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26. 개선
* * *
"하아……, 하아……"
천천히 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호흡은 빨라졌고, 잠시 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고통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와 보이드는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동시에 베였다. 하지만 보이드는 상처가 깊었고 나는 얕았다. 이 부분에서 승부가 갈렸다.
하늘을 보고 쓰러진 보이드는 잠시 동안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허우적거리더니, 불현듯 편안한 표정과 함께 눈을 감았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놈에게도 이 싸움의 결과가 개운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보이드와 나는 서로 보유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맞서 싸웠다.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단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게.
그러한 싸움은 결과에 상관 없이 후련함을 느끼게 한다.
물론, 나는 죽어도 질 생각이 없었지만.
잠시 동안 흔들리던 보이드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힌다.
나와 수많은 악연으로 엮인 숙적의 죽음이었다.
보이드에게 인간적인 호의나 감정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가 저지른 짓을 고려하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편안한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최후는 무인에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윽……, 하아……"
보이드가 쓰러진 직후, 나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 앉았다. 육체는 한계였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 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이스는 승부의 끝을 확인한 뒤 비로소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른손으로 내 상반신을 지탱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보이드를 돌아본다.
"보이드는……, 죽은 거야?"
"……그런 승부였으니까."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악연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손으로 보이드와의 악연을 정리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 보이드가 진짜로 싸우고 있던 상대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놈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것은 보이드의 최후를 인도한 내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사실이다.
보이드는 마지막 순간, 도대체 누구를 생각하면서 검을 휘둘렀을까.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솔직히 조금 신경이 쓰였다.
보이드에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그래도 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이미 죽은 인간을 더 증오해봐야 의미도 없고.
"알았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마취부터 할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지……? 알고 있어……."
아, 긴장이 풀린 탓에 고통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몸이 옆으로 픽 쓰러진다. 루이스는 내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몸을 부축해주었다.
나의 체중이 대부분 루이스 쪽에 실렸다. 눈을 한 번 깜박이기만 해도 그대로 의식이 날아갈 것 같다.
흐릿해진 시야. 끊어질 것 같은 의식 속에서 나는 띄엄띄엄 입술을 움직였다.
"검왕검을……, 이쪽으로……"
"알았어."
다행히 검왕검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검집에 들어있던 검왕검을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들어서 가져왔다.
루이스도 검왕검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의 검을 뽑아서 던져준 건 그 때문이었으니까.
검왕검을 검집에서 뽑아내려다 그만두고, 조용히 품에 안는다. 검집에 집어넣기 직전 검왕검은 사방팔방에 금이 가서 도무지 휘두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함부로 뽑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백신아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
백신아는 아직 이 안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벌써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그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데, 자꾸 의식이 멀어진다.
의식이 아래로 떨어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깊이.
아주 깊이.
* * *
"……."
커다란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크고, 맑고, 둥글둥글한 눈동자. 구김살이 느껴지지 않는 보라색 눈동자가 코앞에서 깜박인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머리에 피가 안 도는지 의식이 멍한 탓도 있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인다. 두 번, 세 번. 그러자 갑자기 가까이 붙어 있던 눈동자가 멀리 떨어졌다.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고 나서야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온전히 시야 안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사제가 일어났다!"
"파비아……?"
악의 없는 눈동자에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삐죽삐죽한 개과 수인의 귀.
파비아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응응, 사제. 일어났어?"
"일어났지……. 보면 알잖아."
"열은 없구?"
"마취 때문에 감각이 좀 무뎌져서 그건 잘……, 아니 잠깐만 너 뭐하냐."
파비아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와서 이마를 바싹 붙였다. 그 와중에도 나를 배려했는지, 움직이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이마를 맞붙일 적에는 거의 신생아를 돌보는 수준의 섬세함을 느꼈다.
개과 수인인 파비아는 순수 인간인 나와 비교해서 대사가 높다. 체온도 꽤 높은 편이라 이마를 서로 붙인 순간 따끈따끈한 느낌이 뭉근하게 전해졌다. 묘하게 기분이 좋다.
파비아는 골몰하는 표정으로 잠시 동안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여유를 두로 천천히 이마를 떼어냈다. 이마를 맞붙이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파비아가 손을 대서 정리해준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서 파비아의 이마가 붙었던 부위를 살짝 문질렀다. 내 피부와 근육이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건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그런 걸거다.
"있잖아, 파비아. 오늘 며칠이야?"
"사제는 삼일 내내 쿨쿨 잠만 잤어."
"그래? 생각보다 오래 되진 않았네."
조금 우습지만, 내가 각오했던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최근 일 년 동안 내가 기절 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을 모두 더하면 한 달은 나올 거다. 기절과 혼수 상태를 쉴 새 없이 겪어온 내가 보기에, 이 정도면 꽤 빠르게 기상했다고 불 수 있다.
"아! 맞다, 사제. 사제가 일어나면 선생님이 부르라고 했거든…….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 나가봐도 될까……?"
"괜찮아. 부탁할게."
"응! 나 얼른 다녀올게!!"
"복도에서 뛰지 말고. 병원이잖아."
"응!!"
그, 소리도 함부로 지르지 말고.
여기 병원이잖아.
파비아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그래도 내 말을 듣기는 했는지, 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까 파비아한테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수로 그 짧은 사이에 어마어마한 실력을 획득하게 된 건지.
현재의 파비아는 아마 스페트로와 요하네스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파비아의 갑작스런 실력 상승에는 커다란 대가가 있거나, 혹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게 틀림없다.
……됐어. 나중에 물어보자.
지금 파비아의 상태를 보아 하니, 건강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까.
내가 파비아의 갑작스런 실력 상승에 신경을 쓰는 건 그 때문이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 어쩌면 파비아의 갑작스런 실력 상승에도 큰 리스크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파비아의 건강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걱정이다.
그런데 지금 파비아의 상태를 보아 하니, 몸이 특별히 불편한 거 같지는 않고.
나중에 물어봐도 될 것 같다.
"후우."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열린 창문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지금 막 눈을 뜬 상태라 머리가 조금 멍한 상태였는데,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할 때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혀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때, 파비아가 미처 닫지 않고 나갔던 병실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이스? 연금술사? 내가 아는 사람들의 기척과 하나씩 비교해보는데 어느 쪽과도 맞지 않았다. 루이스는커녕 연금술사보다도 작다.
"샤를로트?"
문 바깥으로 금발이 살짝 보였다. 잘 관리된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그걸 본 순간 기척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이름이 불렸는데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목에 살짝 힘을 준 뒤, "샤를로트" 하고.
"아, 안녕……. 신현 씨……."
"몸은 좀 어때?"
"열상하고 찰과상이 있긴 하지만……, 며칠 내로 퇴원할 수 있을거래."
샤를로트가 쭈뻣쭈뻣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샤를로트도 입원한 상태인지 나와 같은 환자복 차림이다.
환자복 아래로 팔뚝이나 목 같은 부위에 붕대가 감겨 있다.
샤를로트가 부상를 입게 된 경위가 나도 모르게 떠오른다.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샤를로트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오히려 더 신경 쓸 테니까.
"둘 다 어떻게 살아 남았네. 그렇지?"
"응……. 나도 이야기……, 들었어……. 신현 씨가 적의 두목을 잡아 두고 있는 동안……, 선생님이 날 구출하셨다고."
샤를로트가 가슴 위로 양손을 모았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살짝 쥔다.
뺨의 살짝 붉어진 샤를로트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믿고 있었어……. 신현 씨는 반드시 이길 거라고."
"나 한 사람의 힘은 아니었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거야."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 네 덕도 있어. 그때 네가 몸을 던져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 내가……, 신현 씨에게 도움이 됐구나……."
샤를로트의 얼굴이 크게 밝아진다. 체온이 살짝 올라갔는지 뺨도 살짝 분홍색으로 변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 정말로 기뻐……."
"……그래."
사실, 이때 샤를로트를 강하게 꾸짖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어른들의 전장에 나섰다가 깊이 상처 입은 상황이니까.
잘못하면 샤를로트도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샤를로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죽었다.
샤를로트의 방식으로 목숨을 구한 내게 샤를로트를 꾸짖을 자격은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게 힘을 쌓는 것이다.
다음 번에도 지금처럼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나와 샤를로트 뿐만 아니라 전원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원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잠깐만.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내 검과 검집을 찾았다. 하지만 병실의 그 어느 자리에서도 나의 검을 찾을 수 없었다.
검왕검은, 백신아는 어떻게 된 거지?
그 사실을 눈치채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나는 시체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몸 상태였다. 나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한다.
나는 급하게 샤를로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샤를로트."
"어, 갑자기 왜 그래? 신현 씨……?"
내 표정이 너무 험악했나 보다, 샤를로트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다.
나는 헛기침 두어번과 함께 굳은 표정을 풀었다. 다시 한 번, 샤를로트가 놀라지 않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샤를로트, 내 검은 어디에 있어?"
"신현 씨의 검……? 그건……"
마음이 조급해진다. 검왕검은 부러지지 않았지만, 차라리 부러지는 게 나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검왕검 내부의 백신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루이스가 걱정했던 것처럼.
"자, 잠깐만……! 신현 씨, 지금 일어나면 안 돼……!"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나를 샤를로트가 멈춰 세웠다. 하지만 샤를로트가 말리지 않아도 나는 일어날 수 없다. 여러 차례 몸에 힘을 주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려고 한 반동일까. 그게 아니면 내 불안한 심리 상태가 심장의 고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 나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저기요……, 검주……?」
그때 갑자기 심장이 덜컥했다. 고개를 황급히 돌린다. 어느 새 파비아가 돌아왔는지 큼지막한 강아지 귀가 눈에 들어왔다.
파비아가 데리고 왔는지 뒤에는 연금술사와 루이스도 서 있다. 루이스는 빈손이었지만 연금술사는 품에 검을 안고 있었다. 수수한 검집, 그것은 언제나 내 허리에 붙어 다니던 검왕검의 검집이었다.
지금, 그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어……, 저기 검주? 혹시 저 때문에 그러세요?」
"……."
연금술사의 배후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흰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장발의 여자. 백신아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그, 걱정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전 지금 무척 멀쩡하거든요. 그러니까 검주도 좀 진정하시고……, 어? 검주? 검주?!」
"……."
휘청.
혈압이 팍 솟았다가 내려간 탓일까. 눈이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 갑자기 현기증이……
"시, 신현 씨─!?"
"몸도 안 좋은데 흥분하니까 그렇지."
연금술사가 혀를 끌끌 차면서 가까이 다가온다.
내 몸 상태를 체크하려는지 목적인지 손을 들어서 뺨에 가져간다
나는 시체처럼 한참동안 꿈틀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