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26. 개선 (9)
* * *
"있잖아, 백신현."
"왜?"
루이스는 침대 위에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몸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돌려서 백신현을 본다. 몸뚱이는 알몸이었다. 오늘은 날이 조금 뜨거워서 이불을 덮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 몇 시까지 나가야 하지?"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을걸."
"으, 씻어야 하나."
루이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호텔에 예약한 시간은 모두 세 시간. 그 중에 한 시간은 몸을 씻는 데 사용했고, 또 한 시간은 몸을 섞는 데 사용했다.
그다지 몸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예약한 시간이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른해. 10분만 누워 있다가 일어날래……."
루이스가 투덜거렸다. 백신현은 소리 없이 살짝 웃었다. 루이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애 같은 구석을 보여줄 때가 많다. 이 점은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10년은 사람을 바꾸고도 남을 세월이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있었다. 가끔씩 백신현이 10년간 잃은 것을 그리워할 때마다 루이스의 한결 같은 모습은 큰 도움이 되었다.
"……루이스, 너 뭐하냐."
"으, 어쩌다가 닿은 거야."
그때, 백신현의 오른손에 루이스의 손등이 접했다. 루이스는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한 번 접한 손등은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있잖아, 백신현."
"왜?"
루이스가 다시 백신현을 불렀다. 무의식적으로 서로의 새끼 손가락이 얽힌다. 의도적으로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다.
"내가 오늘 안전한 날이라고 알고 있긴 한데, 아닐 수도 있잖아."
"그렇지."
결국, 때가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신기한 것이라, 어제까지 알고 있던 규칙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규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간 겪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백신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럼 그때는 어떡하지?"
"키우면 되잖아. 그런 거 걱정할 거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겠지."
백신현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포커페이스였다. 그 표정이 무너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하지만 루이스 앞에서 포커페이스는 의미가 없다. 규격외의 마력을 통해 강화된 루이스의 감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장의 고동 소리, 불수의근의 움직임 등을 통해서 진실과 거짓을 판정할 수 있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서로의 손등이 접해 있는 상황이다. 판정의 난이도는 훨씬 더 내려간다.
그리고, 루이스의 감각이 판정한 백신현의 속마음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이게 뭐 무게 잡으면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하여튼……, 넌 진짜……."
루이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말하는 투는 껄끄럽지만 표정은 풀어져 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농담이야. 내 주기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컨디션 나빠지면 갑자기 어긋날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마 괜찮을 거 같은데."
"이번 싸움에서 네가 느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할 텐데, 확신할 수 있겠어?"
"으…….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불안하네."
루이스와 연금술사, 두 여성과 오랜 세월 교제해온 탓일까. 백신현은 이런 화제에도 무리 없이 따라왔다. 야성적으로 보이지만 꽤 섬세한 면모가 있는 남자다.
"그런데 왜 평소에 하지 않던 고민을 다 하고 그래? 오랜만에 해서?"
"그런 것도 있고……, 나 같은 특급 모험가는 최대한 대를 잇는 게 좋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아, 그거?"
특급 모험가는 그 특성상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가 많다.
아무리 모험가 인식이 조금 나아졌다지만 돈 많은 상류층이나 지체 높은 가문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공화국이 도래하고 세상이 변했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모험가가 아니라 군부에 들어가서 출세길을 밟는다.
돈 많고, 가문 좋은 사람들은 모조리 군부로 밀려 들어가고, 모험가의 길에 도전하는 건 백신현이나 마그누스처럼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없는 사람이다.
특급 모험가의 특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특별한 가문도 없지만 타고난 실력과 재능으로 지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존재들.
말하자면 황무지에서 스스로 꽃이 피어날 정도로 희박한 확률을 뚫고 올라온 돌연변이적 강자, 그것이 대부분의 특별 모험가를 관통하는 인식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란즈 가주를 비롯한 스페트로 가문의 경우, 모험가를 보는 인식이 나쁘지 않은 편이고 그 또한 특급 모험가의 일각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예외는 그 한 사람 뿐.
그 이외의 특급 모험가 전원은 절대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우수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는 힘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힘 역시 존재한다.
특급 모험가 제도는 그러한 힘을 발굴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탄생한 제도였다.
또한 그들은 특급 모험가가 보유한 돌연변이적 유전자를 후대로 잇는 작업에도 적극적이다. 특급 모험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 있게 여러 가지 혜택을 제시하기도 한다.
백신현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루이스에게 직접 들었다.
특급 모험가인 루이스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상담할 수 없다. 하지만 백신현은 예외였다.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루이스의 푸념을 오래 들어온 탓에 특급 모험가만이 알고 있는 정보에도 밝았다.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백신현과 시선을 맞춘 루이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로 임신하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가 태어날지."
아직은 호기심 차원에서 꺼낸 이야기였다.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다.
지금은 적어도.
"그건……, 나도 좀 신경 쓰이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너도 나보다 머리는 좋잖아. 둘의 좋은 점을 이어 받으면 진짜로 어마어마할 것 같아."
루이스가 생글생글 웃는다.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도 아리송하다.
하지만 재미있다.
신기하게도, 딱 그런 기분이었다.
* * *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서 백신현의 시선을 살핀다.
"……나른해."
루이스가 하품했다. 침대 끝에 걸터 앉아서 막 스타킹을 신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래도 백신현이 루이스보다 옷을 입는 게 빨랐다. 그는 상하의 모두 입고 벗기 쉬운 복장이었으니까. 그에 비해서 루이스는 이것저것 따져야 하는 부분이 많은 까다로운 복장이다.
스타킹을 꼼꼼하게 당겨서 신은 후 벗어 두었던 옷을 하나씩 걸친다. 루이스는 그 동안 걸칫하면 하품을 토해냈다.
실제로 호텔에 숙박한 시간은 세 시간. 그 중에서 몸을 움직인 건 두 시간밖에 안 된다. 그런데 몸이 나른했다.
몸의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심했다. 루이스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특급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낯빛은 상당히 좋다. 마치 정기를 빨아먹은 것처럼 피부도 반들반들하다.
루이스가 시선을 힐끔 돌린다. 백신현도 컨디션은 좋아 보인다. 이제 막 퇴원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갈 채비를 끝마쳤다. 루이스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객실에 배치된 쓰레기통에는 사용하고 남은 고무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비어 있었는데 지금은 꽉 차있다. 아니, 오히려 다소 용량을 초과했을 정도다.
루이스가 쓰레기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호텔은 두 번 다시 못 오겠다……."
"그러게."
백신현도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부터 일치한 드문 순간이다.
호텔을 나와서 함께 걸었다. 지금은 오히려 루이스가 환자 같다. 다리가 풀렸는지 걷는 자세가 불안불안하다.
"내가 좀 너무했나?"
"환자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까진 아니거든?"
루이스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백신현의 말이 자존심을 자극했는지, 지금은 자세가 상당히 좋아졌다.
걸음걸이가 조금 불안한 걸 제외하면 루이스도 낯빛은 좋다. 피부에서 거의 빛이 나고 있으니까.
"돌아가면, 선생님하고 파비아한테는 어떻게 설명하지……."
몇 걸음 걷다 말고 루이스가 잠시 멈춰섰다. 오른손을 허리에 갖다 댄 상태로 천천히 호흡한다. 아직 몸이 예민한 상태인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면 되잖아."
"역시 그게 좋겠지……? 숨기면 진짜로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고."
결심했다는 듯,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루이스의 몸은 아직도 예민한 상태였다. 백신현 곁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금 걷다가 멈춰서고, 조금 걷다가 멈춰서면서 나아갔다. 평소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연금술사의 공방은 정말로 외진 구석에 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오가는 것도 일이었다.
경계를 지나서 도시 외곽에 들어섰다. 이곳은 언제 찾아와도 살풍경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쪽이 반갑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돌아온 탓일까.
노크는 필요 없었다. 가지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사제에……. 어서 와……."
현관 앞에 파비아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낯빛이 심상찮다. 거의 시체 수준으로 창백한 데다가 눈가에는 기미가 가득 껴 있다. 팬더처럼, 눈가에 검은 분칠이라도 한 줄 알았다.
"파비아. 너 잠은 제대로 잔 거야?"
"……못 잤어어……. 그래도 사제 오는 거 봤으니까……. 이제……, 자야하야…… 아후."
파비아가 늘어져라 하품을 한다. 머리카락도 반들반들한 것이, 며칠은 자지도 씻지도 못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나 찾았어……?"
공방 안쪽에서 문을 열고 연금술사가 나타났다. 파비아도 파비아였지만 연금술사는 낯빛이 더 심각하다. 파비아에 비해서 체력이 떨어지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파비아는 그나마 봐줄 만한 꼴이었다. 지금의 연금술사는 걸어다니는 시체 수준으로 몸 상태가 나빠 보였다. 안 그래도 작고 가느다란 사람이 휘청거리기까지 하다보니,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무슨 심한 병에라도 걸린 것 같다. 하지만 하품을 하는 걸 보면 단순한 수면 부족으로 보인다.
"선생님, 상태가 왜 그러세요?"
"신아 때문에. 고치느라고 한숨도 못 잤어."
백신현이 병원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 연금술사는 그녀만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색은 잘 하지 않아도 백신현을 무척 아끼는 편이다. 그런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백신현에게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어쩌면 그녀는 그 이후로 수면을 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체력이 약한 그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온갖 약물과 마도구의 사용에 능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안 주무신 거예요?"
"바로 조금 전에 끝냈어……. 이제……, 자러 가야지……."
연금술사가 휘청거리면서 침실로 걸어간다. 그러다 앞으로 쓰러진다. 하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연금술사가 쓰러진 위치에는 파비아가 엎드린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파비아가 네 다리로 일어선다. 파비아의 자세가 높아지자, 그녀의 허리 위에 걸린 연금술사는 줄에 널린 빨랫감처럼 축 늘어졌다.
여러모로 기가 막힌 광경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신뢰 관계였다. 파비아는 물론 연금술사도 그런 모양새가 자연스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체력을 소모했는지, 연금술사는 파비아의 허리에 걸린 그 순간 이미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연금술사와 비교하면 파비아는 그래도 건강한 편이다.
"사제에……, 언니이……, 미안……. 나도 좀……, 자고 올게에……"
파비아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네 발로 걸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파비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리에 걸려 있던 연금술사의 몸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상당히 깊이 잠들었는지 눈을 뜰 기색이 없었다.
"사제……, 다 나은 것 같아서 기뻐……."
"그래, 고마워."
"그리고……"
난데없이 파비아의 눈매가 특이하게 휘어졌다. 묘하게 잔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루이스 언니……, 또 새치기 했어……. 치사해……."
"윽."
루이스가 난데없이 총에 맞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루이스치고는 드물게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었다.
파비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침실로 들어간다. 그래도 꼬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반갑기는 한 것 같다.
하지만 피로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연금술사와 함께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고, 수면에 빠지기까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급한대로 이불만 덮어주고 나왔다. 문을 소리 없이 조용히 닫고 돌아선다.
루이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죄책감이 느껴지는데……"
"됐어. 두 사람이 나중에 일어날 때까지 얌전히 있자."
"그런데 신아는 어디에 있지? 선생님 말씀대로면 수리가 끝난 것 같은데."
루이스가 고개를 크게 돌린다. 검왕검을 다 수리했다면서 정작 그 검왕검이 어디에 있는지 듣지 못했다.
"……."
그런데 그때, 백신현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의 백신현은 코어가 정지해서 마력의 반향을 통한 탐색 능력조차 상실한 상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백신현?"
"잠시만."
백신현이 시선을 한쪽 방향에 고정했다. 그가 갑자기 공방 바깥으로 나왔다.
루이스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가 무의미한 행위를 시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쫓아간다.
공방 바깥으로 나온 백신현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때 루이스도 눈치챘다. 바닥에 깔린 타일의 배치가 조금 이상했다.
이제까지는 서로 다른 색의 타일이 교차하듯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같은 색의 타일끼리 모여서 바닥에 모양을 그린다.
루이스의 눈에도 생소한 구조였지만 그 무늬는 제각각인 것 같으면서도 규칙성이 있었다.
마치 사람의 신경 다발을 타일의 배치로 구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스케일이 다르다. 루이스의 눈에 보이는 모든 범위에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타일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구역에 존재하는 모든 타일에 손을 댄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구역에 존재하는 마력을 모두 한 점에 집중시키기 위해서.
외팔이 백신현이 오른손 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땅에 흐르는 힘을 그대로 쓴 것 같아. 선생님의 전문 분야는 지면에 간섭하는 거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땅 속에 흐르는……, 지맥?"
"맞아."
백신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이 힘이 집중된 장소에 백신아가 있겠지."
"몸은 괜찮겠어?"
"괜찮아."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난 지금, 어느 때보다 힘이 넘치거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