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27. 나쟈, 또 다시 (2)
* * *
뱀.
뱀이다.
거대한 뱀이,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르고 있었다.
옛 신화에서는 이무기가 천 년을 수련하면 용이 되어서 승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거대한 뱀은 짙은 안개를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검고 붉은, 불길한 색채였다.
색은 조금 다르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 정체를 알았다. 머리에 씌워진 왕관 같은 형태의 뿔.
나쟈였다. 바로 얼마 전, 허유의 출현과 함께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그 나쟈.
하지만 그 나쟈에게는 머리밖에 없었다. 머리 아래의 부분은 내가 천변무궁류의 일식필살검으로 날려 버렸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나쟈는 머리 아래에 있는 몸통까지 회복한 채, 수직으로 꼿꼿하게 서 있다.
도대체 나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거기다 나쟈가 솟아 오른 위치는 머리만 남은 나쟈를 연구하던 연구소가 있던 자리였다.
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던 나쟈의 머리에 무슨 변화가 발생한 게 틀림없다.
나는 시선을 그쪽 방향에 고정시킨 상태로 파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파비아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파비아, 나 말인데……"
"아, 안 돼!"
내 목소리를 들은 순간 파비아도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빠르게 흔든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듣기도 전부터 안 된다고 그래?"
"저거 보러 가자고 할 거잖아!"
파비아도 이제 내게 익숙해진 것 같다. 귀신 같이 내 마음 속을 짚어냈다.
당연히 파비아는 허락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양팔을 교차시키며 결사적으로 거부 의지를 드러냈다.
"절대로 안 돼! 지금 사제는, 허락 안 할 거야!"
나는 살짝 미소만 짓고 말았다. 잘못된 일에 내가 억지를 쓰고 있는 상황이니까.
지금의 나는 코어도 동결된 상태고 검왕검도 쓸 수 없다.
검을 한 자루 허리에 차고 다니긴 하지만, 이건 연금술사가 루이스의 검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제작한 시작품이다. 괜찮은 무기이긴 하지만 검왕검이나 루이스의 검과 비교하면 하자가 크다.
마력도, 검왕검도 없는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떠한 수준까지 굴러 떨어졌을까.
"파비아……"
"안 들을 거야! 난 귀가 얇아서 사제의 말에 홀라당 넘어갈 게 뻔하니까!"
의외로 자기 객관화도 확실하다. 머리 위에 솟아오른 강아지귀를 파비아가 손바닥으로 틀어막는다.
파비아가 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표정에서 진심이 뭍어 나온다. 여차하면 나를 제압해서 억지로라도 집에 데려갈 생각이다. 파비아는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담력도, 그것을 순식간에 해치울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렴, 나의 사저이니까.
"파비아, 일단 좀 들어봐."
"……."
파비아는 귀를 막고 있었지만, 사실 파비아 수준의 고수에게 그런 건 의미가 없다.
귀가 막혀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도 내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고 의미를 읽어낼 수 있고, 애초에 개과 수인의 청각은 귀를 좀 막는다고 소리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 정도로 무디지도 않다.
"나쟈가 모습을 드러낸 건 틀림없이 허유와 관련이 있을 거야. 그럼 당연히 허유를 쓰러트린 내가 살펴보러 가는 게 맞잖아."
"……허유우?"
아, 파비아는 허유의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다. 발음도 정확하다. 예전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경지가 높아지면서 인지 능력도 같이 상승한 걸까.
그것보다도 역시, 귀를 듣고 있어봐야 의미가 없다. 결국 대화는 통하니까.
파비아도 조금 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아마 내 입술을 읽고 싶어서 읽은 건 아니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안 돼. 꼭 살펴 봐야 한다면, 내가 살펴보러 가도 되잖아?"
"물론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겠지만…… 넌 설명을 못하잖아. 내가 같이 가야해."
개과 수인으로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파비아의 경우, 아마 지금의 나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저는 감각은 날카로워도 관찰력은 떨어진다. 할 수 있다면 같이 가서 둘이서 살펴보는 것이 제일이다.
혼자서는 안 된다.
"네가 날 지켜주면 되잖아. 네 실력이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아무리 나쟈가 강해도 허유 수준은 안 될 것이다. 아니, 아마 허유의 분신에도 미치지 못하겠지. 파비아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본다.
"사저, 부탁할게."
"……사제는 꼭 이럴 때만 사저라고 불러주는 것 같아. 치사해."
파비아가 귀를 접었다 펴면서 툴툴거렸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토라진 모습도 상당히 귀엽다.
둔한 것처럼 보여도 이런 때 보면 은근히 날카롭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내가 아쉬운 상황에만 파비아를 사저라고 불러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파비아는 내가 사저라고 불러줄 때마다 특히 기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파비아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파비아는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꼬리는 특히 상태가 더 심했다. 꼬리만 봐도 지금 감정 상태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지금 파비아의 속마음은 '사제한테 신뢰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다' 정도가 아닐까.
파비아는 언제나 내 앞에서 신뢰 받는 사저로 있고 싶어하니까.
"하지만 내 말이 맞잖아? 네가 함께 가면 위험하진 않을 거야. 그게 아니면, 자신이 없어?"
"그런 건 아니지만……"
옳지, 넘어온다 넘어와.
파비아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끙끙거렸다. 사저를 띄워주면서 허락을 따내는 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다.
"그래도 안 돼!"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파비아의 방어가 단단하다.
"왜?"
"사저로서, 사제를 위험한 곳에 내보내는 건 잘못된 거야. 내가 사제를 지킬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냐!"
파비아가 주먹을 옴팡쥐며 말했다.
조금 지리멸렬하긴 하지만 의도는 알겠다. 조금 흔든다고 넘어올 정도로 파비아의 주관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좀 기특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긴 하지만.
"하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파비아를 설득하면 좋을까. 내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던 그때, 파비아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면서 입을 열었다.
"사제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니까……, 이렇게 해. 사제."
파비아가 손을 살짝 내밀어서 내 오른손을 잡았다.
개과 수인의 높은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진다. 아주 뜨겁지는 않고, 기분 좋은 온기가 은은하게 전해지는 정도다.
"사제는 내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면 안 돼……? 나도 절대 안 놓아줄 거지만!"
결국 이 정도로 타협하려는 생각인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내 억지를 파비아가 이해해준 셈이다.
사저에겐 마음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조금 미안하다.
"절대로 안 놓아줄 거라고?"
"응. 팔이 잘려도 안 놓아줄 거야."
그건 살짝 무서운데…….
비유겠지?
파비아는 내 오른손을 쥔 상태로 나를 들어올렸다.
체급으로 따지면 내가 파비아보다 훨씬 크고 무겁지만, 마력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겉으로 보이는 체급은 의미가 없다. 파비아가 잡아 당기면, 난 그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자리에서 뱀이 솟아 있는 위치까지는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었지만 파비아 수준의 고수에게는 대단치 않은 거리이다. 불과 몇 걸음을 도약한 것만으로도 거리가 빠르게 좁혀져 간다.
뱀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건 파비아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특급 모험가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출발은 이쪽이 가장 빨랐다.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건 나와 파비아였다.
거대한 뱀을 앞에 두고 파비아가 천천히 착지한다. 약 1초의 텀을 두고 파비아의 인도로 내가 착지했다. 파비아의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주의 깊이 옮기는 중이다.
파비아 덕에 크게 고생하지 않고 도착했다. 지면에 내려선 나는 바로 앞에 있는 뱀의 몸통에 주목했다. 나쟈의 모습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다. 두께만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하는 메가톤급 괴물이니까.
예상대로 이곳은 나쟈의 머리를 연구하던 시설이었다. 지금은 천장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져서 폐허나 다름없다.
여기저기에 쓰러지고 잔해에 깔린 사람들이 보인다. 연구시설 내에 있는 보호마법이 효과를 봤는지,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나쟈에 고정시킨 채 내부를 살펴보듯 눈에 힘을 줬다.
그리고……
"사제, 이거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맞아. 이건 허물이야."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까,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게 보인다.
마력도 느껴지고, 크기도 크지만 이것은 알맹이가 없는 허물에 불과하다. 아마 나쟈가 지상 위로 올라온 직후, 허물만 여기에 두고 본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경우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허물의 크기가 이러한 만큼, 본체의 크기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일 텐데.
도대체 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지하로 숨어들기에도 마땅찮은 크기다. 이 정도로 큰 질량 덩어리가 지하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기척이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꼭 커다란 상태라고는 할 수 없나.
나쟈의 본질은 거대한 마력 덩어리다. 한 점에 압축되어서 부피를 줄인 다음 모습을 감췄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
애초에 지금 나타난 나쟈부터가 예외의 덩어리 같은 것이다.
기존의 상식은 버려야 한다.
"이놈의 도시는, 정말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군."
내가 고민에 빠져 있었을 때, 다른 특급 모험가들도 도착했다. 마그누스는 내 얼굴을 발견하고 바로 다가왔다. 그리고 파비아의 손에 꽉 잡혀 있는 내 오른손을 보고 눈을 깜박인다.
크게 자각은 없었는데, 조금 부끄러운 그림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떼어내기도 조금 그렇고. 그냥 이대로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애초에 떼어내주지도 않을 것 같다.
"신현아. 뭐 발견한 건 있냐?"
"저희도 이제 막 도착했어요. 알아낸 거라곤……, 이게 허물이라는 것 정도?"
"나 참……."
마그누스가 눈을 돌린다. 그도 급하게 나왔는지 등에 짊어진 대검을 제외하면 옷차림이 가볍다. 검은 런닝에 두건을 쓰고 있다. 건물 올리다가 급하게 온 것 같다.
"신현이 너는 그쪽에 전념해라. 연구소의 직원들은 우리 쪽에서 수습하지."
"네."
요하네스와 스텔라도 차례로 도착했다. 그리고 루이스도. 루이스 역시 혼자는 아니었다. 옆구리에 연금술사를 데롱데롱 매단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술사가 빠질 수는 없지. 저렇게 올 줄 알았다.
"선생님, 루이스."
"신현아."
연금술사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도 파비아가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걸 보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태도였다. 루이스도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파비아 앞에서는 묘하게 경계심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알아낸 건 있어?"
"저희도 이제 막 도착한 거라서. 아, 일단 여기에 있는 건 허물 같아요."
"허물이라. 그럼 본체는 어디에?"
"일단."
나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마그누스와 요하네스, 특급 모험가를 대표하는 두 필두를 향해 입을 연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보 라인을 통해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곳……, 그때 특급 재해가 출현했던 장소들을 말이냐?"
"네, 나쟈는 머리만 남은 상황에서도 갑자기 활동을 시작했어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았다. 확인해보도록 하지."
마그누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허유의 출현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특급 재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수련의 나날을 거듭하는 동안 마그누스와 요하네스를 비롯한 특급 모험가들이 특급 재해들을 제거하긴 했지만, 그들 또한 부활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갑작스레 활동을 게시한 나쟈만 보더라도, 기존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허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신현이 너는 어쩔 생각이냐?"
"일단 공방에 돌아가서 물건을 좀 챙긴 후, 다시 조사할 생각입니다."
급하게 오느라 나도 연금술사와 맨몸인 상황이다. 내 마력이 살아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런 상황도 아니다. 정확한 계측을 위해서 장비가 필요하다.
"백신현, 그런 거라면 내가 가져와줄 수 있는데."
"아냐, 나도 한 번 다녀오긴 해야해."
루이스가 드물게 친절을 보였지만 이번에는 괜찮았다. 아니, 내가 한 번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다.
이 위치에서 발생한 현상은 틀림없이 검왕검과 백신아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테니까.
하지만 검왕검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녀석의 상태를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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