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5. 신역?? (9)
* * *
연금술사가 기침 소리를 토해냈다.
"콜록."
그녀는 품에 샤를로트를 안고 있었다.
연금술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해체 작업 끝에 샤를로트의 몸은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다. 의식은 없었지만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조그만 몸뚱이에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샤를로트를 수정 속에서 꺼낸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갑자기 머리 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성이 통째로 무너지는 소리였다.
도대체 최상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연금술사는 진상을 알지 못한 채 샤를로트를 급하게 감싸 안았다.
연금술사는 큰 부상을 각오했지만 머리 위에 잔해가 조금 쏟아진 걸 제외하면 피해는 없다.
성이 붕괴하기 직전, 마그누스가 검을 휘둘러서 잔해 대부분을 걷어낸 덕이었다.
연금술사는 품에 샤를로트를 안은 채 마그누스를 돌아 보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났어. 그러니까……, 그쪽은 이제 루이스와 파비아가 싸우고 있는 쪽으로 가 줘. 이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괜찮겠냐?"
"괜찮아. 어차피 지금의 그쪽 실력으로 신현이의 싸움에 끼어들긴 어려워. 그럼 다른 쪽이라도 도와 주는 게 맞아."
무예의 관점에 있어 연금술사는 생초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외한인 연금술사조차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했다.
마그누스가 백신현의 싸움에 합류하더라도 승부에 유의미한 변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그누스가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서 발버둥치더라도 그들의 영역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싸우고 있는 건 백신현 뿐만이 아니다. 루이스와 파비아 또한 다른 위치에서 허유의 분신과 검을 맞대고 있다.
신과 같은 두 존재의 충돌에 의해 안과 밖을 가르는 결계는 산산조각으로 파괴된 상태였다.
결계가 파괴되고 이동이 자유로워진 지금, 마그누스의 힘은 좀 더 제대로된 곳에 쓰여야 한다.
전투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연금술사조차 이해하고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이치였다.
마그누스는 초일류의 무술가였다. 연금술사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그누스를 고민하게 하는 건 연금술사의 안전이다.
연금술사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벌어진다면 마그누스는 이 싸움이 끝난 후 백신현에게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
진지한 고민이었다. 백신현은 마그누스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하고 있었지만, 연금술사를 향한 애정에 비하면 전혀 대단치 않은 감정이다.
백신현의 인간관계에는 차등이 존재했고, 마그누스는 연금술사와 비교했을 때 우선도가 무척 낮았다.
이것은 마그누스가 평가한 백신현의 성격과는 맞지 않아 보였지만, 아끼는 사람을 상실하는 경험은 사람의 가치관을 크게 바꿔놓는 법이다.
연금술사의 상실이 백신현의 가치관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
"어서, 가."
하지만 그녀는 고민에 빠진 마그누스를 빠르게 재촉했다.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이었다. 초인들의 시간 감각 속에서 1초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마그누스가 실제로 고민에 빠져 있던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그 대신 너도 절대 죽지 마라. 난 싸움에서 이겨놓고 신현이에게 살해 당하는 꼴은 질색이니까."
"응. 그럴게."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인 그때, 마그누스는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힘의 차이가 지나치게 큰 탓에 다소 부족해보일 뿐, 마그누스 역시 초인의 반열에 서 있는 남자이니까.
마그누스의 뒷모습을 일별한 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축 늘어진 샤를로트의 몸뚱이는 그녀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신장이었다. 하지만 무게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다. 연금술사에게도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샤를로트를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연금술사의 체구도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양새가 조금 우습다. 마력의 도움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불안정하다.
"……."
그때,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연금술사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달궈진 주전자에 손을 대면 반사적으로 손을 떼어내게 되는 것처럼, 날카롭고 뜨거운 마력이 연금술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연금술사의 코어 또한 조금 전부터 열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따끔따끔한 통증 역시 느껴지곤 한다.
백신현과 연금술사의 코어는 거의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탓에 지금처럼 서로 피드백이 오고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고통에 신음한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결착의 순간은 머지 않았다.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허유는 어느 산맥의 중간 지점에 꽂혀 있었다.
그가 밀려 나면서 발생한 충격파는 대지를 깎아내고 그 자리를 황무지로 만들었다. 허유가 지나온 자리에는 잡초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검왕검은 허유의 방어를 부수고 그의 오른쪽 어깨에 꽂혔다.
이것이 그 결과였다. 허유의 오른쪽 어깨를 비롯한 우반신은 곤죽이 되어서 분쇄 되었고, 지금 그의 머리와 허리는 당겨진 비닐봉투처럼 너덜너덜한 좌반신에 의해 간신히 이어진 상태였다.
검왕검은 허유의 몸을 뚫고 나아간 뒤, 산맥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신현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검왕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손짓한 순간 검왕검은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백신현의 오른손으로 돌아왔다.
검왕검과 백신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끈이 살아 있는 이상 둘은 따로 떨어져도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기어검술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인간의 몸과 검이 하나로 이어진 상태.
진정한 신검합일???一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후……, 후후…….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쿵!! 산맥에 꽂혀 있던 허유의 육체가 정체 모를 추진력에 의해서 솟아 올랐다.
산산조각으로 갈려 나갔던 우반신이 찰나지간에 재생된다.
육체, 그리고 걸치고 있던 의복, 파괴되었던 검까지도.
'역시'
놀랄 일은 아니었다. 허유가 보유한 규격 외의 마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법칙을 향해 조소를 던진다.
말라 비틀어진 노인에 불과했던 스페트로의 육체에 간섭해서 지금의 젊은 몸으로 바꾼 것 또한 허유의 능력이다.
'아예 몸뚱이를 갈갈이 찢어버리거나 내부에 존재하는 허유의 혼 그 자체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어'
공략법은 수립되었다. 하지만 백신현에게는 시간 제한이 존재한다. 언제까지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을지 그 자신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조급해지는 것도 좋지 않지만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도 좋지 않다.
매 순간 순간에 온힘을 다한다.
온힘을 다해서 달려 나간다.
"역시 보통이 아니로군. 아니, 사실 출력으로 따지면 아직도 내 쪽이 조금 더 위일 것이다. 하지만 출력의 차이가 좁혀지면서 그대의 기술과 전투 감각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거야. 그렇지?"
그런데 이 순간, 백신현은 허유의 등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자세를 고친 허유의 등뒤로 거인의 형상이 보인다. 인간을 닮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 차이가 있다.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까운, 마치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털이 수북한 악마의 모습이…… 허유의 등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건 도대체 뭐지? 그 존재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흐릿했지만 틀림없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눈이 따끔따끔했다. 직시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격상의 존재라는 의미일까.
어쩌면 저것이 허유의 본체일지도 모른다.
머나먼 차원에 존재하는 본체를 일부 끌어와서 휘두르고 있는 것일까.
삼 개월은 모두에게 평등한 형태로 주어졌다.
백신현이 준비를 한 만큼, 허유 역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등뒤로 나타난 거인의 몸통 속에 허유의 육체가 파묻혀간다. 이윽고 허유의 육체는 거인의 내부에 완전히 수납되었다.
그 거대한 존재는 허유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차는 없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두 개의 육체는 모두 허유의 것이었다.
크기는 늘었지만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회피하는 것도 방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격.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단순한 움직임이었음에도 회피하는 난이도가 무시무시했다.
백신현은 크게 뛰어서 허유의 공격 범위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허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허유의 등뒤에 존재하는 거인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그 칼끝이 지면에 꽂혔다.
칼끝이 대지에 꽂힌 순간 참격이 발생했다.
"……!!"
그 순간 조금 전과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칼끝은 순식간에 흑백의 영역에 도달한 뒤, 그 흑백의 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파괴 활동을 벌였다.
흑백의 세계가 깨어지면서 유리 조각 같은 파편이 흩어진다.
한 번 파괴된 공간은 벌어진 틈을 수복하기 위해서 빠르게 모여들었다. 백신현의 몸이 보이지 않는 인력에 끌려간다.
하지만 백신현은 그 흐름에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한다고 뿌리칠 수 있는 인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항하는 대신 그 흐름에 올라타서 오히려 역이용할 궁리를 품었다.
바닥에 꽂힌 검은 상당히 길고 두꺼웠다. 사람 하나가 올라서서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백신현은 바닥에 꽂힌 검을 세게 밟으며 달려 나갔다. 파괴된 공간이 수복되면서 발생한 인력이 백신현의 발끝에 더더욱 속도를 더한다.
쾅!! 거인의 칼을 세게 걷어차며 뛰어 오른다. 거인의 안쪽, 몸통 내부에 허유가 존재한다.
검왕검으로 거인의 몸통을 세게 후려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감촉도 특이했다.
조금 전까지 펼쳐져 있던 사중결계를 전신에 두르고 있는 듯하다. 검을 쥔 손을 통해서 감촉이 전해진다.
작정하고 힘을 주면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거인은 백신현이 상정한 수준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나의 실패는 곧 허유의 반격으로 이어졌다.
거인의 눈이 빛난다. 그 색은 금빛이었다. 두 개의 안광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른다.
안광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안광은 어마어마한 열기와 빛을 동반했다.
광신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고열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져 빠르게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지면은 한 순간에 부글부글 끓는 용암으로 변형되었다.
팟, 팟, 팟, 팟. 백신현은 공중에서 발판 없이 몇 번씩 궤도를 틀었다. 눈에서 터져 나온 광선에 피탄 당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눈에서 터져 나온 광선은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이면서 백신현의 뒤를 쫓았지만 그의 속도는 광선보다 빨랐다. 광선이 도달하는 것보다 빠르게 공격 범위를 벗어난다.
소모전은 위험하다. 시간 제한이 걸려 있는 건 이쪽이니까. 허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놈이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에너지를 한 번에 때려박을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 당장 쓸 수 있는 몇 가지 수가 떠오른다. 고민은 없었다. 여러 개의 선택지 속에서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이 높은 수단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
그런데 이때, 허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절대적인 방어력을 가진 거인의 몸통이 문처럼 좌우로 젓혀졌다. 허유는 그 안에서 나와 거인의 왼쪽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절대적인 방어력을 가진 갑옷을 포기하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의도를 눈치채기도 전에 불현듯 거인의 상반신이 뒤로 젓혀졌다. 왼팔은 크게 당겨져서 발사 직전의 투석기처럼 보였다.
거인이 전신을 크게 휘두르며 허유를 내던졌다. 표적은 백신현이었다. 거인은 상당히 정밀한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는지 궤도에 오차는 없었다.
허유는 검을 앞으로 내지른 자세였다. 백신현의 몸통을 관통하기 위한 찌르기의 형태다.
백신현은 허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공격을 함부로 받아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방어가 아니라 회피에 나섰다.
빠르긴 하지만 궤도 자체는 단순했다. 제대로 집중해서 보면 얼마든지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백신현이 상대해야 하는 건 허유 본체 뿐만이 아니었다. 허유와 따로 떨어진 탓인지 거인은 허유와 전혀 다른 독자적인 움직임으로 공격에 나섰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선이 백신현의 이동 경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내게 검을 맞추는 것이 목적인가?'
그 움직임에서 백신현은 수상함을 느꼈다. 거인의 눈에서 쏘아진 광선은 맞추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즉, 광선은 미끼.
광선으로 백신현의 이동 경로를 제한시킨 후 찌르기를 명중시키는 것이 허유의 목적으로 보였다.
이유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허유의 의도가 어느 정도 파악된 지금, 백신현은 최대한 허유의 의도를 벗어나는 형태로 움직여야 한다.
움직일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몸을 움직인 후 검왕검으로 허유의 찌르기를 튕겨 내었다. 위력은 높았지만 쳐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에 힘을 주어서 허유를 밀어낸다.
"불안하지?"
그때, 허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몇 번 부딪쳐보니까 그대의 성격을 알 것 같아. 두뇌의 회전이 빠른 데다가 상당히 신중해서 적으로 돌리면 상당히 성가신 상대지."
무척 빨라서 제대로 알아 듣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일반인은 아예 듣지도 못할 것이고, 특급 수준의 실력자라도 그저 잡음처럼 들릴 것이다.
허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이 자리에서 단 두 사람 뿐.
백신현과 백신아밖에 없다.
"지금, 그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무리 내가 전투에 문외한이라지만 정말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싸움에 나섰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숨겨진 의도가 존재할 것이라고."
허유의 말은 백신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고민을 정확히 짚어 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고민은 누구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민이다.
온갖 계략과 변수로 점철되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실전인데, 지금 허유가 보인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정직했다. 속임수도 함정도 보이지 않는다.
백신현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허유에게는 틀림없이 속임수가 존재한다.
그것을 백신현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대의 생각이 맞아. 내겐 속셈이 있어."
"……!!"
"쭉 신경 쓰였거든."
허유가 이죽거렸다.
"그대가 휘두르는 기술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야.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원하는대로 제어하는 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거든. 난이도와 계통을 따져보면 오히려 우리들의 기술에 가까워……."
그 말을 들은 순간 백신현은 또 다시 연금술사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천변무궁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이다.
천변무궁류의 기술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천지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 입자 하나 하나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혹시 이 세상에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신, 혹은 악마밖에 없을 거라고.
"그런데 너는 그 기술을 인간인 채로 다루고 있다. 이건 아무리 고민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 그리고 나는 이 점에 주목해서 가설을 하나 생각해냈어. 어쩌면 지금 네가 휘두르고 있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능케하는 계산 능력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그대에게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정곡이다.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때 백신현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그의 말처럼 천변무궁류와 그것을 다루는 계산 능력은 백신현 자신의 힘이 아니다.
과거, 검은 검사와의 맞대결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검왕검은 높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력이 부족한 사람을 사용자로 선택한다.
백신현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였다.
조건을 만족하는 사용자가 나타났을 때, 검왕검은 천변무궁류를 지도하는 가상 인격과 천변무궁류를 다루는 데 필요한 계산 능력을 그에게 부여한다.
허유의 짐작은 거의 사실이었다.
천변무궁류를 제어하는 능력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다.
"이 가설을 떠올렸을 때, 이 허유는 생각했다. 네가 그 검술을 휘두르는 원동력이 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서 부여 받은 능력이라면……, 내가 외부에서 그 능력을 떼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
그 순간 백신현도 허유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너무 늦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완전히 상정 외의 상황이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허유의 검지 손가락이 백신현의 머리로 향한다. 그것이 물리적인 공격이었다면 그도 얼마든지 회피하거나 튕겨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공격은 그러한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다.
곧게 뻗은 검지 끝에서 빛이 날아갔다.
차라리 그것이 물리적인 공격이었다면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월적인 마력을 획득한 현재의 백신현은 방어 능력 또한 크게 높아진 상태다. 마력에 의해 강화된 신체는 미간에 칼이 꽂히더라도 쉽게 뚫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백신현의 내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약점을 노린 교묘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극……!!"
피가 터져 나온다.
눈, 코, 입, 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이 동시에 고장난 것 같았다. 안면의 칠공 모두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온다.
자멸의 시작이었다.
* * *
비슷한 예로 광증에 시달리는 요하네스를 들 수 있겠다.
인간의 두뇌에는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한계를 넘어선 지식이나 현상을 목격했을 때 두뇌는 둘 중 하나의 말로에 도달하게 된다.
광증에 빠지거나, 혹은 자멸하거나.
지금 백신현의 육체에 발생한 현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했다.
원래 백신현의 두뇌와 검왕검이 부여한 계산 능력은 처음부터 별개의 존재였다.
설령 계산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그것이 백신현의 붕괴로 이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신현은 천변무궁류의 계산 능력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지식을 상당수 보유한 상태였다.
요하네스를 광증에 빠지게 한 상위 절학의 구결이나, 허유의 이름을 알고, 그 본체를 직시한 기억, 지식.
보통 사람은 오래 전에 미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두뇌 속에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미치지 않았던 것은 검왕검으로부터 부여된 계산 능력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산 능력이 하루아침에 소실된 지금, 백신현에게 그 지식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뇌 속에 쌓아올린 지식은 폭주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코어에도 영향을 끼쳤다.
"꽤 즐거웠었지? 타인의 힘을 빌려서 싸워온 나날들은."
"……, 커헉!!"
주화입마?火?? 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안면의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상반신을 기역자로 굽히면서 몸을 바들바들 떤다.
허유의 눈으로 보기에, 백신현은 굳이 그가 손을 댈 것도 없어 보였다.
가만히 놔두어도 생명의 등불은 순식간에 사그라들 것이다.
허유의 내면 깊은 곳에 처박힌 스페트로의 자아가 이렇게 말한다. 저대로 내버려두라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것이 백신현에게 걸맞는 죽음이라고.
그러나 고민 끝에 허유는 스페트로의 자아를 누르고 검을 들었다.
"이대로 죽게 놔두는 것도 좋지만, 그대는 권태로 점철되어 있던 내 삶에서 오랜만에 재미있는 즐길거리를 주었네. 내게 즐거움을 준 보답으로서……, 그대에게 아름다운 죽음을 선사하고 싶군."
허유가 고개를 돌린다. 표적은 백신현의 목. 허유는 깔끔하게, 그리고 고통 없이 백신현의 목을 절단할 생각이었다.
주화입마의 쇼크로 백신현은 더 이상 하늘에 떠 있지도 못했다.
중력에 붙잡혀서 그대로 낙하 중이다. 하지만 허유의 시선으로 보면 그 정도 추락 속도는 정지해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허유의 검이 백신현의 목에 파고든다.
그런데 그때 바로 눈앞에 있던 백신현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검은 허공을 찢었다.
"……………………………………, 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허유의 판단이 한 순간 늦어졌다.
백신현이 파고든 건 그 짧은 빈틈이었다.
허유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춘 백신현은 순식간에 허유의 등뒤로 돌아 들어가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검을 세 번 휘둘렀다. 허유의 어깨, 오른쪽 옆구리, 등허리에 차례로 칼자국이 내달리고 벌어진 틈새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뭐지?"
이때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오히려 회피 및 반격에 성공한 백신현 쪽이었다.
허유에 의해서 천변무궁류의 계산 능력을 빼앗긴 직후 주화입마가 발생했고 백신현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허유의 공격을 회피하고 반격까지 성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그는 제일 먼저 백신아를 찾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어째서……?!"
백신현도, 검왕검의 가상 인격조차 이해하지 못한 현상이다.
허유에게는 더더욱 이해불가한 현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혹시.'
허유의 등뒤로 돌아 들어가 있던 백신현이 빠르게 몸을 돌린다.
지금 필요한 천변무궁류의 기술을 머릿속으로 그린 순간,계산식이 머릿속에서 부드럽게 완성되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조금 전과 비교해서 계산식이 조금 더 단순하게 변한 것 같다. 군더더기가 사라지고……, 쓸모 있는 부분만 남겨진 것 같은……?
위화감은 느껴지는데, 그 위화감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건 마치.
'마치……'
보조바퀴를 떼어낸 것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