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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82화 (282/287)

〈 282화 〉 공백기 : 파비아 편

* * *

"후우."

여름은 여름이다. 비가 진짜 끔찍할 정도로 쏟아지는 중이다.

바깥에서 재활을 하고 있던 나는 머리에 쏟아진 빗물을 털어내며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피곤하다.

왼팔을 큰 위화감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절단 되었던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나는 재활을 끝낼 수 없었다.

물리적인 손상보다도 심각한 것은 코어의 손상이다. 그리고 접합만 하면 충분했던 외상과 다르게, 코어의 회복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마력이 풍부한 포인트를 찾아서 천변무궁류로 흐름을 끌어 들이고, 코어의 회복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회복할 수 있는 손상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회복세가 더뎌지다보니 아무래도 심적으로 조금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답답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새로 나오지 이상 정공법으로 도전할 수밖에 없다.

정공법이라.

생각해보면 원래 수련이라는 건 몇 년 단위로 지속해야만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성장세가 워낙 빠르다보니 수련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한숨을 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개가 픽 모로 쓰러졌다.

파비아가 흰 원피스 차림으로 내 침대에 자고 있었다.

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파비아의 돌발적이고 사차원적인 사고방식은 천변무궁류로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서 잠들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는 사람 깨우는 취미는 없다. 비에 젖은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 후 씻으러 들어갔다.

"……진짜 잘 자네. 업어가도 모르겠다."

씻고 나온 후에도 파비아는 여전히 꿈의 세계에 있었다.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모양새가 태아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하다.

그 정도로 여기가 편한 장소라는 의미일까. 파비아는 저렇게 보여도 살의와 적의에 매우 예민하다. 잠들어 있을 때도 부정적인 감정은 기막히게 캐치해서 대응할 수 있을 정도니까.

파비아가 편하게 잘 수 있다는 건 그 정도로 내게 마음을 열어 둔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지만 싫지는 않았다.

바로 옆집이지만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마침 저녁 시간이기도 해서, 나는 두 사람 분량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도 식사량이 많은 편이라서 식재료는 늘 넉넉하게 구비해두는 편이다.

"킁킁……, 헉! 사제!?"

"일어났어?"

역시 개과 수인답다. 음식 냄새를 맡자 마자 바로 눈이 뜨이는가 보다.

마침 나도 거의 준비가 끝난 상황이다. 파비아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찬물을 가져다준 뒤, 테이블에 음식을 하나씩 늘어 놓는다.

파비아더러 앉으라고 의자도 빼준 뒤, 슬쩍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냐? 혹시 날 기다린 거야?"

갑자기 내 집에 있는 걸 보면 날 보는 게 목적인 거 같긴 한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도 새하얀 원피스까지 입고."

"아, 이거?"

파비아가 원피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상당히 어울린다. 붉은기가 도는 짙은 피부가 의외로 새하얀 원피스와 궁합이 좋았다.

하지만……, 흰 원피스를 볼 때마다 자꾸 묘한 기분이 든다.

"꼭 신아처럼 입은 것 같잖아."

흰 원피스가 꼭 백신아만 입고 다니던 옷은 아니지만, 그 녀석의 존재감이 깊이 남아 있었던 탓일까. 아무래도 백신아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

나도 내가 중증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다.

곤란할 따름이다.

"……그거어, 맞긴 한데."

"맞다고?"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얘가 갑자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놀란 눈치를 보이자 파비아는 밥상을 앞에 두고 고개를 획 들었다.

"요즘 들어서……, 사제가 기운이 많이 없어 보였어. 늘 멍한 것 같고, 시간이 비면 하늘만 바라보고."

"내, 내가 그랬나."

나로서는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파비아가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면 심각하긴 심각했나보다. 이런 거 가지고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니까.

내 딴에는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재활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랬어! 그것도 상당히 심각했고! 그래서……, 사제 걱정 많이 했어……. 그러다가 생각한 게……"

"신아처럼 입고, 여기서 기다렸던 거야?"

"응……. 내가 이렇게 입고 그 아이처럼 흉내를 내면 기운이 날 지도 모르잖아."

파비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그래서……, 사제. 어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웃으면 비웃는 것처럼 느껴질까. 파비아는 보기보다 섬세한 성격이다.

"보기 좋아. 마음에 드는데."

"진짜?"

파비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파비아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내게는 조금 과분한 사저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신아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 전에는 좋다면서……?"

"네가 입은 건 마음에 들었어. 하지만 신아를 흉내낼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테이블에 음식을 하나씩 놓으면서 말했다.

"신아는 신아고, 너는 너니까. 네가 신아를 흉내내고 싶다고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너대로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백신아의 자리를 파비아가 대체할 필요는 없다. 대체할 수도 없고,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다.

내게는 똑같이, 하나뿐인 사람들이니까.

"나도 사제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응, 내 사저잖아. 당연히 소중하지."

"헤헤헤, 그런 말 들으니까 엄청 기분 좋다."

파비아가 구김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사저는 웃는 모습이 특히 예뻤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도 사제를 엄청 좋아해!"

"그래, 고마워."

살짝 웃으며 돌아선다.

백신아가 사라진 이후,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최대한 참으려 했지만, 파비아가 간파했듯 그것도 티가 났던 것 같고.

하지만 힘을 내야지.

내 입으로 말했잖아. 이것이 영원한 이별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기운을 차려야 한다.

"그럼, 밥부터 먹을까."

"응!!"

밥 먹고, 또 다시 힘을 내야지.

아직도 내게는 나아가야 할 길이 한참이니까.

테이블에 앉은 파비아가 나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제는 요리도 잘했지?"

"선생님은 생활력이 바닥이니까. 나 아니면 루이스가 할 수밖에 없었어."

우리 두 사람의 생활력의 근원에는 연금술사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존재했다.

타고나기를 그런 식으로 타고난 사람이라 할 말은 딱히 없다. 그 사람 덕에 이것저것 잡다한 일에 실력이 붙은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음식이 좀 특이한 것 같아. 사제, 원래 이런 거 안 먹었잖아?"

파비아가 예리한 시선으로 내 식단의 내용을 짚어냈다. 놀라운 기억력이다.

빠르게 짚어내는 걸 보면 평소에도 내 식단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저는 나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맞아. 식단을 조금씩 바꾸고 있어. 예리한걸."

"에헤, 내가 사저잖아.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파비아가 또 싱글벙글이다. 조금만 더 칭찬하면 춤도 추겠다.

"그런데 어째서 바꾼 거야? 이쪽이 더 몸에 좋아?"

"몸에 좋은 것도 있고……, 이게 체력에 좋다더라고."

"체력?"

"응."

파비아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사제한테 그런 게 필요해? 사제는 체력 엄청 대단하잖아."

"그렇긴 한데,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관리를 해두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식단 관리 같은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해야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체력은 너한테도 중요한 문제야."

"왜?"

"밤에, 우리가 하는 거 있잖아."

"아?"

파비아는 이런 쪽에 내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최대한 돌려 말해야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애가 부끄럼을 타면서 맛이 가 버리니까.

기초적인 상식은 부족하면서도 이런 쪽의 상식은 밝다. 파비아의 상식 체계는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

파비아도 내 말을 듣고 이해한 듯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그렇지이……. 나한테도 중요한 문제구나……."

"내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잖아. 지금까지는 별로 신경 안 썼는데……, 한 번 신경 써서 체력을 관리해보고 싶어서."

한 사람만 상대해야 한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나는 세 명의 여자에게 손을 댄 상황이다.

하지만 이왕 손을 댄 이상 전원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인생 경험이 짧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행복의 형태는 그다지 많지 않다.

나이가 들면 좀 달라질까.

글쎄, 상상은 잘 되지 않는다.

"사제는……"

"왜?"

"역시……, 성실해."

나는 그 표현이 무척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파비아와 나는 성격적으로 잘 맞는 구석이 있다보니, 한 번 대화가 시작하면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조금씩 식사를 해 나가면서도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대식가다. 겨우 두 사람이 먹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설거지가 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분담해서 하니까 빠르게 끝났다. 파비아는 최근 들어 나 대신 연금술사의 수발을 드는 경우가 잦아 졌는데, 그 때문일까. 손재주가 많이 비상해진 게 느껴진다.

듣자하니 요리도 조금씩 손을 대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해서 갈 길이 멀지만.

설거지를 끝마치고 커튼을 살짝 열어서 날씨를 확인했다. 이제 비는 확실하게 그친 것 같다.

시간도 늦었고, 슬슬 파비아도 돌려 보낼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파비아의 상태가 또 이상하다.

"파비아 너 뭐해?"

"내, 내가 왜?"

파비아가 내 침대 위에서 모델 포즈로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보고 배운 건지, 잡지에서도 나오지 않을 법한 촌스러운 자세였다.

제딴에는 성숙한 매력을 뿜고 싶었던 것 같지만 귀엽기만 하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너 혹시 지금 유혹하는 거야?"

"……으, 으응."

파비아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촌스러운 포즈도 부끄러움이 많은 사저 치고는 상당히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히려 기특하게 느껴진다.

하긴 이런 점이 파비아의 좋은 면이겠지.

그녀가 가진 순수함은 내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이니까.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파비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성욕을 인내해왔다. 성욕을 해소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일이 터져서 제대로 해소하지도 못했고.

커다란 사건이 일단락된 지금, 훌륭하게 모든 시련을 넘어선 파비아에게도 보상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살짝 웃으며 열었던 커튼을 다시 닫았다.

달도 훔쳐보지 못하도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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