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27. 나쟈, 또 다시 (9)
* * *
"……아!!"
등 뒤에서 거대한 마력이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파비아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백신현이 있던 자리에 검은 구체가 보인다. 사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검은 구체 속에 삼켜진 것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파비아는 도무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다급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상당히 버벅거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파비아의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버텨 왔지만,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문제가 발생했다.
고민은 깊은데, 정작 해답을 내 놓을 수 없다.
파비아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숲을 질주하던 파비아의 감각에 익숙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루이스, 파비아가 잘 아는 마력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사람의 마력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한 점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아마 나쟈의 출현을 감지하고 현장을 찾기 위해서 모여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루이스의 마력을 감지했기 때문일까.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파비아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루이스에게는 상황을 전달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루이스라면 알아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다.
그쪽에서도 파비아의 마력을 감지한 것일까.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루이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척도 일제히 멈췄다. 상황을 살피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루, 루이스 언니!"
"어, 파비아……? 신현이는 어쩌고 왜 너만 여기에……"
루이스도 파비아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파비아는 다급했다. 인사치레보다 먼저 전해야 하는 정보가 있었다.
다만 파비아는 여전히 조금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어휘력이 더 떨어져서, 말의 전달력이 어마어마하게 나빠졌다.
"그, 그게! 사제가! 사제가……, 아으으으, 루이스 언니이……. 나 어쩌면 좋아……?!"
"……?"
딴에는 온힘을 다해서 소리친 것이었지만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구겼지만, 지금의 파비아가 정상적인 상태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한다.
"파비아, 진정하고 천천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신현이에게 문제라도?"
"그, 그건……, 그러니까아……"
잠시 우물쭈물 거리던 파비아가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조금 진정이 되었다.
파비아는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바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사실을 전달했다.
"나쟈의 핵은 함정이었고. 신현이는 지금 침식되지 않기 위해서 저항하고 있다는 거지? 완전히 이해했어."
"응……, 그리고 나한테는 자기가 버티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나쟈의 핵이 쓸 수 없는 물건이라면……, 분배 때문에 싸우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예리하게 눈을 뜬 루이스가 중얼거린다.
"알았어. 나는 지금 당장 신현이가 갇혀 있는 구체 쪽으로 가볼게. 파비아 너는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조력을 구해."
"서, 선생님을……?"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선생님이 힘은 좀 부족하더라도 아는 건 많으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파비아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다시 한 번 눈을 맞췄다. 파비아가 그 순간 흠짓한다.
"백신현은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고 어서 선생님을 찾아가. 지금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잖아."
"……응, 알았어!"
파비아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스와 파비아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간신히 도달한 도시,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거리에 나와 있었다. 나쟈와 겨룬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충격은 컸다. 허유와의 싸움이 바로 얼마 전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연금술사의 공방에 도착했다. 그런데 연금술사가 없다. 어디에 간 거지? 파비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연금술사는 지금 검왕검과 함께 천막 아래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너무 당황하다보니 순간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연금술사를 찾았다.
"선생님!!"
"파비아?"
연금술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검왕검과 함께 있었다.
* * *
「선생님,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요.」
"무슨 일이야?"
연금술사는 챙길 수 있는 물건만 챙겨서 가방에 집어넣은 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파비아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다. 파비아는 여전히 버벅거렸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고 명확하게 정보를 전달했다. 지금은 천막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연금술사의 준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시겠어요?」
그때, 검왕검이 말을 걸었다. 검왕검, 그리고 그 옆에는 흰 머리카락의 백신아가 원피스 차림으로 앉아있다. 한쪽 무릎을 세운 고혹적인 자세였다.
"안 돼."
연금술사는 차가운 태도로 거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몸이 붕괴하기 시작할 거야. 죽고 싶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허유와의 싸움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검왕검은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간신히 붕괴를 틀어막은 상황이다. 이마저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서 붕괴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검왕검이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검왕검은 그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백신아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파비아 아씨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셨습니까. 마지막 희망이었던 나쟈의 핵은……, 이제 쓸 수 없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이야?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현이가 그 소리를 들어줄 것 같진 않은데."
「포기한 게 아니에요. 제 마지막 일을 완수하려는 겁니다.」
백신아가 살짝 눈을 감았다.
「선생님도 들으셨잖아요. 검주는 나쟈의 핵에 의해서 침식 당하고 있다고. 검주의 몸을 침식한 마력을 쫓아낼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습니다.」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네, 그렇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백신아의 시선은 살짝 슬픔에 젖어 있었다.
「어차피 전 살 수 없어요. 아니, 그런 건 선생님도 검주도 모두 알고 계셨을 겁니다.」
백신아가 손을 뻗어서 연금술사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백신아는 기체에 가깝다. 그대로 연금술사를 통과했다.
「전 검주를 위해서 제 힘을 쓰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제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부디 제 긍지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
연금술사는 고민에 빠진 듯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시선을 맞췄다.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야. 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만, 긍지라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거야?"
「선생님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백신아가 살짝 웃었다.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그녀 자신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백신아는 당당했다.
세상에는, 때때로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믿는다.
"네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좋아. 죽고 싶은 게 소원이라면 네 소원을 이루어 주겠어."
연금술사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검왕검을 손에 쥐었다. 검집 째로 자리에서 떼어낸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잡음이 여러 차례 튀었다. 검왕검 옆에 떠 있던 백신아의 모습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검왕검은 가만히 놔 두어도 붕괴할 정도로 크게 파손된 상태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금술사가 눈을 찌푸린다. 그저 술식의 중심에서 떼어냈을 뿐인데, 겨우 그뿐인 행위에 백신아는 괴로워했다. 호흡이 달린 사람처럼 발성이 불안정하다.
"고맙기는. 나도 널 이용하는 거야. 나한테는, 너보다 신현이가 더 소중하니까."
「저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반드시 제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서로의 이득이 일치한 셈이네."
「네, 그야말로 그런 상황입니다.」
검왕검을 품에 안은 채 연금술사가 걷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파비아가 연금술사를 향해 다가온다. 그대로 그녀를 양팔로 감싸 안은 상태로 바닥을 세게 차며 하늘을 날았다.
"그……, 선생님. 신아야."
"왜 그래?"
「부르셨나요? 파비아 아씨.」
"……아니야."
파비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발달한 청각은 당연히 연금술사와 백신아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모두 포착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가만히 있었다.
어려운 문제였다.
백신아는 명백히 백신현의 의도와 반대되는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 파비아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산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다시 현장에 돌아올 때까지 파비아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백신현을 집어 삼킨 검은 구체, 그 주변에는 파비아가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했다.
마그누스, 스텔라, 요하네스. 특급 모험가의 최정점에 선 세 사람. 그리고 루이스까지.
모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검은 구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조차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일까.
검왕검을 손에 쥔 연금술사가 파비아의 품에서 빠져 나와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선생님, 검왕검을 어째서……?"
루이스가 기시감을 느낀 듯 눈을 찌푸린다.
그러나 연금술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왕검에서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 아씨, 그리고 다른 분들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목소리는……"
요하네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상황은 얼추 이해했습니다. 구체를 부수려다가 검주까지 베이면 안 되니까 고민 중이신 거죠?」
"그렇소. 여기에 있는 전원이 온힘을 다해서 후려치면 파괴할 수도 있을 것 같소만. 구체 내부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아무래도 주저가 되는구려."
「검주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가이드 하겠습니다. 구체를 부수고, 검주도 구해 보이겠어요.」
백신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예전에 백신아의 목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던 요하네스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실패를 생각할 수 없는 목소리다.
「저 구체의 강도가 이 정도로 강력한 이유는 검주 때문입니다. 검주가 마력의 기류를 다루면서 침식에 저항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의 강도를 오히려 증폭시키는 효과를 낸 것이죠.」
"그렇군……, 구체에 검을 휘두를 때마다 느껴졌던 기시감의 정체가 그것이었나."
「이건 검주가 내부에서 침식을 버티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의식도 살아 있겠죠. 시간적 여유는 충분할 거예요.」
백신아가 연금술사에게 몇 가지 요청 사항을 주문했다. 연금술사는 백신아의 요청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검왕검은 여전히 검집 안에 수납된 상태였다. 그 상태로, 끝 부분을 검은 구체에 접했다.
「이 구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협력해주시기를.」
"괜찮겠어?"
루이스가 등뒤에서 질문했다.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된 질문이었다.
백신아는 짧게 대답했다.
담백한 목소리였다.
「네, 괜찮습니다.」
백신아가 다시금 연금술사에게 지시한다. 몸 쓰는 것이 서투른 그녀는 여러 차례 자세를 지적 받았다. 여러 차례의 교정이 끝난 후 비로소 자세가 잡혔다.
검왕검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냈다.
「절 믿어주세요, 루이스 아씨. 전 검왕이 탄생시킨 최대최후의 걸작, 검왕검입니다.」
절대적인 자신감과 자부심이 스며든 목소리였다.
「겨우 이 정도 문제는……, 문제 축에도 들지 않는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