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25. 신역?? (10)
* * *
마치.
손에 박혀 있는 굳은살의 형태로 직업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꾸준한 반복 작업은 그 사람의 육체에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같은 키, 같은 체중이라도 농구 선수와 축구 선수의 근육은 서로 다르다.
반복 작업은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인간의 몸을 그 작업에 특화한 형태로 바꿔 나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무학의 영역에도 존재한다.
검사와 창수의 굳은살은 서로 모양이 다르다. 코어에 축적된 마력 또한 마찬가지.
일격에 특화된 마그누스와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요하네스의 마력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수행으로 쌓아 올린 세월이 그들의 신체와 코어에 변화를 일으켰다.
보다 무학의 활용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천천히 특화 시켜 나갔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백신현은 어떨까.
그의 천변무궁류는 검왕검에게 부여 받은 계산 능력에 의해서 지탱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산 능력이 사라지더라도 천변무궁류로 싸움을 헤쳐 나온 세월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모래 터널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팔 위에 모래를 쌓아 올려서 틀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모래가 충분히 쌓이고, 물을 공급해서 굳히면 팔이 없어져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버틸 수 있다.
시작은 검왕검에 의해서 부여된 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변무궁류와 함께 켜켜이 쌓아온 전투 경험은 백신현의 몸과 정신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검왕검에 의해 부여된 능력이 없어진 지금에 와서도 무너지지 않고, 백신현의 내면을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다.
"……말도 안 돼."
허유의 입에서 삼키지 못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째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는가. 허유는 백신현에게 일격을 허용한 시점에서 고찰을 끝마쳤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반복 작업은 인간의 몸과 정신을 변화시킨다. 그 사실은 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보이드의 기억에 의하면 백신현이 천변무궁류를 접한 건 불과 1년 전.
육체와 정신을 천변무궁류에 특화 시키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보이드의 지식이 불가능한 일이라며 소리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좁은 시각에서 바라본 결론에 불과하다.
허유는 모른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1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무를 수행한 햇수가 아니다. 같은 기간을 수련하더라도 수련의 밀도와 난이도에 따라서 무의 습득률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백신현이 살아온 1년은 어떠하였는가.
'지독한'
백신현은 속으로 조용히 곱씹었다.
'정말로 지독한 1년이었다'
오랜 삶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이제껏 살아온 나날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1년이었다.
수십 번 피를 쏟고, 수백 번 바닥을 굴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천 번이 넘는 선택을 거듭해왔다.
그 중 한 번이라도 실수가 있었다면 백신현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1년을 지나왔다.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바닥을 뒹굴고, 팔과 다리가 골절이 되고, 패배의 눈물을 삼키고, 다시 일어서서 검을 휘두르고.
그 모든 고통에 의미가 있었다.
보이드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식을 초월한, 극한까지 압축된 전투 경험.
그것이 백신현의 1년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1년이라도 백신현의 1년은 차원이 다르다.
높은 밀도로 꽉꽉 뭉친 전투 경험이 그를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말도 안 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보이드의 상식, 그리고 허유의 인식이 흔적도 없이 부서져 내린다.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유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자리에 백신현은 없다. 그는 허유의 등뒤로 소리 없이 돌아 들어가 있었다.
배후를 점한 백신현을 인식한 순간 허유의 전신에 날카로운 자국이 난도질하듯이 새겨진다.
실제로 입은 상처는 크지 않다. 이 정도의 상처는 호흡 한 번으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격은 육체의 손상 이상으로 허유의 정신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인간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 차원에 기거하는 그에게 있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충격이 크다.
그 결과 정상적인 상태라면 얼마든지 회피할 수 있는 공격에도 유효타를 허용하고 있었다.
"오아아아아아아아아!!"
백신현의 칼 끝에서 무수히 많은 광탄이 쏟아져 내린다. 그 숫자는 수백만. 하나 하나의 형태는 날카로운 송곳이다.
계산 능력을 상실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백신현의 천변무궁류가 달라졌다.
안정성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출력과 속도는 오히려 늘었다. 그리고 커다란 일체감이 느껴진다.
백신현과 천변무궁류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가 사라지고, 무예가 오체에 딱 맞는 옷처럼 달라 붙었다.
천변무궁류의 흐름은 좀 더 자연스럽게 변했다.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크게 단축되었다.
하지만 이조차 허유에게 있어 방어불가능한 수준으로 까다로운 공격은 아니었다.
출력은 여전히 허유가 우위에 서 있다.
그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 파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마력과 육체가 그의 의지를 쫓아오지 못한다. 허유가 침착함을 잃어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허유가 눈을 크게 뜨고 광탄 사이의 빈틈을 찾아냈다. 아니, 그것을 빈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개미 새끼 하나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틈이다. 하지만 허유는 통과한다. 속도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몸이 한 줄기 빛이 되어서 좁디 좁은 틈을 그대로 뚫고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허유의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서 열어 놓은 빈틈이었다. 허유가 틈을 뚫고 나간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허유의 오른팔이 칼에 찢겨 날아갔다.
"너……, 이 자식……!!"
이 또한 허유가 판단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허유는 강하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도 허유의 힘에 버금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유의 강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막대한 양의 마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진 그는 비등한 수준의 마력을 가진 적과 맞서 싸우는 법을 모른다.
전체적인 전력에서 허유가 앞서 있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그가 밀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집약되어 있었다.
절대적인 강자의 입장에서 벌레를 찍어 눌러왔던 허유와 약자의 입장에서 온갖 종류의 강자를 쓰러트려온 백신현.
양자의 출력이 비등한 영역에 도달한 지금, 두 존재가 걸어온 나날이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지표가 되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허유가 포효한 순간 절단된 단면에서 그의 오른팔이 다시 뿜어져 나왔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팔이 하나 날아가는 정도의 손상은 그다지 큰 부상이 아니다. 그가 보유한 마력은 무한에 가깝다. 그 마력을 통한 육체 재생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입은 손상은 크다.
제 실력만 발휘해도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었을 공격이었다.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허유의 사지가 한 호흡에 절단되었다. 빠르게 재생했지만, 그 순간 허유의 머리통이 세로로 쪼개지고 있었다.
재생보다 파괴가 빠르다.
이 충격이 허유의 본체에 손상을 입히지는 못하겠지만 그를 품고 있는 그릇이 파괴되면 허유도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없다.
아니, 그런 건 상관 없다.
묵직하게 쌓여가는 충격 속에서 허유의 자존심이 조금씩 파괴되어 간다.
이 싸움은 허유에게 있어 잃을 것이 없는 싸움이다.
설령 보이드의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허유의 본체에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
이길 수 없다면, 포기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인간을 상대로 한 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허유의 정신에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손상이 발생할 것이다.
허유가 다시 한 번 포효한다. 그의 배후로 거인의 모습이 떠오르고, 허유의 육체는 거인의 몸통 안쪽에 스며들었다.
거인의 입과 허유의 입이 동시에 벌어진다.
그것은 소위 사자후라고 불리는 기술이었다.
둘의 포효가 공명하면서 위력과 범위를 늘렸다. 백신현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서 높은 천공으로 밀려 올라간다.
하지만 피해는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허유에게 필요한 건 무너진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허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허유가 고개를 든다.
하늘 높이 떠오른 백신현이 무수히 분열하였다.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물량이었다.
무수히 많은 숫자로 분열한 백신현에 의해 하늘이 가려졌다.
천변무궁류?????
제사검?四?
삼렬성三??
검왕검이 흑색으로 빛난다. 그것은 사용자가 지나간 자리에 질량이 있는 잔상을 발생시켜서 분열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보이드의 조력에 의해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많다. 코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가용할 수 있는 출력의 한계가 늘어난 것이 이유였다.
지금의 이 기술은 삼렬성이 아니라 삼천렬성三??? 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무수히 많은 백신현이 동시에 허유를 향해 달려 들었다.
거인 속에 수납된 허유가 검을 휘두른다. 그 순간 거인의 손에도 칼이 생겼다. 거인의 칼이 횡섬을 그으면서 수십 명 가까이 되는 백신현을 쓸어 버렸다.
하지만 수십을 쓸어도 아직 수천이 남아있다. 수천의 백신현이 허유의 머리 위로 쏟아져서 거인의 전신을 후려친다.
공격이 쌓일 때마다 허유를 보호하던 거인의 표면에 균열이 달린다. 허유는 파손된 부위를 인지하고 힘을 주어서 재생했다.
그 위로 다시 한 번 백신현이 쏟아진다.
허유는 힘을 주어서 공격을 버티는 한편, 거인의 팔을 휘둘러서 무수히 많은 숫자로 분열한 백신현을 걷어냈다. 허유가 왼손을 콱 틀어쥐어서 주먹을 만든다. 말아쥔 손에 마력이 모여서 날카로운 직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동시에 거인의 왼팔에도 칼이 생겨났다. 좌우에 하나씩 칼을 든 거인이 수천의 백신현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그 뿐만 아니다. 거인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허유 또한 백신현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백신현 역시 마찬가지.
양자의 공격에 속도와 무게가 더해진다.
"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의 포효가 겹쳐졌다.
거인의 검이 한 번 움직이고, 백신현이 검왕검을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산이 깎이고, 대지가 움푹 들어가서 계곡이 되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백신현이 무수한 잔상에 의해 분열한 것처럼 보였듯이.
거인의 양팔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속된 움직임은 검을 쥔 팔을 수백 개로 늘려 놓았다.
천수관음이 이러한 모습일까.
수천의 팔이, 수천의 백신현을 모조리 지워 없앴다.
허유의 시선이 움직인다. 거인의 시선 또한 시간차를 두지 않고 함께 움직였다.
질량이 있는 잔상이 모두 사라진 끝에 백신현 하나만이 남았다. 거인의 양팔이 동시에 움직인다. 공중에 떠 있는 백신현을 향한 횡섬.
격돌 직전, 검왕검이 크게 부풀어오른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 하지만 그 크기와 두께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된다.
잘못 휘두르면 오히려 백신현 쪽이 검에 끌려갈 것 같다.
쿵!! 거대화된 검왕검이 거인의 검을 받아낸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공중이었지만 천지자연의 모든 마력이 백신현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래도 밀린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전신의 골격이 떨린다.
"크……"
닫힌 이빨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고통에 패배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이겨내고 움직여야 한다. 삐걱이는 골격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검왕검을 틀어쥔 오른팔이 높이 들렸다.
사방천지에 흩어져 있던 검은색 마력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변무궁류의 제사검에 의해서 발생한 잔상이었다.
허유에 의해 찢어져서 형태는 무너졌지만, 마력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높이 들어올린 검왕검에 모인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에 의해서 거대화되어 있던 검왕검의 색이 변한다.
그 색은 검은색.
공교롭게도 보이드가 태생부터 보유하고 있던 마력의 색채와 동일했다.
천변무궁류의 제사검은 보이드의 조력에 의해서 탄생한 기술이다.
검왕검의 색이 검은색으로 변한 이유도 이와 같았다.
으득!! 백신현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넓게 펼쳐져 있던 마력의 칼날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
허유의 눈에 크게 뜨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백신현의 칼끝에 걸려 있는 무예는 허유가 가지고 있는 필살 초식과 거의 동일한 무예였음으로.
허유의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보이드가 천천히 눈을 뜬다.
그 무예에 의식을 빼앗기고 말았다.
"수라??……"
백신현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초식의 이름이 흘러 나온다. 하지만 그 이름은 허유의 기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 기술의 뿌리에 있는 건 보이드의 무예이지만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다. 보이드의 기술을 천변무궁류를 통해서 재현하고 개량시킨 무예이니까.
가장 중요한 공방에서 보이드의 기술을 선택했다. 하지만 백신현이 생각하기에 이 국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기술은 보이드의 무예였다.
보이드는 쓰레기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은 수준이 높았다.
그가 자기 자신의 무예를 믿을 수 있었다면.
검왕검을 향한 집착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무예를 갈고 닦는 길을 선택했다면.
보이드는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이것이다.
가장 중요한 국면을 앞에 두고 백신현은 천변무궁류가 아닌 보이드의 기술을 선택했다.
천변무궁류의 원리로 재구성한 보이드의 기술을 앞에 두고 백신현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수라??……, 파마검???……!!"
칼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검은색이었다. 백신현은 검왕검을 등뒤로 크게 젓힌 상태에서 마력을 분사해서 추진력을 얻었다.
멀어졌던 허유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빠르다……!'
허유는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추었다. 거인의 두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추진력을 얻어서 돌진하는 백신현을 측면에서 쌍검으로 후려친다.
충분한 추진력을 얻은 백신현이 마력의 분사를 멈추고 허유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거인의 쌍검을 향해 검왕검을 내려 찍는다.
검은색으로 색을 바꾼 검왕검이 쌍검에 접촉한 순간, 쌍검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갈라졌다. 쌍검을 세로로 찢은 후, 그것을 쥐고 있던 두 팔까지 단숨에 찢는다.
"……!!"
허유의 눈이 크게 뜨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색 마력에 거인과 허유가 통째로 삼켜졌다.
"……."
쿠구구구구구구구!! 백신현은 검을 내려 찍은 자세 그대로 지면에 내려섰다. 사용한 기술을 천천히 수습하면서 검게 칠해져 있던 칼끝이 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지면을 크게 파헤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을 만들었다.
"하아……, 하아……!!"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신현이 고개를 돌린다. 분노와 함께 발해진 마력이 모래 먼지를 모조리 날려 버렸다.
모래 먼지가 걷힌 자리에는 허유가 상반신을 굽힌 자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몸상태는 아니었다.
전신이 타들어간 탓에 피부 가죽이 벗겨져서 내부의 근육과 골격, 혈관이 노출되었고, 상반신의 경우 오른팔이 뿌리부터 뽑혀 나가서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의해 소사?死한 시신이 저런 모양일까.
허유 또한 한계에 도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꺼풀이 모조리 날아가서 안구만 남았다. 그 안구에서 피눈물이 뚝뚝 흐른다.
허유의 턱근육이 흉악하게 움직였다.
그의 이빨이 입술이 날아간 자리를 물어뜯는다.
"건방 떨지 마라……, 인간!!"
피를 뚝뚝 흘리며 허유가 마력을 끌어 올린다. 분쇄되었던 육체가 빠르게 아물어간다.
하지만 이때, 백신현이 꿰뚫어본 건 그 몸뚱이가 아니었다.
허유가 시선을 높이 치켜든 그 순간 보이드의 육체에서 검은색 마력이 뿜어져 나와서 하늘로 솟았다.
뿜어져 나온 마력은 명확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길게 찢어진 눈과 입술. 그것은 전설 속에 나오는 악마의 모습과 닮았다.
악마의 얼굴이 하늘로 솟았다. 그것과 동시에 의복까지 완전히 재생된 허유의 육체가 지면 위로 쓰러졌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허유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건 보이드였다.
지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로 솟아오른 그것은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던 허유의 의식이었으니까.
혼이 빠진 껍데기가 지면 위에 꼬꾸라진다. 백신현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천공에는 악마의 얼굴이 떠 있었다.
* * *
"하아……! 하아……!!"
루이스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감싸쥔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는 세우고 다른 한쪽은 쭉 편 자세다. 루이스의 마력은 완전히 소모되어서 생명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용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쓰러진 스텔라가 있다. 그녀 또한 마력과 체력을 완전히 소모한 끝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카우우우……"
파비아가 바닥에 쓰러진 허유의 분신을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개과 수인의 힘을 발현시킨 파비아는 양손에 마력을 휘어감은 상태다. 흰 마력을 휘어감은 오른손이 분신의 가슴팍을 세게 눌러서 부숴버렸다.
허유의 분신은 강적이었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이쪽이 앞선 상태였다. 그 이점을 살려서 분신을 조금씩 몰아부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지금 막 도착한 마그누스의 힘이 더해져서 피해 없이 쓰러트릴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참전한 탓에 마그누스는 다른 세 사람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다.
분신을 쓰러트려도 본체를 무찌를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백신현의 승패에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괴로움이 느껴졌다.
"크?!"
그때, 갑자기 파비아가 고개를 높이 들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루이스와 스텔라, 마그누스의 시선도 함께 들렸다.
검게 물든 천공에 얼굴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아니, 얼굴 뿐만이 아니다. 얼굴, 목, 어깨, 몸통, 팔.
명확하게 윤곽이 잡히지 않는, 검은색 마력으로 칠해진 거인 같은 것이 하늘에 떠 있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크기였다. 지금 마그누스의 눈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하늘 모두에 거인의 육체가 존재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거지……?'
마그누스가 보기에, 그 존재는 구름보다 더 높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원근감을 잡았다. 그 거인 같은 존재는 어쩌면 이 세계의 바깥에서 이 세계를 굽어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음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윽?!"
마그누스의 상반신이 갑작스럽게 굽어졌다. 갑작스럽게 그의 양눈이 불에 타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가웠다. 그것과 비슷한 현상이 루이스와 스텔라에게도 발생했다. 눈이 아팠다.
바늘을 가지고 두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다.
유일하게 눈을 감지 않은 건 파비아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는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나타났다."
파비아의 눈이 빛난다.
그것은 사냥꾼의 시선을 닮아 있었다.
* * *
"……."
같은 시각.
연금술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상태였다.
그녀의 곁에는 올리비아와 얼마 전 제피로스에 파견되었던 일개 대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연금술사가 성에서 내려온 것과 동시에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올리비아는 대대에 소속되어 있는 인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모두 대피소로 이동시킨 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현장까지 동행했다.
그녀 또한 1급 모험가다. 어디 가서 걸리적거리는 전력은 아니다.
올리비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나서 연금술사가 고개를 돌린다.
"너희들은."
"신현 씨의 싸움에 휘말려서 저 멀리까지 밀려 나간 상태였소."
신기하게도 무리에는 요하네스와 스페트로까지 섞여 있었다. 전투의 충격에 떠밀려 멀리 나가 떨어진 그들을 대대의 사람들이 찾아내서 회수한 것 같았다.
연금술사의 품에 안겨 있는 샤를로트에 올리비아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가 쭈뻣거리는 태도로 질문했다.
"제가 아가씨를 안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올리비아를 향한 증오심이 특히 큰 사람이다. 올리비아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연금술사 앞에 있으면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진다.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
"감사합니다."
연금술사는 올리비아의 우려와 다르게 샤를로트를 가벼운 태도로 넘겨 주었다.
지금 올리비아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연금술사는 알고 있을까.
그때 연금술사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고개 숙여!!"
그 외침에 올리비아는 물론, 대대장까지도 움찔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연금술사가 다시 한 번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에 있는 '저걸' 바라보면 안 돼! 수준 이하의 인간은 미쳐 버릴지도 몰라!"
"선생님, 그건 도대체 무슨……?"
올리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은 얼굴로 올리비아가 시선을 돌린다. 비명 소리가 들린 위치에서는 대대의 군인이 피눈물을 흘리며 눈을 쥐어 뜯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연금술사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특급 수준이라면 모를까, 너희들 수준으로는 미쳐 버릴 거야!!"
연금술사의 외침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들은 상황을 이제야 이해했다.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예외는 오직 세 사람.
요하네스와 스페트로, 특급의 영역에 도달해 있는 두 초인과 연금술사 뿐이었다.
세 사람의 눈이 크게 뜨인다. 하늘 저편에 떠 있는 거대한 존재의 입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빛과 열기처럼 어마어마한 거리를 넘어서 전해졌다. 연금술사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품 안의 샤를로트를 세게 안은 채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설령 두 팔이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샤를로트를 내려 놓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올리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가……, 멸망 하려는 건가……?"
* * *
눈이 따가웠다.
손으로 눈을 비비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지만, 나는 조용히 따가움을 참아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구름 저편, 어쩌면 이 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대한 존재를 바라본다.
검은 실루엣, 뿔이 두 개 달려있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싫어도 악마의 형상을 떠오르게 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것이 바로 허유의 본체라는 사실을.
『검주, 최종 단계입니다.』
검왕검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눈치챘는데, 백신아는 더 이상 내 코어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백신아가 달라 붙어 있던 내 코어는 지금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서 휴면 상태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붙어 있던 대상이 사라진 지금, 백신아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허유가 결국 본체로 나타났군요. 검주에게 밀린 것이 분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스스로 벌이고 있는 거예요.』
허유 또한 큰 대가를 치르고 저지른 행동이다.
놈과 같은 바깥에서 온 존재들은 함부로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런 리스크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어기고 본체로 이 세계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대가는 허유에게도 매우 크게 적용될 것이다.
그때 허유의 입이 벌어졌다. 그 입에 마력이 모이고 있다.
거대한 마력.
허유의 목적을 바로 눈치챘다. 마력을 집중시킨 후 나를 향해 단숨에 쏘아 보낼 생각이다.
나는 천지자연에 모인 마력을 피부로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네.』
매우 간결한 그 대답에서 큰 힘이 느껴졌다.
『지금, 검주의 손 안에 있는 힘은 검왕의 힘입니다. 천하무적의 힘이 검주의 손 안에 있어요. 그 힘으로 하지 못할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왕의 힘이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빌려 쓰게 되었던 천하제일인의 힘.
그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힘이었다. 어마어마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 힘을 향한 동경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거대한 힘.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나 자신의 힘으로 지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백신아의 대답은 이번에도 간결했다.
『검주는 검왕을 뛰어 넘을 사람이니까.』
"……."
눈을 감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뜬다.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천지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의 존재를 인식했다. 코어의 기능은 정지했지만 마력을 느끼는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쓸 수 있다.
천변무궁류로 싸울 수 있다.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을 칼끝에 집중시킨다.
천변무궁류?????
절기??
일식필살검一?必??
『핏자국 하나 남겨 두지 않겠다, 인간!!!!』
허유의 입이 열린다.
열린 입에서 이 세상을 멸할 수 있는 힘이 쏟아졌다.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 백신현은 검을 휘두른다.
"초신성???."
천변무궁류의 일식필살검이 구름 너머의 존재를 향해 날았다.
* * *
빛이 달린다.
초신성은 발사와 동시에 발사 지점에 존재하는 지면을 증발시켰다.
만일 그것의 방향이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했더라면, 이 세상을 멸하는 것은 허유의 광선이 아니라 천변무궁류의 일식필살검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멸할 수 있는 두 개의 거대한 힘이 하늘과 땅에서 각자 하나씩 발사 되었다.
서로를 멸하기 위해서 쏘아진 두 개의 섬광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에서 격돌했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충돌 지점의 공간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가며 하늘이 극채색으로 덧칠 되었다.
또한 충돌 지점을 기점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편이 무수히 발생했다.
요하네스와 스페트로는 눈에 강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차원이 절단된거야……."
지금의 현상을 이해하고 있는 건 학자인 연금술사 뿐이었다.
스페트로와 요하네스의 시선이 동시에 연금술사를 향해 움직인다.
"3차원을 자르면 2차원이 되잖아. 그것과 마찬가지야. 3차원 너머에 있는 초고차원의 영역에 간섭하고 파괴했기 때문에……, 그 부서진 단면이 괴상한 형태의 도형으로 발생하고 있어……"
연금술사는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연금술사는 자신의 상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마법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많은 영역을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마법과 과학의 발전에는 끝이 없다. 연금술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로 정복할 수 있을까?
모든 상식과 과학을 부정하는 듯한 초현실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학! 학! 학! 학!!"
루이스는 달리고 있었다. 몸은 고통스럽고 눈은 따갑다. 하지만 지금은 그 통증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저 달려 나갔다.
빛과 빛이 충돌하는 지점을 바라보면서.
"큭……, 으으으으윽……"
코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아니, 코 뿐만이 아니라 눈, 코, 귀, 입, 얼굴에 존재하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력의 피드백이 뇌를 괴롭힌다. 뇌에 드릴을 대고 돌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미소를 그리고 있다.
허유는 확실히 강하다.
그 본체의 존재감에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줄 세웠을 때, 허유는 틀림없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최상위권의 포식자일 것이다.
지금, 백신현이 초신성을 통해서 막아내고 있는 공격은 지상에 접하는 순간 이 세계에 커다란 바람 구멍을 뚫어 놓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이 이 손 안에 있다.
부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헉───, 허유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런 소리는 실제로 없었고 그저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르지만.
빛과 빛이 충돌한 그 지점.
힘의 균형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허유의 입에서 발사 되었던 마력이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었다. 하지만 검왕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향해 계속 날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허유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달려나간 빛은 허유의 머리를 비롯한 상반신을 흔적도 없이 분쇄했음으로.
손끝으로 느낌이 전해져 온다.
허유의 최후를 이 손끝으로 확인했다.
머리를 잃은 허유가 끝에서부터 천천히 분해되어 가는 것이 보인다.
"……."
검왕검에서 뿜어져 나왔던 빛은 허유를 분쇄한 후 점점 희미해졌다.
탈력감이 느껴진다.
힘이 쭉 빠진 나는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소모된 상태였다.
검왕검을 쥔 오른손이 축 늘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니, 쓰러지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그 정도로 크게 지쳐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체력을 힘겹게 쥐어 짜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신아야, 우리가 해냈어."
그런데 대답이 없다.
검왕검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눈을 찌푸린채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백신아?"
그 순간 검왕검의 표면에 균열이 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