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27. 나쟈, 또 다시 (10)
* * *
어둡다.
어둡고 답답한 공간이다.
이것이 아마 나쟈의 마력일 것이다. 나는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시꺼먼 마력은 가느다란 실 같았다. 그것이 내 전신을 단단하게 묶은 상태다.
나쟈의 마력이 내 육체를 침식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아직 마력의 기류가 내 제어 하에 놓인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서너 시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아마 충분하리라고 본다.
구체에 갇힌 상태라 외부의 상황을 알기 어려웠지만, 이미 사람들이 모여서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 전, 몇 차례 강한 진동을 느꼈다. 이 구체를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충격은 내게 전해졌다.
아마 그들이 쉽게 구체를 돌파하지 못하는 건 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침식에 저항하느라 마력을 조작하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검은 구체의 강도에 힘을 주고 있는 거지.
하지만 힘을 풀 수는 없다. 힘을 푸는 순간 순식간에 침식되고 말 테니까.
그들이 알아서 구체를 파괴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바로 그 순간, 나의 눈앞에 있던 구체의 표면에 균열이 쩍 하고 달렸다. 벌어진 틈새 사이로 빛이 보인다. 그리고 살짝 비의 냄새.
「검주……!!」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리워하던 목소리였다.
* * *
정확히, 그로부터 60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부터 이 구체를 파괴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제가 지정해드린 위치에 대기, 제 신호에 맞춰서 기술을 사용해 주십시오.」
백신아가 입을 열었다. 검왕검은 여전히 검집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녀가 검집 바깥으로 뽑혀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기술을 쓰면 되는 것이오?"
요하네스가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백신아가 지정한 위치에 서 있었다. 백신아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 전, '그 존재'와의 싸움이 끝난 이후, 그때 느낀 영감으로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셨겠죠. 그것을 사용해 주십시오.」
"……내가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요하네스는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당연했다. 그의 수련에는 그 누구도 동석하지 않았다. 마그누스도, 스텔라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그밖에 알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마치 마음이라도 읽어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력 수치의 변동, 보폭부터 태도까지, 도출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조합하면 명확합니다.」
"명확한 것인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무인이라 할 수 없겠죠.」
오만하며, 그 이상으로 고고한 태도였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진 탓에 질투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요하네스는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야말로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무인 중, 천하제일의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른 분들도 제가 부탁한 기술을 사용해주시기를.」
백신아는 마그누스와 스텔라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들은 요하네스처럼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보이지 않은 숨겨진 기술이 있었다.
그것을 백신아는 어렵지 않게 짚어 내었다.
마그누스는 질린 나머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격.
무인으로서, 절대적인 격의 차이를 실감했다.
「시작합니다!!」
백신아의 호령과 함께 차례대로 기술이 쏘아졌다. 하지만 그 기술이, 각 특급 모험가가 보유한 최강의 절초는 아니었다.
앞서 요하네스가 발언했듯, 그들 하나 하나가 최대의 절기를 쏟아 붓는다면 검은 구체를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주저 하고 있었을 뿐.
백신아는 그들이 보유한 기술 중 적절한 것을 서로 조합해서 최대의 상승효과를 발휘하려 하였다.
공격이 쏟아진다. 루이스와 파비아가 초고속의 연격으로 구체를 몰아치고, 대검이 무겁게 꽂히고, 형형색색의 마력이 그 뒤를 이었다.
빛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때마다 구체가 흔들린다. 하지만 타격이 쌓이고 있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지막은 요하네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구체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그 하나 하나의 기술은 강력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모든 기술이 차례로 검은 구체를 직격했음에도 효과는 그다지 없어 보였다.
누구도 검은 구체 내부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백신아는 구체 내부의 상황이 보이는듯, 마지막으로 연금술사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선생님.」
"알았어."
연금술사가 검왕검을 높이 집어 던진다. 검왕검이 몇 바퀴를 회전하며 하늘을 날았다.
그 짧은 순간 빠르게 주문을 왼다. 바닥의 흙이 솟아 올라서 사람 크기만한 주먹이 되었다.
검왕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타이밍을 맞췄다. 하나, 둘, 연금술사는 그 순간 호흡을 멈추고 주먹을 휘둘렀다.
못과 망치처럼, 검왕검을 뒤에서 거침 없이 후려친다.
쿵!! 구체에 균열이 내달렸다. 검왕검이 타격한 지점에서 시작된 균열은 빠르게 퍼져서 순식간에 구체 전체를 뒤덮었다.
「검주!!」
그 외침은 과연 백신현에게 도달했을까.
산산조각으로 부서져가는 시꺼먼 마력의 파편 속에서, 굵은 손이 검왕검을 틀어쥐었다.
"……."
바람이 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구체의 중심에서 굵은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난다.
키가 컸고, 왼팔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오른손은 검왕검을 굳건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사제……"
파비아가 그의 얼굴을 알아 보았다. 실제로 헤어진 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파비아는 이미 울상이었다.
백신현이 파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에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그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푸쉬이, 마치 주전자가 증기를 뿜을 때 내는 소리와 닮은 소리였다. 전신의 땀샘에서 검은색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쟈가 육체를 침식하기 위해서 주입했던 마력이다.
"……신아가 하고 있는 거야?"
파비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검왕검은 백신현과 접촉한 순간, 곧바로 그의 몸에 마력을 공급해서 먼저 육체를 차지한 나쟈의 마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시꺼먼 마력의 배출.
백신아가 자신감을 드러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네 출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백신현이 고요한 시선으로 검왕검을 훑는다.
마음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이다.
「검주께서도……,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출력의 상한을 해방했군. 널 유지하는 데 쓰이고 있는 마력까지 써버린 거냐."
무인으로 치면 진원진기에 해당하는 힘을 뽑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번 쓰면 전체적인 마력의 총량이 줄어들고, 최악의 경우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무기를 백신아는 여기에서 사용했다.
꽈악.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너, 죽을 생각이야?"
「검주를 돕는 건 저의 긍지입니다. 제게는 그것이 목숨보다 중요했어요.」
생각외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미처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목소리 끝에 살짝 걸려서 흐른다.
"그것이……, 너의 긍지이라고? 겨우……, 그런 이유로……"
백신현은 피를 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건 싫었다.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싫었다.
그저 가슴이 아팠다.
「전 이제 살 수 없을 거예요. 이대로는 서서히 말라 죽어갈 뿐이겠죠. 그런 건 싫어요. 전……, 조금이라도 괜찮은 모습으로 검주의 기억 속에 남고 싶습니다.」
검왕검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와서 흐릿한 사람의 형태를 만든다. 흰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백신아가 그 옆에 섰다.
「제 마지막 소원을……, 이해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그런 삶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뜨겁게 생명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었다.
살아남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백신현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는다.
"그렇게 말해도 도저히……, 난 용납 할 수 없어. 그런 삶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정말로 싫다……."
「검주……」
"하지만……"
머리로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언어로 토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나의 고집으로……, 곧 죽을 사람의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것도…… 정말 몹쓸 짓이겠지……."
바득, 다시 한 번 백신현이 이를 갈았다.
힘을 지나치게 세게 준 탓일까. 잇몸이 상해서 피가 흐른다. 스스로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
백신현이 다시 시선을 돌린다.
시선의 끝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구체가 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다시 뭉쳐서 형태를 만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저항하는데 사용한 마력을 모조리 빼앗아갔군. 사실상 최후의 발악이야."
「허유 때문입니다. 허유가 출현한 탓에 나쟈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능력이 눈을 뜨게 된 거죠.」
"맞아. 허유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존재였어."
오래 전에 쓰러졌음에도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무시무시하며, 또한 격조 높은 존재였다.
물론 허유가 이 세상에 남긴 상처가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 나가야 할지 백신현 자신도 알 수 없다.
한 점에 뭉친 마력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따끔씩 뱀 머리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머리가 아홉 달린, 신화 속에서 나올 법한 거대한 뱀 괴물이다.
"우리도……!!"
"괜찮아, 루이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손 대지 말아주세요."
앞으로 나서려던 루이스를 백신현이 멈춰 세운다. 사람들의 시선이 백신현에게 꽂힌다.
루이스가 복잡한 시선으로 질문했다.
"……할 수 있겠어?"
그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천천히 기수식을 잡는다.
늘 취하던 자세를 잡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칼날 같은 예리함이 공간 전체에 쏟아진다. 루이스는 물론, 요하네스와 마그누스 같은 특급 최정상의 고수들조차 희미한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검왕검을 손에 쥐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느 쪽도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만만찮은 존재감이 느껴진다.
"할 수 있어."
파직!!
그 순간 공간 내부에 존재하던 마력이 한 사람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 자리의 흙이 깊이 들어간다.
"지금의 우리는 둘이서 하나인 검사이니까."
* * *
검은 마력 역시 주적을 백신현으로 여긴 것 같았다. 다른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얼굴만을 주시했다.
시꺼먼 구체를 축으로, 여기저기에 아홉 개의 머리가 달려 있는 형태였다. 대부분은 백신현이 침식을 저항하기 위해서 끌어들였던 마력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공교로운 일이로군. 너와 함께 싸우는 최후의 상대가…… 설마 나쟈가 될 줄이야."
「동감합니다. 실로 재미있는 우연이에요.」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때마다 투기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강한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나쟈는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포효를 내지르면서 선제 공격에 들어갔다.
뱀의 아홉 머리가 동시에 움직였다.
복잡한 궤적을 그리면서 전후상하좌우 모든 방향에서 파고들어간다.
회피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이.
백신현은 무작정 회피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쏟아지는 공격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이 최선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공격이 거짓말처럼 허공을 치고 지나갔다. 단 하나의 공격도 명중하지 못했다. 스치지조차 않았다.
"그럼 가자, 파트너."
오로지 앞을 바라보며 백신현이 입을 열었다.
실로 엄숙한 목소리였다.
"이것이 네 최후의 싸움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