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7. 나쟈, 또 다시 (4)
* * *
천막을 나오자마자 온몸이 비로 짖었다. 꽤 빗줄기가 거칠다. 두두두두 쏟아지는 빗방울이 아프다.
"사제, 사제, 있잖아."
"응."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은 탓에, 파비아의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착 가라앉았다. 그 탓일까, 조금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나쟈의 핵? 이라는 걸 구해오면,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거야?"
"맞아. 너도 다 들었는데, 그걸 왜?"
"그게……, 잘 표현은 못 하겠지만……"
파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귀가 살짝 접혔다가 펴진다.
"사제가……, 자신감이 많이 없어 보여서……"
"……."
검지를 들어서 입꼬리를 살짝 문질렀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백신아와 연금술사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니까 표정이 조금 무뎌졌나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천막에서 많이 멀어진 상황이다. 여기에서 입을 열어도, 아마 백신아가 듣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생각한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니야. 아마,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겠지. 그런 확신이 있어."
"그럼……, 내가 잘못 생각한 거지……? 다행이다……."
"하지만……, 아마 쉽게 되진 않을거야."
느슨해지려던 파비아의 표정이 굳는다. 마치 딸꾹질을 한 사람처럼 호흡이 뚝 끊어졌다.
"신아를 고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 적어도 파손된 직후에 이 방법을 시도했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고치려 해도, 아마 그 전에 검왕검이 완전히 망가질 가능성이 높지."
연금술사를 탓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녀는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검왕검의 수리에 도전했고, 그것이 부족했을 뿐이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
"아마도."
"……그래도 포기하진 않을 거지?"
"응."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마음속은 복잡했다.
내가 지금 당장 나쟈의 핵을 뽑아오더라도 백신아를 구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면 무의미한 발버둥을 포기하고 백신아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행동이 아닐까.
결국 나는 백신아에게 마음에 새길 추억 하나 안겨주지 않았으니까.
나 자신도 나의 행동을 완전히 올바른 것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애초에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잃고 싶지 않아."
"사제……"
"신아는 내게 있어 무척 소중한 존재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매달리고 싶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백신아는 내게 있어 스승이면서도 친구였고, 피를 나눈 남매 같은 존재였으니까.
어차피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백신아의 곁을 지키면서 임종을 지켜보더라도, 나는 마지막에 이런 식으로 생각할 테니까.
'어쩌면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할 수밖에 없다면 희미한 가능성에 걸어보고 싶다.
주먹을 소리 없이 꽉 쥐었다.
고개를 든다.
"그럼, 출발할까."
* * *
"야, 백신현."
현장에 다시 복귀했을 때, 루이스는 곧바로 나를 찾았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탓에 옷감의 천이 몸에 달라 붙어서 희미하게 피부색이 비쳐 보인다.
"신아 상태는 어때?"
"좋지 않아."
"그래……?"
루이스도 백신아의 상태는 알고 있었다. 표정이 어둡다. 애초에 검왕검의 한계를 지적한 건 루이스 본인이었으니까.
"차라리 너도 신아 곁에 남아서, 좀 같이 있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나쟈가 그렇게 강한 상대도 아니잖아 사실."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짝 떼어내며 루이스가 시선을 돌렸다.
"나쟈의 독기가 뿜어대는 알레르기가 까다롭긴 하지만, 사실 이 정도 실력자가 이 정도로 모여 있으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네가 빠져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예전의 루이스라면 모를까, 지금의 루이스라면 나쟈의 독기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독기가 신체에 접하기 전에 끝장을 내는 식으로.
이 지독했던 1년.
루이스 또한 많은 것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루이스에게 모든 걸 맡길 수는 없다.
"솔직히 너한테 다 떠넘길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안 되겠어. 나도 나쟈 쟁탈전에 참가해야 할 것 같아."
"어째서?"
"나쟈의 핵이 필요해. 다른 사람이 차지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에 넣고 싶어."
"나쟈의 핵이 있으면 신아를 구할 수 있는 거야?"
역시 루이스다. 고작 몇 마디로 내 생각을 눈치챘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어."
"너다운 생각이네……. 알았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루이스의 시선이 움직인다. 파비아는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파비아, 지금 이 녀석은 진짜 약골이니까. 위험한 짓을 저지를 것 같으면 네가 잘 지켜줘야해. 마력이 없어졌다고 그 무모한 성격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
"루이스 언니는?"
"나쟈의 핵이 필요하다면서? 그럼 따로 행동하는 게 좋잖아."
루이스가 한쪽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파비아 너는 싸움 이외에는 젬병이라 신현이 옆에 붙어있는 게 좋아. 이게 최선의 인선이야."
"루이스 언니는 사제랑 다니고 싶어할 거 같아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야?"
파비아는 여전히 적의 없는 시선이었다. 순진한 태도라서 더 충격이 큰 것 같다. 루이스는 명치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움찔댔다.
아무리 성격 더러운 루이스라도 파비아의 순진한 시선 앞에서 화를 내지는 못한다. 얼굴은 붉어졌지만 입술을 떠듬거릴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신현이 옆에 있는 게 좋을 거야. 응, 그게 맞아."
"그래?"
"응, 실력으로 따지면 네가 나보다 더 세니까."
루이스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마치 피를 쏟아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루이스는 여전히 자신의 실력에 불만이 있는 것 같다.
파비아도 루이스의 묘한 기색을 읽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탓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파비아는 순수한 성격이지만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른다. 시선이 슬금슬금 나를 찾는다. 파비아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이는 버릇이다.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나쟈를 찾아서 쓰러트리면, 나쟈의 핵은 너한테 줄게."
"고마워."
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해봐야 이득이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백신아를 살리는 일이니까.
백신아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계약할 각오가 되어 있다.
루이스가 살짝 눈을 감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식으로 신아를 떠나보낼 수는 없잖아. 아직 배울 것도 많이 남아 있고."
"그래?"
"너도 나도, 아직 신아의 발끝에도 쫓아가지 못한 상태인 게 현실이니까."
눈을 날카롭게 뜬 채 현실을 입에 담는다.
그 말이 진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그러니까…… 여기에서 신아를 떠나 보낼 수는 없어. 나는 아직 그 녀석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스승에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제자의 사명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천변무궁류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백신아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강해지는 것도.
그 전까지는 떠나보낼 수 없다.
제자가 스승을 초월하는 그 순간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루이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럼 난 조금 전에 얘기한대로 혼자서 움직일게."
"응."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루이스가 등을 돌리려다가 멈춰섰다.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연히 서둘러야지. 신아 상태를 고려하면."
"물론 그것도 있지만……, 마그누스 대장하고 요하네스 씨가 수도에서 나쟈를 연구하는 교수들을 호출했거든."
"교수들이라."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기상천외한 일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연구 소재가 부족한 경우는 없다. 오히려 연구해야 하는 분야는 많은데 연구자의 숫자가 적어도 난리일 정도이니까.
하물며 특급 재해에 대한 연구는 국가에서 직접 예산을 내려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중 나쟈의 연구에 종사하는 교수들과 특급 모험가들 사이에 인연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짧은 삶을 살아온 나와 다르게 두 베테랑 특급 모험가는 실제 나이도 오십 대 전후, 인맥도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텁다.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수도에서 여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잖아?"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나중에 핵 분배 문제 가지고 괜히 신경전 벌이기 싫으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루이스가 잠시 말을 끊은 후,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물론, 그 두 아저씨의 인격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번 일이 너무 커지면서 많은 사람이 엮이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 그 아저씨들이 먼저 나쟈의 핵을 습득하면 설령 넘겨 받는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
"어째서?"
파비아가 의문을 보였다. 꽤 순수한 울림이었다.
"그 아저씨들은 우리 편인데?"
"그 아저씨들이 나쁘다기보다는, 조금 달라."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파비아에게는 조금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입장이라는 게 있거든."
"입장……"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가볍게 팔을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급한 상황인데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자꾸 추가로 더해진다.
하여튼 쉽게 헤쳐 나가는 경우가 없다.
파비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렵다……"
"맞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루이스가 파비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그럼……, 난 갈게."
파비아와 한 번,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춘 후 루이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루이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다.
"사제, 그럼 우리가 제일 먼저 그 뱀을 찾아야 하는 거야?"
"맞아. 그렇게 이해 하고 있으면 돼."
"어떻게? 내가 냄새라도 맡고 있을까?"
파비아가 살짝 턱을 들어서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물론 파비아의 후각이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것도 좋은데, 지금은 그 전에 들릴 곳이 있거든. 그쪽부터 찾아가자."
"어디?"
"파비아 너도 내 코어가 나쟈의 핵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지?"
"응응, 사제한테 들었었어. 옛날에 사제가 그 뱀을 한 번 잡아본 적이 있다고."
그 순간 파비아의 목소리에 화색이 깃든다.
"혹시 사제는 그 뱀을 찾을 줄 아는 거야? 그럼 어서 움직이자! 급한 상황이라며!"
흥분한 표정으로 당장 뛰어나갈 것처럼 스탭을 밟는다. 보다시피 파비아의 기분 변화는 상당히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재빠르게 잡지 않으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전에 고삐를 잡아둬야 한다.
"그래, 움직여야지. 하지만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도시 바깥으로 뛰쳐 나가려던 파비아의 머리통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저기는 도시 안쪽이잖아? 아, 혹시 그 뱀이 도시 지하에 숨어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파비아의 발언은 꽤 신선한 맛이 있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움직이려던 파비아의 손목을 뒤에서 잡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파비아와 함께, 나는 제피로스 내에 존재하는 어느 사무실을 찾았다.
계단을 여러 개 올라간 후, 사무실의 문고리에 열쇠를 밀어넣었다. 문을 연 순간 파비아가 표정을 찡그렸다.
"으, 이상한 냄새."
"먼지 냄새야. 조금만 참아줘."
후각이 예민한 파비아에게는 꽤 지독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살짝 불쾌함을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파비아와 함께 찾은 곳은 과거에 내가 계약해둔 어느 사무실이었다.
물론 내가 사용하던 장소는 아니다.
이 사무실은, 내가 나쟈의 핵 습득을 위해서 어느 연구자가 기거하던 곳이었다.
"혹시 사람 사는 곳이야? 근데 먼지가 엄청 많다……"
"옛날에 사람이 살긴 했는데, 거의 1년 정도는 안 썼어. 그래서 먼지가 많은 거야."
"사람? 누가?"
"지금은 없어."
"그래애……?"
1년 전에 죽었거든.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괜히 파비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내게 있어서도 좋은 기억은 아니다.
내 도움으로 연구하던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친 사건이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이 사무실은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계약을 해지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최근 1년 간, 난 상당히 바빴으니까.
유지비가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고.
물론 이런 식으로 이곳의 설비와 서적을 다시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단, 뭐든 가지고 있으면 쓰는 날이 오긴 오는 것 같다.
파비아의 뒤로 돌아 들어가서 복면으로 코와 입을 가려줬다. 마스크 대용이다.
"책이 엄청 많은데……, 혹시 나한테 읽으라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애초에 선행지식이 필요한 책이라 네가 읽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책장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낸다.
대부분은 아는 지식이지만 모르는 지식이 몇 가지 있다. 이쪽을 위주로 탐구해서, 나쟈를 추적할 방법을 고민할 생각이다.
가능성은 높다. 원래 여기에 살던 사람도 수도에서 내려오고 있는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나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능력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인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초에 내가 비벼볼 수 있는 수단은 이 정도 뿐이다. 연금술사도 나쟈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건 아니니까.
"파비아 너는, 내가 책을 읽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다주면 돼."
"겨우 그런 걸로 괜찮아? 아니면 내가 킁킁거리면서 찾아볼까?"
"아니, 그거면 충분해. 그리고 네가 나를 도와주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야."
"진짜지……? 그럼, 알았어. 사제 말대로 할게."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파비아 너는 혹시 기계의 설계도 같은 게 있을지 찾아줘. 아니, 꼭 설계도가 아니더라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그림이 그려진 종이……, 응. 나한테 맡겨둬."
설계로라고 말하면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표현을 수정했는데, 역시 이쪽이 파비아에게 잘 맞았다.
고개를 돌려서 다시 책장에 주목한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권을 바로 뽑아냈다.
먼지 쌓인 책상에 앉아서 두꺼운 책 한권과 노트를 나란히 놓았다. 메모를 하면서 읽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는 아는 내용이었다.
1년 전, 아직 코어가 없는 그 시절, 나는 내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나쟈의 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지식도 상당히 습득했다.
그 덕일까, 처음 보는 내용임에도 이해하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표현이 종종 등장할 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사전을 찾아야 했다. 어쩔 수 없다. 대학 교수가 읽던 책이었으니까.
이따금씩 사고능력을 가속시켜서 부족한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사용했다. 자주 쓸 수는 없다. 너무 쓰면 호흡이 달려서 오히려 안 하는 것만 못해지니까.
"사제……, 무지 빠르다. 난 사제처럼 하려면 눈이 빙글빙글 돌아 버릴 것 같아……."
세 권, 네 권, 책이 연이어 쌓여간다. 파비아의 표정은 점점 질려갔다. 하지만 나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책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게 필요한 요소를 습득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드문드문 읽고 넘어가는 부분도 있고, 애초에 연구하고 고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 빠르게 넘어갈 수 있는 거다.
나도 작정하고 잡으면 한 권을 완전히 끝내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현재, 나의 목적은 하나다.
과거 나와 함께 일하던 교수가 제작했던 나쟈를 유인하는 기계를 다시 수복하는 것.
당시에 사용하던 기계는 남아 있지만, 겨우 한 번 사용한 것만으로도 크게 소모된 상황인데다 싸움에 휘말려서 핵심 기술을 상실한 상태다.
그 제작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책을 뒤지고 있다. 대충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원리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마 재현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수 본인을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음데도 기계를 완성 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설령 원리가 복잡하더라도 상관없다. 나의 천변무궁류는 대기 중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배치해서 기술을 구축하는 유파.
천변무궁류의 기술로 재현할 수 없는 술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력 문제도 거대한 출력을 보유한 파비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다.
파비아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책에는 없고, 이미 죽은 교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
애초부터 승산이 있어서 들이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스스로도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작업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도 크게 힘들진 않았다.
"사제, 책 여기다 놓아둘게."
"응. 파비……, 아?"
파비아가 책 여러 권을 척척 쌓아서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런데 그 중 한 권, 아트룸 교수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 사이에 여러 번 접은 종이가 끼어 있다.
"이건……"
뽑아서 펼쳐보니까 설계도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구조를 확인한 순간, 책을 수도 없이 탐독하는 과정에서 쌓이기 시작한 지식이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구조로 결합하는 것이 느껴졌다.
재료가 비싸게 들진 않아도 상당히 까다로운 구조와 원리였다.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금술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