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26. 개선 (6)
* * *
"미안하다, 이제 막 퇴원했는데 또 고민거리를 하나 안겨주고 말았군."
올리비아는 상당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올리비아가 죄책감을 느끼는 원인이 그것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냐, 그런 건 제때 제때 알려줘야 나도 편하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 터지고 나서 그런 소리 들으면 답답했을 거야."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그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야 일이 터졌을 때도 대응하기 쉽다. 당장 조용하게 넘어가자고 입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사건이 커지면, 결국 그걸 수습하는 건 또 나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군."
올리비아가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질문한다.
"그런데 백신현 너는, 표정을 보아하니 짐작가는 게 있는 듯 한데."
"있지."
증거는 없다. 하지만 소거법으로 후보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다 보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하나 있다.
"올리비아 너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건……"
그리고 아마 올리비아 역시, 상당히 이른 단계에서 용의자를 추려냈을 가능성이 높다.
동기가 존재하면서, 보이드의 검을 흔적 없이 빼돌릴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란즈 가주, 그 사람이 유력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올리비아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한 진실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다지 란즈 가주를 신뢰하지 않는다. 뭐, 실제로도 그는 날 가지고 이런저런 수작질을 저지르려고 했었으니까.
증거도 없이 이러는 게 그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걸 가르쳐줘도 괜찮은 거냐? 충성은 어쩌고?"
"……무조건 가주님을 감싸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리비아가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가주님은 '힘'에 크게 집착하는 성향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잘못된 일을 저지르기도 했고, 그 대가로 뼈저리게 치루셨지."
시선이 다시 한 번 내 왼쪽 어깨에 머물렀다가 떨어진다.
란즈 가주 역시 나와 같은 외팔이였다. 그의 팔을 날려버린 건 바로 나였다. 나와 다르게 팔이 절단된 수준이 아니라서 다시 붙일 수도 없다.
스페트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사태였다.
올리비아의 표현이 맞았다.
잘못된 일에 도전한 대가였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는 도무지 가주님을 말릴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부탁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
올리비아는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란즈 가주는 내게 이것저것 수작질을 걸어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모두 미수로 그쳤을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긴 수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올리비아의 역할이 컸다. 란즈 가주의 최측근인 올리비아는 그의 옆에서 과하다 싶은 수는 쓰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나의 원한을 살 수 있는 일은 피하도록 하면서 란즈 가주의 행동을 상당 부분 제어하는데 일조했다.
사실 나도 찜찜함은 느꼈지만 란즈 가주가 실제로 내게 끼친 피해가 없어서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았었다.
스페트로와 싸우기 직전, 올리비아가 직접 내게 진실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올리비아도 란즈 가주의 의향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보인 행동도 그의 의지에 대치되지 않는 선에서 방향성을 수정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나는 가주님을 설득할 수 없다. 힘으로 뜯어 말릴 수도 없지. 하지만 나는 가주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힘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스페트로의 힘을 빌리거나, '그 존재'에게 손을 대는 건 너무 위험해."
올리비아가 코를 훌쩍거렸다.
"안전한 방법을 고르셨다면 나도 이러지는 않았을 거다. 거기다가 일이 잘못될 경우, 나와 가주님만 위험한 게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
그때였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우스웠는지, 올리비아가 허탈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뭐……, 결국 이런 식으로 네게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됐어. 아직 가능성이 높다 뿐이지 너희 가주 양반이 진짜로 빼돌렸다는 증거는 없잖아."
나는 손을 흔들면서 올리비아를 만류했다.
심적으로는 백프로지만, 실제로 까보면 다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니.
몇 가지 요소를 두고 올리비아와 여러 번 상의를 거친 후 돌아선다.
그때, 올리비아는 등을 돌린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백신현."
"왜?"
"나는 너를 존경한다."
스탭이 꼬여서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몸을 돌려서 다시 올리비아를 돌아본다.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올리비아는 구김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 저렇게 웃으니까 좀 여자처럼 보인다.
"넌 내게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아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너한테 없는 거라고?"
"그래, 네 전투 능력만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야. 불리한 상황에서 올바른 답을 고를 수 있는 판단력,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추진력, 그리고……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잃지 않은 너를 존경한다."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어디에서 많이 본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샤를로트의 버릇이었다.
샤를로트의 버릇이 올리비아에게 옮은 것일까. 올리비아의 버릇이 샤를로트에게 옮은 것일까.
"그저 강할 뿐인 인간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어. 강함을 대가로 인간성을 잃거나, 그 인간성 때문에 약점이 생겨서 빠르게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지."
올리비아의 말에는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감이 존재했다.
어쩌면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거지 같은 세계에는,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가주님의 그릇된 행동에 직접적으로 맞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순종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나는 실로 어중간하고 어설프기 그지없는 인간이야."
나는 표정을 살짝 구겼다. 자학이 너무 심하다. 두 살 연상인 여자한테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내 기분도 좋지 않다.
"난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네가 보기엔 그런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난 올리비아의 말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정을 명확하게 내리는 사람이 멋있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 선택이 뻣뻣해질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네 성격은 우유부단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의견을 두루두루 포용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살다 보면 나 같은 성격이 잘 통할 때가 있고, 올리비아 같은 성격이 잘 통할 때가 있다.
란즈 가주를 두고 올리비아가 내린 판단은 다소 어중간하게 보일 수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앞서 말했듯 란즈 가주가 보이드의 검을 빼돌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오늘의 일은 올리비아의 성격이 긍정적으로 발휘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한 가지 성격이나 방침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삶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난 살짝 조롱하듯이 덧붙였다.
"정 마음에 안 든다면 한 번 바꿔보든가. 아마 후회하게 될 것 같지만."
"……네 말이 맞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닥친 탓에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군."
올리비아가 허탈하게 웃는다.
아마 내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올리비아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성격을 긍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올리비아의 삶도 만만한 삶은 아니었다. 스페트로 일파의 제2인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29년이니까.
녀석이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성격과 능력이 복잡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올리비아도 알고 있다.
지금은 그저, 짧은 기간에 여러가지 일을 경험한 탓에 다소 부정적으로 변한 것 뿐.
"고맙다, 나를 긍정해줘서."
올리비아가 한숨을 한 번 토해낸 뒤 다시 상반신을 세웠다. 조금 전과 비교해서 자세가 조금 당당해진 탓일까, 기운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널 존경하는 마음이 달라지진 않을 거다."
"그래? 마음대로 해."
나보다 두 살 많은 여자한테 그런 소리 들어도 낯부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뭐, 본인이 좋다면야.
"넌, 대단한 놈이니까."
* * *
올리비아와 헤어져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서 걷는 루이스는 조금 전부터 말이 없었다. 올리비아와는 거의 한 마디도 대화가 없었다.
나와 올리비아가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루이스와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래도 연금술사처럼 대놓고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고, 낯을 가리는 정도인 것 같다.
아니, 아니다. 그게 다는 아닌가?
이 묘한 껄끄러운 분위기는.
"루이스 너, 질투하냐?"
"……!!"
소리는 간신히 참은 것 같지만 리액션이 격하다.
뭐, 루이스의 속마음이야 훤하니까.
루이스는 나와 다르게 포커페이스에 재능이 없다.
제대로 놀란 루이스는 제대로 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기침 소리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사레가 들린 것 같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뜬금없이……!"
"아니야?"
"……시끄러. 그런 건 아니거든? 생각을 조금 하고 있었던 것 뿐이거든?"
아니기는, 얼굴만 봐도 훤한데.
루이스는 성격이 성격이라 대하기 쉬운 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예쁜 외모와 성깔 더러워 보이는 눈매 때문에 기가 죽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 말이야. 올리비아."
"어, 올리비아가 왜?"
"그 사람의 마음이, 뭔가 공감이 돼서."
"네가?"
솔직히 좀 의외다.
루이스와 올리비아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극과 극이다. 그나마 공통점을 찾으라면 키가 크다는 것과 가슴이 큰 것 정도 뿐인데……, 올리비아는 키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가슴을 압박붕대로 누르고 있는 상태라 티가 안 난다.
도대체 어디에서 공통점을 찾아냈을까.
흥미를 느꼈다.
"나도 지금 좀 네거티브한 상태거든."
"네가?"
"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 안 해?"
루이스는 근처의 벤치를 찾아서 나를 앉히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걸 보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난 별 도움이 안 됐으니까."
"……."
"니르바나 사원에서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 내 실력 자체는 상당히 크게 늘었지. 하지만……, 니르바나 사원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을 거야. 내가 싸웠던 분신은, 파비아 없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괴물이었으니까."
내가 허유의 본체와 싸우고 있는 동안, 루이스는 파비아, 스텔라와 함께 허유의 분신을 상대했다.
그것은 일개 분신에 불과하였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나와 스페트로가 연합해서 쓰러트렸던 분신보다 더 수준이 높고, 강력한 존재였으니까.
그때, 루이스는 도대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
왠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어야 하지?
무슨 정신 상담사도 아니고.
안 그래도 올리비아한테 그런 소리 들은 것 때문에 기분도 싱숭생숭한데, 루이스까지 날 붙잡고 이 지랄들을 해대니까 뭔가 피곤하다.
그리고 내가 뭐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본 것도 아니다.
내가 루이스하고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보나마나 자기는 멀쩡한데 나만 크게 다친 게 마음이 불편하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검을 늦게 잡은 게 후회된다 뭐 이딴 소리나 늘어놓을 게 뻔하지.
나와 루이스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거의 일치한다.
즉, 내가 최근 10여년 동안 개고생하면서 지랄을 떨었던 걸, 루이스 또한 함께 경험했다는 의미이다.
심지가 견고해서 티가 나진 않지만 그런 사정으로 정신적으로 그닥 건강한 여자는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야, 그만 집어치우고.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면 지금 나 좀 도와줘."
"……어, 도와달라고? 지금?"
루이스가 눈을 둥글게 뜬다. 하지만 별 말이 없는 거 보면, 내 대응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다.
"그래. 선생님 공방에 돌아가고 나면 또 바빠질 거 같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모두 바깥에서 끝내고 가려고."
"지금? 어, 어, 그래. 한 번 말해보셔. 내가 심부름이라도 해주면 돼?"
"심부름은 아니고.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긴 한데."
나는 오른손으로 가방에 손을 넣었다. 내 지갑이……, 여기 있다.
한손으로 지갑을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외팔이 경력이 오래되다보니 이제 익숙해졌다.
지갑 사이에 끼어져 있던 고무를 꺼냈다.
며칠 전, 연금술사가 파비아를 통해서 보내준 피임 기구였다.
파비아 그 입 가벼운 녀석이 연금술사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는지, 여차하면 쓰라고 보내준 물건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날 뭘로 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성욕에 씌인 짐승 정도로 보는 건가?
하지만 기어이 사용하게 된 지금 상황을 보면 연금술사의 예감이 틀리지는 않았다.
기가 막힌 일이다.
루이스도 이 물건의 용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이게 튀어나오는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잠깐만, 야, 백신현. 그거 뭐야?"
"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욕구불만이었거든. 그런데 느낌 상, 공방에 돌아가면 한동안 짬이 안 나올 것 같아서."
연금술사도 지금 상당히 바쁜 상태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정보를 전해준 파비아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일주일은 여유가 없을 것 같다고.
파비아도 상당히 안색이 안 좋았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두 사람이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러는 것도 좀 미안하긴 한데……, 나도 지금 일하려는 거다. 루이스의 컨디션 관리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사심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아무튼.
"루이스, 잠시 호텔 좀 들렀다가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