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26. 개선 (10)
* * *
바닥에 깔린 타일은 회로처럼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해서,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다.
바닥에 깔린 타일을 돌아보며 루이스가 혀를 내두른다.
"이 구역에 있는 타일 전부에 손을 댄 걸까? 보통 일이 아니었겠는데……"
"그래서 파비아 상태가."
"고생 시킨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
루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루이스도 쉬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특급 모험가의 신분으로 온갖 뒷처리에 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구역 전체에 있는 타일을 모조리 떼어낸 뒤, 처음부터 끝까지 배치를 새로 재구성했을 테니까.
연금술사는 대지 속성에 특화되어 있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도무지 며칠 만에 끝마칠 수 있는 작업량이 아니다. 파비아도 아마 상당히 고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라도 잘못 배치하면 술식 전체가 일그러질테니, 몇 번씩 갈아 엎었을 가능성도 높고.
천변무궁류의 검사인 나는 이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작업 끝에 완성된 결과물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코어는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쌓아온 것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니까.
"타일의 배치로 지맥을 유도해서 마력을 집중시킨 건……, 가? 천변무궁류하고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해?"
"천변무궁류 쪽이 좀 더 나아. 이런 식으로 타일을 배치해서 마법진을 만들어도 지맥의 힘을 통째로 끌어오는 건 아니니까. 지맥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일부를 빌려 오는 정도에 불과해."
천변무궁류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조악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구조다. 하지만 천변무궁류 자체가 입문이 더럽게 까다로운 유파인 점을 고려하면 이건 조금 부당한 비교다.
검왕의 제자였던 파비아조차 천변무궁류에는 소질이 없다.
연금술사는 최선을 다했다.
바닥에 깔린 회로도를 더듬어 가며 마력이 모이는 중심지를 찾아간다.
몇백 걸음 정도 걸었을까, 넓게 뚫린 공터에 도착했다. 바닥에 깔린 타일이 원을 그렸다. 둥근 원 안에 또 다시 신경 다발처럼 복잡한 회로가 깔려있다.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여기가 바로 이 구역의 중심지인 것 같다.
회로의 중심에는 높이 2미터, 너비 50cm 즈음 되는 석관이 똑바로 서 있었다.
검왕검은 볼 수 없었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이 위치에 존재했다.
"……이봐."
고개를 든다. 꼿꼿하게 일어선 석관 위에, 흰 머리카락의 소녀가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그 실루엣은 조금 투명하다. 아지랑이처럼 밀도가 낮아서, 등뒤의 풍경이 그대로 비쳐 보인다.
마치 유령 같은 존재다. 실제로, 그 존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밖에 없다.
검왕검의 주인인 나와 나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백신아.
검왕검의 내부에 존재하는 가상 인격이었음으로.
"몸은 좀 어때?"
「이젠 좀 살 것 같아요. 검주께서는 어떠신지?」
"나도 비슷해.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하거든."
「오늘은 기쁜 날이네요.」
짧게 대꾸하고, 해살스럽게 웃는다.
절대무비한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 허유와의 싸움에서 나와 백신아는 회복하기 어려운 심각한 손상을 경험했다.
나의 경우 코어의 외적 파손에 의한 기능정지. 백신아는 마력의 과부하에 의한 손상이다.
내가 스스로의 다리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회복 기간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백신아 역시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아니, 백신아는 오히려 나보다 심하다.
지금의 백신아는 저기 서 있는 석관에서 나올 수 없는 상태로 보였으니까.
「루이스 아씨도, 오랜만에 뵈니까 기쁘네요. ……그런데, 혹시 오늘도 하신 거예요?」
"그렇게 됐어……."
루이스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한다. 파비아도 그렇고, 다들 눈치 하나는 귀신 같다.
석관 위에 앉은 백신아가 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보아하니 건강하신 것 같네요. 보기 좋아요.」
"넌 어때? 한동안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나?"
「네, 그렇게 되었답니다. 선생님께서 지맥의 마력을 끌어와서 절 회복시키고 계세요. 지금은 손상으로 자가수복 기능조차 움직이지 않을 지경이라.」
백신아가 나를 내려다본다. 자주 볼 수 있는 구도는 아니었다. 보통은 내가 허리춤의 백신아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리니까.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주종 관계였지만, 백신아는 내게 또 한 사람의 스승이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한동안은 전장에 나서지 못할 듯 싶네요.」
"그건 나도 비슷해. 코어의 재활은 짧게 잡아도 1년은 걸릴 테지."
이것도 상당히 희망적으로 본 관측이다.
사실상 나의 코어는 빈껍데기 상태로,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예 잃어버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새로 얻은 인맥을 총동원해서 나쟈의 핵을 새로 습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다.
많은 것을 대가로 지불한 끝에 손에 쥔 승리였다.
「검주, 루이스 아씨.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저와 같이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인 건 알지만 여기에 혼자 있느라 많이 갑갑했거든요.」
"괜찮아. 루이스 너는?"
"신현이 네가 괜찮으면, 난 신경 안 쓰는데."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백신아가 소리 없이 웃는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너무 심심했어요.」
기지개를 쭉 펴면서 한숨을 쉰다. 백신아의 표정은 살짝 울상이었다. 말하기 좋아하고, 활달한 성격의 백신아에게는 지옥에 가까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연금술사와 파비아가 곁에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백신아도 며칠 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두 사람을 잡아두는 건 부담스러웠던 거겠지.
그림이 대충 짐작이 간다.
「검주, 실감이 나시나요? 검주는 지금, 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 중 하나를 저승으로 보낸 거랍니다.」
"그런가."
어느 정도 과장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허유는 혼자서 이 세계를 멸망에 몰아넣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
전투의 상흔은 도시의 외곽 구역에도 남아있다. 벽과 타일에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균열이 보인다.
「그리고 이제껏 없던 거대한 강적과 맞서 싸워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손에 넣으셨겠죠. 목숨을 건 사투는 사람을 성장 시키는 법이니까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코어가 회복되어야 알 수 있겠지. 이 꼴로는 천변무궁류도 쓰기 어려워."
쓰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신에 새겨진 천변무궁류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이 주먹 안에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코어의 기능이 정지하며서 전투력을 크게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정말 허유와의 싸움에서 크게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걸 실감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싶다.
또, 느긋하게 재활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허유라는 거대한 위협이 사라진 지금, 스페트로와 란즈 가주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마그누스와 요하네스가 아직 이 도시에 있는 동안에는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 같지만…… 과연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
이건 어느 의미에서 신뢰에 가깝다.
란즈 가주와 스페트로라면 틀림없이 또 무슨 이상한 짓을 저지를 거라는 커다란 신뢰.
「루이스 아씨도 실력이 꽤 늘어난 것 같으시던데요.」
"그건 맞지만……, 솔직히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아. 파비아가 거의 다 했으니까."
백신아는 인간 관계가 좁은 탓에 눈치와 사회성이 조금 부족하다. 루이스가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일까. 굳었던 표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번지르르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그릇이 존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천재인 루이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 한계치가 매우 높다.
루이스 자신조차도 그 재능의 끝을 알지 못한다.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
루이스가 왼쪽 눈을 살짝 문질렀다. 얼마 전까지는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지금은 회복했다. 애초부터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고 루이스 자신도 말했었다. 그건 허세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가 싸웠던 그 괴물이 끝은 아니잖아."
이미 한 번 지나갔던 이야기를 루이스가 다시 꺼냈다. 루이스의 시선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힘이 빠진 어깨에서 고요하게 투지가 피어오른다.
"그 괴물도 그렇고, 보이드도 그렇고. 그리고 백신아 너도 그렇고. 모두 그 괴물을 복수형으로 표현했어.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괴물 같은 놈이 아직 여럿 남아 있는 거지?"
「네, 그렇답니다. 물론……, 현 시점에서 '그들'이 이 세계에 간섭하진 않을 거예요.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조건이 붙어 있는지라.」
"보이드 때도 그랬지."
내가 이전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았다. 이미 죽어서 시체까지 실려간 놈의 이름을 본의 아니게 자꾸 입에 담게 된다.
좋든 싫든, 보이드는 나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보이드의 몸에 허유와 이어진 단말이 있어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맞아요. 그러니까, 아마 한동안은 괜찮을 거예요. 뭐……, 절대라고는 말 못하지만용.」
"힘을 키워서 나쁠 건 없잖아. 스페트로하고도 언제 다시 싸우게 될지 모르는데."
루이스가 시선을 살짝 떨어트렸다.
잠시 있다가, 손끝으로 귀를 살짝 두드리면서 고개를 다시 든다.
"그런데 있잖아. 나는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그 이름."
"허유 말이야?"
"지금도 못 알아들었어. 꼭 잡음이 낀 것처럼, 소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지거든."
루이스의 미간에 골이 파인다.
허유의 존재 자체가 지나치게 격이 높기 때문일까. 나와 백신아 이외에는 허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고, 발음도 할 수 없었다. 루이스 뿐만 아니라 연금술사와 파비아도 마찬가지다.
고주파와 저주파처럼, 높은 차원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이름 하나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다. 그저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뇌에 부담이 걸려서 칠공에서 피를 뿜는다.
나 역시 허유의 본체를 직시할 적에는 적잖은 부담을 느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 존재를 인식하고 대적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백신현과 루이스을 가르는 요소는 아마도 하나 뿐.
천변무궁류의 습득 여부다.
허유와의 싸움을 거치면서 내 안에서도 조금 확신이 생겼다.
인간의 능력으로 인식 할 수 없는 격 높은 존재.
그리고 대기의 움직임 하나, 마력 입자의 존재 하나 하나까지 관측한 뒤 이해하고 계산해서 초식을 펼치는 천변무궁류.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그 점을 고려했을 때 천변무궁류가 탄생한 목적은……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훑으며 고개를 돌렸다. 백신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신아야.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검주.」
백신아가 날 보며 웃었다.
* * *
「…….」
늦은 밤, 백신아는 홀로 석관 위에 앉아 있었다.
백신현과 루이스는 돌려 보냈다. 지금은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거기다가 그 두 사람은 해야 할 일이 많다. 백신아 한 사람에게만 붙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을 돌려 보낸 백신아의 판단에는 착오가 없었다.
그리고 백신아에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허유와의 싸움에서 한 번 부러진 뒤로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 한 번 기동하고 나면 반드시 어느 정도의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휴면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보안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바닥의 타일에는 지맥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검왕검의 신변을 보호하는 술식까지 포함 되어 있었다. 술식이 이 구역 전체에 깔려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것저것 기능을 투입하다보니 술식 자체가 비대해지고 말았다.
졸음이 찾아온다. 아니, 도구인 그녀에게 졸음이라는 개념은 없다. 이것은 그녀를 유지하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이 하나둘씩 휴면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의식의 단절에 가깝다.
「루이스 아씨에게는 허유 같은 존재가 더 나타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의식이 흐려진다. 백신아의 의식을 유지하는 기능마저 단절되었다. 앞으로 약 수 초 뒤, 검왕검의 의식은 완전히 휴면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모르겠어요……, 워낙 변수가 많은 상황이라…….」
몸이 말단 부분부터 빛의 입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태는 백신아의 의지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검왕검이 휴면 상태에 들어가면 당연히 이 자리에 있는 백신아의 모습도 검 내부로 돌아가고 만다.
「어쩌면 허유와의 싸움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독한 싸움이 검주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루이스의 말처럼, '그들'은 복수 개체였다.
그리고 허유보다 강대한 존재 역시 존재한다.
천변무궁류와 검왕검은,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탄생했다.
하지만……
빛의 입자로 흩어지던 백신아의 육체에 갑자기 노이즈가 달렸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입자가 흩어지다 말고 육체가 그 자리에서 경직된다.
명백히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몇십 초 가량 경직되어 있던 검왕검의 작업이 다시 한 번 느릿하게 시작된다.
백신아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다.
낯빛도 어둡다.
「하지만 그때……, 저는 검주의 곁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