸었다. 안경을 낀 나이든 원장 수녀. 얼굴은 익숙했다. 샤를로트가 신세를 진 수녀원에도 여러모로 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전적이 있었다.
허유에 의해서 수녀원이 통째로 무력화되었을 때 이들을 구한 건 나였으니까.
사후 처리를 위해서라도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샤를로트와 함께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뒤, 나는 원장 수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맞아요. 수녀원의 아이들 중에서 몇 명이, 그리고 저희가 봉사활동을 나오면서 마주친 사람 중에서도 여러 명.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요."
"정확히 무슨 증상이죠?"
"그게……, 상당히 특이합니다. 마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불을 일으키거나 물건을 원거리에서 들어 올리는 등의……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거든요."
원장 수녀가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의 끝에는 수녀원의 어린 소녀들이 있다.
소녀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손을 들었다.
그 손바닥 위에서 갑자기 불꽃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마법에 의한 조화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다.
인간의 손에서 발생한 마법에는 전조가 존재한다. 마력을 짜내고 술식을 구축하는 등의 작업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상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불꽃이 발생한 직후 소녀의 마력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가설을 머릿속에 펼친다. 그리고 그때, 원장 수녀가 갑자기 샤를로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샤를로트는 강한 편이에요."
"샤를로트?"
그 이름을 듣고 시선을 돌린다. 샤를로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의 마력이 한 순간 줄어들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닥의 타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 십수 미터 내의 모든 타일이 샤를로트의 제어에 들어간 것 같았다.
당연히 마법은 아니었다. 결과물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과정이 전혀 다르다.
"신현 씨……, 혹시 조력을 받을 수 있을까?"
"일단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 중에서 몇 가지를 제거한 뒤, 등허리 부분에 매달려 있는 가방에 손을 뻗었다.
주사기와 유리병을 하나씩 꺼냈다. 샤를로트는 가방에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내가 신기하게 보였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런 걸 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돌아 다니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법이잖아. 가지고 다니다 보면 쓸 데가 있더라고."
두 사람의 동의를 얻은 후 샤를로트와 다른 소녀의 피를 각각 체혈했다. 파비아는 내 옆에서 보조로 있었다. 연금술사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덕인지 손재주가 제법 섬세하다.
피를 체혈한 부위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인다. 샤를로트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신현 씨……, 알아낼 수 있을까?"
"알아내면 네게 가장 먼저 알려줄게."
체혈한 혈액을 조심스럽게 보관한 뒤 몸을 일으켰다.
가설을 또 다시 몇 가지 제거한다. 이젠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숫자밖에 남지 않았다.
소거법으로 가설을 하나씩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은 가설은……
'허유……'
최강, 최대의 숙적의 이름을 다시 되새김질한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 * *
그날 저녁, 샤를로트의 개인실에 방문했다. 또 다시 창문을 통한 출입이었다.
창밖에서 노크하자 샤를로트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어줬다. 지금의 나는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신현 씨……, 어떻게……?"
"다 요령이 있어."
조심스럽게 착지한다. 샤를로트의 개인실은 여전히 살풍경했다. 방을 꾸미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마력이 없으면 오히려 탐색하기 까다롭거든. 마력을 쓰지 못하더라도 그걸 역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어."
사람이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일 수는 없다.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대략적으로 가설을 정리했거든. 네게 알려주러 왔어."
"어, 나한테만……?"
"너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진짜배기 종교인이잖아. 괜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서."
물론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건 꽤 커다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적극적으로 정보를 알려서 대응책을 강구하는 게 최선인데 그 전에 넘어야 하는 벽이 많다.
하지만 샤를로트에게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샤를로트 또한 당사자였으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노트와 펜을 꺼내서 줄을 죽죽 그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불에 닿으면 사람은 화상을 입겠지. 칼에 베이면 열상이 나타날거야. 자극이 인간의 몸에 접하면 크고 작은 흔적이 남게 돼."
상당히 간추린 설명이다.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종이를 써야 한다. 어디까지나 샤를로트를 이해시키기 위한 표현이었다.
"그런 것처럼 바로 얼마 전, 이 세계에도 커다란 '자극'이 가해졌지."
"자극……, 무슨 소리야?"
"허유."
"……아, 미안 신현씨. 잘 못 알아들었어."
샤를로트가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사과할 필요가 없다. 샤를로트의 잘못이 아니니까.
경지가 낮은 사람은 허유의 이름을 발음하기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런 존재였다.
"나와 신아가 쓰러트렸던 그 존재는 우리보다 아득히 높은 차원에 존재하던 괴물이야. 그 괴물의 출현과 동시에 세계 여기저기에 잠들어 있던 특급 재해들이 차례로 나타날 지경이었지."
"무슨……, 소리야?"
"허유의 영향이라는 소리야."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 존재감과 영향력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능력이 나타난 건……, 허유의 영향력을 쐬게 된 탓이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