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27. 나쟈, 또 다시 (5)
* * *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쟈가 나타났던 현장에 돌아왔다.
출입을 막는 경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나와 파비아는 출입을 허가 받은 상태였다. 저항 없이 통과했다.
경비들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가는 우리를 도대체 뭣하는 사람인가 하고 쳐다본다. 하지만 그들도 이 일에 깊이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지, 짐의 검사도 건성으로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경비 수준이 너무 낮아 보이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 덕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다.
파비아와 함께 무너진 연구소 터로 돌아왔다. 이미 여러 차례 사람들이 찾아와서 짐을 찾아갔는지, 조금 전에 보았을 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발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쟈가 튀어나온 구멍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쟈 자체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탓인지, 구멍의 너비가 어마어마하다.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싱크홀 같다.
파비아가 귀를 쫑긋거렸다.
"사제,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아."
"그럼 아래로 내려가자."
"루이스 언니 없이 우리끼리 움직여도 괜찮을까?"
"물론."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를 부르고 싶어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작정하고 찾으면 빠르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시간조차도 아깝다.
그리고 아마, 파비아만 있어도 무력이 필요한 국면은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그녀는 백신아를 제외했을 경우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이니까.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불이 붙은 램프를 챙기고 파비아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파비아에게 허리를 잡혀서 데롱데롱 매달린 상태이다. 몇 번을 보아도 참 기가 막힌 그림이다.
"깊다……."
"날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해. 죽지는 않겠지만, 위험한 상황은 피하고 싶어."
천변무궁류의 요령을 활용하면 낙사는 피할 수 있을 거다. 마력은 쓸 수 없는 상황이라도 감각은 살아 있으니까.
나는 나름대로 파비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는데, 파비아는 오히려 그 말에 크게 긴장한 것 같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느껴진다.
"나쟈를 쓰러트리면 나중에 한 번 구멍을 보긴 해야 할 것 같아. 이 정도 구멍이 지하에 잔뜩 뚫려 있다면 지반이 약해져서 도시가 통째로 붕괴할 수도 있겠어."
"으, 싫다……."
허유와 나쟈가 이 도시에 남긴 피해는 하루 이틀로 수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이 도시가 제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도대체 몇 년이 걸릴까.
이것만큼은 나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구멍에도 바닥은 있었다. 파비아는 운동 에너지를 충분히 분산시키면서 바닥에 착지한 후, 천천히 나를 내려 놓았다.
파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그 위치에는 나쟈가 이동하면서 뚫어 놓은 듯한 통로가 발생한 상태였다.
구불구불하다. 또 한참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파비아는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사제, 또 가야 하는 거야?"
"응. 일단 끝까지 간 뒤에, 나쟈를 찾을 수 없으면 그때 이걸 사용할 거야."
파비아가 등에 짊어진 가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가방의 부피는 거의 파비아의 두 배 이상이다.
꼭 필요한 것만 집어넣은 상황인데도 이 정도 부피가 나왔다.
나는 수평으로 뚫린 구멍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에서 싸울 수는 없잖아. 빠르게 쓰러트리지 못하면 나쟈가 마구잡이로 지반을 헤치면서 돌아다닐텐데, 그러면 진짜 이 도시가 통째로 붕괴할지도 몰라."
"힉!"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안 그래도 제피로스의 지반 여기저기에서 약해진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쟈 하나만의 공적은 아니고 허유에 의해서 남은 흔적도 있다.
허유의 스케일은, 진짜 생각할수록 아득해진다.
파비아와 함께 이번에는 수평으로 된 구멍을 나아가기 시작한다.
먼저 선행한 사람이 있는 건지 구불구불한 통로 여기저기에 표시가 있다. 어차피 외길이라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아마 선행한 사람들도 나쟈와 마주치진 못했을 것 같다. 나쟈 정도의 특급 재해가 싸우기 시작하면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도 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요란하게 일이 터지니까.
하지만 나쟈가 언제까지 잘 숨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최대한 빠르게, 우리가 먼저 접촉해야 한다.
파비아의 다리를 빌려서 통로를 나아갔다. 그런데 중반부부터 갈림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이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갈래씩 쪼개진 상태다.
추적을 피하기 위한 나쟈의 술수일까.
나는 파비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제, 다른 사람들은 이쪽, 이쪽, 이쪽으로 갈라진 것 같아."
모든 갈림길에 한 번씩 코를 대고 맡아본 파비아가 다른 사람들이 나아간 길을 일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비아의 후각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나쟈 쪽은 잘 모르겠지?"
"응……, 인간 냄새 외에는 잘 모르겠어. 모든 구멍에서 냄새가 나거든."
"가장 냄새가 심하게 나는 쪽도 모르겠어?"
파비아가 다시 코를 킁킁거렸다. 꽤 어려웠는지 파비아는 한참 동안 끙끙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도 비슷비슷한 걸까.
그렇다면……
"파비아, 여기에 있는 길 중에서 지상으로 이어져 있는 길이 있어?"
"지상으로?"
"응. 연구소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이 위치는 도시 바깥이거든. 찾기 어렵다면 이쯤에서 지상으로 올라가서 나쟈를 끌어 들여볼 생각이야."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교수의 사무실을 찾았던 것이다.
무작정 추적만 한다고 붙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마그누스나 요하네스 등의 다른 특급 모험가들이 애저녁에 나쟈를 쓰러트렸겠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나쟈가 상당히 교묘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인간과 비교를 불허하는 후각을 가진 파비아조차 추적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니까.
추적이 되지 않는다면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 이쪽이야."
파비아가 수십 갈래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파비아의 말처럼, 그 길은 지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 위치는 도시 바깥의 숲이었다. 거기다가 예전에 나와 나쟈가 한바탕 맞붙었던 그 위치 부근으로 보인다.
신기한 우연이다.
나쟈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고 겨우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라, 이 구멍을 조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적이 없다. 몬스터조차 두려움을 느끼고 숨었는지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파비아에게 색적을 부탁한 뒤, 나는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짐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로세로로 4미터인 천을 주름 없이 펼친 후, 그 위에 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천 위에 스스로의 꼬리를 문 뱀을 그리고 그 위에 알코올을 뿌린다.
붓을 써서 진을 그리고, 그 위에 상황에 맞게 준비한 오브제를 하나씩 세팅. 나쟈를 끌어 들이는 식의 구축에 나선다.
원리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쓰이는 도구나 구조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
이것은 교수의 물건을 완전히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차이점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넓게, 더 강렬하게.'
아마 이 한 번으로 술식은 붕괴하고 진은 불탈 것이다. 그 대신 교수의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더 넓은 범위와 강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실상 일회용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술식을 몇 번씩 사용할 수 있게 재료를 충분히 준비해서 이곳에 찾아왔다.
물건을 모두 소모하기 전까지 끝장을 봐야 한다.
"파비아, 그쪽에 표시한 자리로 마력을 공급해줘. 출력은 120에서 150 사이, 재공급 간격은 2초. 그 상태로 60초 간 유지하면 돼."
"응!"
"나는 그 동안 술식을 제어할게."
마법진의 양쪽 끝에는 사람의 손바닥 모양의 도장이 그려져 있다. 그 자리에 하나씩, 나와 파비아의 손을 가져간다.
신호와 함께 파비아가 마력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출력, 마력을 쓰지 못하는 지금의 내게는 살짝 제어하기 까다로울 정도다.
하지만 제어한다. 이 역할은 파비아에게 대신 맡길 수 없었다. 신경에 부담이 가해진 탓일까. 전신에 실핏줄이 솟으면서 눈에서 피가 흐른다.
"사제……"
"파비아, 마력이 흔들렸어. 공급에 집중해."
"아, 응!"
파비아는 강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겨우 이 정도로 동요하면 곤란하다. 파비아는 내 사저로서 조금 더 당당하고 유능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어디 가서 파비아를 사저라고 자랑하기 어려워진다.
파비아가 공급한 마력이 퍼지지 않고 한 점에 뭉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진을 그린 천이 끝에서부터 조금씩 타오른다. 아직 술식은 발동하지 않았다.
마력과 술식을 제어하면서 속으로 시간을 헤아린다. 27, 28, 29…… 그리고 그 시간이 비로소 60을 헤아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어 파비아를 향해 소리쳤다.
"파비아! 손을 떼어내고 귀를 막아!"
"응!"
대답은 어눌했지만 행동은 빨랐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술식에 손을 대고 있었다.
절반 정도 사라진 상태였던 천이 한 순간에 모조리 불타 없어진다. 마력은 그와 동시에 원형으로 퍼졌다.
찌릿찌릿한 충격이 전신을 치고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몸이 떨렸다. 하지만 파비아와 비교하면 오히려 내 쪽이 낫다. 파비아의 귀와 꼬리가 쭉 펼쳐지면서 몸이 바르르 떨린다.
이러한 차이는 순수한 인간인 나와 다르게 파비아가 개과 수인인 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나는 이 술식을 구축할 때부터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파비아에게 미리 설명을 해 두었었다.
파비아의 꼬리는 한참 동안 꼿꼿하게 서 있다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귀를 막은 파비아가 진이 빠진 얼굴로 우물거렸다.
"으, 소, 소름이 쫙 돋았어……."
두 번은 못 하겠다는 얼굴이다. 거의 울상이지만, 이것을 몇 번이나 해야 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야말로, 될 때까지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파비아가 여러 번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파비아, 천천히 일어나서 싸울 준비 해."
"……어, 뭐야? 그럼 된 거야?"
"아마 2, 3분 내외로 접촉하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회복해야 해. 할 수 있지?"
"으, 알았어!"
파비아가 스스로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아하니, 제 때 맞출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인 건 사실이다. 파비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고난과 불행을 잊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
파비아가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나대로 다가올 전투를 기다렸다. 아마 내 차례는 없겠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허리춤의 검이 조금 미덥지 못하다. 이쪽도 꽤 수준 높은 검이지만, 비교 대상은 루이스의 검이나 검왕검이다. 상대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런 걸 탓해도 무의미하다.
언제나 최고의 카드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가지고 있는 카드로 맞서 싸울 수밖에.
쿵!! 그 순간 지하 깊은 곳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나쟈.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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