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25. 신역?? (8)
* * *
남극의 한파 속에 알몸으로 뛰어든 기분이다.
거대한 힘이 전신에 충만하게 차오른다. 코어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치가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기 중의 마력을 제어하는 능력 또한 강화 되었다.
아?와 비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대기 중의 마력이 곧 나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 되었다.
무학의 최종단계라 불리는 천지교태의 경지였다.
절대적인 영역을 나는 온갖 편법과 천변무궁류의 특성을 이용해서 일시적으로 도달했다.
하지만 달성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힘은 큰 중독성을 지닌다. 나 또한 힘의 노예였다. 수행으로 점철된 나날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거대한 힘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충족감이었다.
전신에 흐르는 힘의 크기로 따지면 지금의 나는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 강화된 상태였다. 그러난 나는 그 힘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지나치게 거대한 힘에 짓눌려서,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지금의 나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었다. 이 힘을 조금이라도 잘못 취급하는 순간 거대한 마력은 허유가 아니라 나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에서 충족감은 찾을 수 없었다. 충족감이고 나발이고, 지금 느껴지는 건 불안한 감정 뿐이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나도 불안정한 탓에 오히려 허유를 향한 공포는 크게 줄어 들었다.
지금 나는, 허유보다도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자기 자신의 마력이 더 무섭다.
"……."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는 코어를 보이지 않는 손이 콱 틀어쥔 상태로 제어하고 있다.
검왕검에서 뿜어져 나온 손은 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감은 느껴진다. 칼날 부분에서 시작된 손은 내 오른팔을 뱀처럼 휘어감으며 올라온 뒤, 내 심장 바로 옆에 존재하는 무형의 기관을 붙잡았다.
과연 이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상태가 끝이 났을 때 나는 도대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천천히 고개를 내저였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내일의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또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 내일은 오늘을 넘어선 끝에 존재한다는 것.
오늘을 이겨내지 못하면 내일도 오지 않는다.
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린 그 순간, 천지자연의 모든 마력이 칼끝에 모여드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나 혼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그 거대한 마력을 백신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제어한다.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 혼자서 다룰 수 없는 힘이다. 백신아 역시 마찬가지.
나와 백신아, 두 사람의 힘을 합친 끝에 비로소 다룰 수 있는 힘이다.
대기 중의 마력에 색이 입혀진다. 그 색은 녹색이었다. 대기 중의 마력이 나의 마력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콜록."
피를 한 차례 토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 * *
"……윽."
요하네스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의 그는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불과 몇 초 동안의 전투로 이 꼴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트로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창은 꺾여 있고, 한쪽밖에 없는 팔이 피투성이로 망가져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인들을 힘의 서열로 늘어 놓았을 때, 요하네스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보지 못한 고수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양지에 드러난 고수 중 요하네스보다 확실히 강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스페트로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의 육체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그 특성상 양지의 고수로 꼽을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실력은 지금의 요하네스와도 엇비슷한 수준이다.
인간의 육체로 도달할 수 있는 힘의 한계에 도달한 두 초인이 힘을 합쳐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불과 10초를 버텨내지 아니하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난생 처음일지도 모른다.
무력함을 느낀 것은.
"……."
끝장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허유의 시선이 갑자기 움직였다.
도대체 뭐지? 요하네스는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해소되었다.
거대한, 그리고 아주 환한 빛이 느껴졌다. 그 색은 녹색이었다. 칙칙하지는 않고 높은 명도를 가진 밝은 녹색이다.
빛의 기둥이 끝을 모르고 솟아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고밀도로 집중된 끝에 기둥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고밀도의 마력 덩어리였다.
고밀도로 뭉친 마력은 방대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열기까지 동반했다. 요하네스는 순간적으로 눈과 피부에 따끔함을 느꼈다. 마치 직사광선을 눈으로 쏘인 듯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빛이 솟아오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어도 0.1초를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 빛은 때때로 그 자리에 잔상을 남긴다. 요하네스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요하네스는 불현듯 달칵 하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지금의 소리는……, 대체……?'
요하네스와 거의 같은 순간, 스페트로 또한 그 소리를 들었다.
달칵.
서로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런데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맞물려서 돌아가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감지된다.
그러나 스페트로가 그 소리를 들은 건 아주 짧은 찰나지간의 한 순간에 불과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들은 소리가 정말로 들린 소리였는지, 단순한 환청이었는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빛의 기둥이 차차 사그라든다. 그러나 천지자연에는 녹색 마력 입자가 분분히 부유하고 있었다. 녹색, 백신현의 색이다.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마력이 강제적으로 백신현의 마력에 귀속되어 가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든 검왕검의 검신이 바들바들 떨린다. 검왕검의 강도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양의 마력이 검신을 안팍으로 압박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검도, 육체도.'
이 점은 스페트로 역시 명확한 해답을 낼 수 없었다.
다루고 있는 힘이 너무나도 크다. 어쩌면, 허유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백신현이 움직인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때, 백신현의 속도는 이미 흑백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스페트로와 요하네스 같은 극한의 초인조차도 간신히 쫓아가는 것이 한계인 초음속의 세계.
그리고 세 걸음 째.
스페트로와 요하네스는 다음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했다.
속도가 극한에 달한 끝에 나타난 흑백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다시 넘어선 속도의 영역.
과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결과만이 존재했다.
다음 순간 백신현의 오른쪽 다리가 허유를 관통했다. 발끝을 송곳처럼 세워서 내지른 발차기가 정확히 머리가 있는 위치를 노렸다.
"……!!"
요하네스가 헛숨을 삼킨다. 하지만 허유의 머리가 날아간 것처럼 보인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허유는 급하게 상반신을 굽혀서 아슬아슬하게 발차기를 피했다.
공격을 회피한 후 곧바로 반격에 들어간다. 오른쪽 다리를 내지른 자세로 공중에 뜬 백신현을 노리는 찌르기.
요하네스는 이때도 중간 과정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빛줄기가 내달린다 싶더니, 이미 백신현의 머리총이 관통되어 있었다.
그 또한 요하네스가 잘못 본 것이었다. 백신현은 공중에서 몸을 틀어서 찌르기를 유연하게 회피했다. 잔상이 남은 형태로 보아,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육체를 아주 조금 옆으로 비켜 놓은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사이에 백신현은 수십 바퀴를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회전이 한 바퀴 더해질 때마다 칼끝에 힘이 더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한 번씩 헛친 상황이다.
쿵!! 허유가 바닥을 세게 내딛는다. 그가 처음으로 검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의 영역에 도달한 탓에 지금의 백신현은 흑백으로 보였다. 허유도 마찬가지였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 번 가속한다.
양자의 검이 지금 이 순간 충돌했다.
그때 요하네스는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것을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애초에 소리가 쫓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요하네스의 귓전에 스친 소리도. 사실 진짜 소리가 아니라 지나치게 자극이 센 눈앞의 광경에 그의 감각이 혼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도저히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귀를 괴롭힌다.
콰직! 콰직콰직콰직콰직!!
그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서로의 검이 서로를 부수는 소리? 그런 건 아니었다. 양측의 검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력을 머금은 결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한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서로의 육체가 파괴되는 소리였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무기도 육체도 아니었다.
그런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검이 서로 부딪친 충돌 지점에서 들렸다.
양자의 속도가 극한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 결과 발생한 흑백의 세계. 그것이 다시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쨍강! 쨍강! 쨍강! 쨍강! 흑백의 세계가 충돌 지점에서부터 유리창처럼 깨어져 나간다.
흑백의 세계가 부서진 끝에 요하네스는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차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모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인간의 뇌가 가지고 있는 성능을 시험하고 있는 듯한 가혹함.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그리고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찌기 광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의 경지가 조금이라도 낮았을 경우, 요하네스의 삶은 여기에서 끝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큭……!"
정확히 같은 순간, 스페트로 또한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하나 밖에 없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다.
그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파괴되어 곤죽으로 변해 있었지만 한 순간 그 사실을 잊고 몸을 움직이게 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상하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태양빛을 직접 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안구가 타들어가는 듯했다.
초월적인 경지.
신의 영역이란 이런 것인가.
격에 맞지 않는 거대한 힘을 목격한 결과, 두 초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뇌 안쪽에서 뾰족한 가시처럼 솟아 올라온다.
콰직!!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차원이 흩어진다. 유리 조각처럼 보이는 그것은 세계가 파괴되면서 발생한 흔적이었다.
요하네스는 도대체 저것이 어떠한 원리로 발생한 현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충분한 여유를 두고 분석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조차 잘 되지 않았다.
부서진 세계는 손실된 부분을 회복하기 위해서 급격하게 수축되었다.
그 직후에는 크게 팽창하면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공기도, 구름도, 성도, 그리고 사람마저도.
"헉……!!"
요하네스와 스페트로는 그 충격파를 피하지 못했다. 몸이 그 자리에서 붕 떠오른 뒤 음속의 수십 배를 초월한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모든 것을 평등하게 쓸어버린 충격 속에서 흔들림 없이 위치를 유지한 존재가 둘 있었다.
충격파가 발생한 격돌 지점에서 검을 맞댄 두 신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발판은 없다. 지금의 충격에 의해 성의 2/3 가량이 벌레에게 파먹힌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발판의 유무 같은 것은 두 신과 같은 존재에게 의미가 없다.
천지자연의 모든 마력이 그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추진력은 필요 하지 않았다. 대기 중의 마력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자유로웠다.
검을 맞댄 상태에서 허유의 반격이 시작된다. 검은색, 거대한 마력이 그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구잡이로 쏘아지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등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뒤,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서 백신현을 향해 쏟아진다. 그 하나 하나의 굵기는 저마다 제각각으로, 가느다란 것과 굵은 것의 차이가 극명하였다. 얇은 것은 불과 수십 센티에 불과했지만 굵은 것은 수십 미터에 이른다.
수백 가닥으로 갈라진 검은 마력은 저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커다란 것이 백신현의 도주 경로를 가로막고 가느다란 것이 숨통을 끊는다. 숫자도 많을 뿐더라 가느다란 것은 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회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검은 마력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그때마다 발생하는 잔상은 그 자리에 상당히 오랫동안 남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범위에 검은 마력이 존재했다. 마치 하늘의 색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듯한 기분이다.
일일이 쳐내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다. 그렇게 판단한 것일까. 백신현의 몸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단순한 초고속 이동이었지만 궤적을 살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흡사 공간을 도려내면서 이동한 것처럼 느껴졌다.
백신현은 수십 킬로미터 뒤에 존재하는 지면에 미끄러지듯이 착지했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한 지금의 백신현에게 물리 법칙은 있으나 마나한 상태였다. 가속과 감속은 자유자재이며, 관성조차 그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없다.
허유는 백신현을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추적했다. 그의 등에서는 여전히 검은 마력이 분사되고 있었다.
수백 가닥으로 분열된 마력이 채찍처럼 백신현을 향해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허유는 쉴 새 없이 검을 움직였다.
그 자리에 서 있는 허유는 하나 뿐이지만, 그 자리에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한 허유가 무수하게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신 술식의 응용 같은 건 아니었다. 검을 연속해서 휘두르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탓에 발생하는 눈의 착각이었다.
쏟아지는 무수한 마력, 그리고 참격. 그 하나 하나가 대기를 찢고, 지면을 파괴하며 그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쓸어 버렸지만 백신현에게는 그 무엇 하나 스치지도 않았다.
허유의 공격 속에서 백신현은 회피 자세와 방어 자세를 번갈아서 취했다. 그러나 허유의 공격과 백신현의 자세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회피 자세를 취한 백신현의 허리를 허유의 검이 지나치고, 방어 자세를 취한 백신현의 머리 위로 검은 채찍이 쏟아진다. 하지만 공격이 끝났을 때, 백신현의 육체에는 상처가 없다. 모조리 피하고 막아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허유와 비슷한 이유였다. 방어와 회피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탓에 벌어지는 착각. 보이는 움직임과 현실의 움직임이 어긋나면서 발생한 오류이다.
쏟아지는 공격 속을 춤추듯이 누빈다. 그 동안 허유의 검과 마력은 수도 없이 백신현의 육체를 분쇄했지만 유효타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마치 신기루를 향해 휘두른 것처럼.
수많은 잔상이 겹쳐진 그 속에서 백신현의 본체는 가장 아래에 존재했다. 거의 바닥에 밀착하다시피 자세를 깊이 낮추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거침없이 휘두른다.
캉!! 허유의 검에 검왕검이 꽂혔다. 하지만 허유의 몸은 한 순간 들썩였을 뿐,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 백신현의 육체 위로 수많은 잔상이 겹쳐진다. 첫 번째 공격에서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이, 그리고 그 두 번째 공격에서 또 다시 시간차를 두지 않고 세 번째 공격이 꽂힌다.
공격이 연쇄된다. 한두 번의 공격으로 허유의 자세를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횟수를 늘려서 도전한다. 공격이 끝나기 전에 다음 공격에, 그리고 그 공격이 끝나기 전에 또 다시 한 번 더.
내려베기를 시작으로 대각베기와 올려베기, 그리고 찌르기까지.
검을 통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참격이 한 순간에 뿜어져 나온다. 그 횟수는 수만 회를 가볍게 넘어섰다.
"……!!"
퉁!! 허유의 자세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검을 쥔 허유의 오른손이 대각으로 크게 올라갔다.
몸이 비었다. 허유의 몸통에 백신현의 오른발이 꽂혔다. 허유의 상반신이 굽혀진다.
그의 몸은 그대로 결계 끝까지 쭉 날아갔다.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횡단하기까지는 단 한 순간의 시간조차 소요되지 않았다.
허유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결계의 끝까지는 수많은 나무와 언덕이 존재했지만 그 중 단 하나도 허유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쿵!! 허유가 등부터 결계에 꽂혔다. 충격에 결계가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흔들린다.
허유의 호흡이 흐트러진다. 일그러진 얼굴 위로 다시 한 번 백신현의 오른발이 꽂혔다. 쾅!! 결계가 뿌리부터 뽑혀 나갈 것처럼 시끄럽게 울린다.
백신현이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허유의 얼굴을 세게 밟으면서 도약했다. 다시 한 번 결계가 크게 울린다.
오른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백신현의 등 뒤에서 소용돌이가 불었다. 마력에 의해서 발생한 추진력이 그의 몸을 다시 한 번 허유를 향해 날려 보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찍었다. 허유도 이번에는 막아냈다. 등을 결계에 밀착시킨 상태로 전신에 힘을 주고 버틴다.
결계는 어느 정도의 신축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맞댄 허유가 밀려 나가자 모양이 타원형으로 변형되었다.
"흐읍!!"
허유의 입에서 처음으로 강한 소리가 들렸다. 타원형으로 변형된 결계가 원래 형태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허유가 힘을 주었다.
백신현의 몸은 그 자리에서 대각으로 수십 킬로미터를 밀려 나갔다. 구름을 몇 개씩 찢으면서 결계의 반대쪽 끝까지 날아간다.
순식간에 결계의 반대쪽에 다다랐다. 결계의 표면에 두 발을 붙인다. 그 상태에서 무릎을 굽힌 자세는 마치 도약 직전의 육상 동물을 닮아 있었다.
"하아아아아아앗!!"
무릎을 굽히고 하체와 허리에 힘을 준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서 도약했다. 콰직!! 그 충격에 의해 결계가 크게 흔들렸다. 삐걱거리면서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허유와 백신현이 다시 한 번 부딪친다.
그들의 참격은 부딪칠 때마다 최대 위력을 경신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격돌 지점의 공간이 파괴되어 나갔다.
시간을 길게 늘리고, 공간조차 파괴할 수 있는 충격이 발생했지만 서로의 검과 육체는 파괴되지 않았다.
허유가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백신현의 몸이 다시 한 번 결계의 반대쪽 끝까지 대각으로 날아갔다. 참격의 위력은 조금 전보다 더 강력했지만 허유는 조금 전보다 좀 더 쉽게 버텨내는 기색이었다.
놈은 아직 한계가 아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허유의 출력이 점점 상승하고 있다.
코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한계가 보이지 않는 힘을 획득했지만 출력은 여전히 허유 쪽이 위다. 전투 기술과 전투 감각에서 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간신히 호각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쪽도 길게 끌 여유가 없다. 백신현의 육체와 코어는 언제 기능이 다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대각으로 솟아오른 백신현이 결계의 끝에 도달했다. 백신현의 등이 결계에 닿은 순간 결계는 다시 한 번 신축성을 발휘해서 쭉 늘어났다.
검을 쥔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고개를 든다.
그 순간 백신현의 시선이 닿는 위치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원 형태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마법진이다.
그것이 다섯 개. 원형인 건 같았지만 내부에 새겨진 모양은 저마다 달랐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다섯 개의 마법진을 펼친 후 백신현은 칼끝을 허유를 향해 겨누었다.
"───."
백신현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인다. 의미 없는 잡담은 아니었다. 술식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주문이다.
과거, 스페트로가 평가했듯 백신현은 순수한 무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마법부터 암기, 체술, 함정까지.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전투 방식에 많은 강자들이 고생했다.
하지만 허유를 상대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온갖 수단이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보유한 출력의 차이가 지나치게 큰 탓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암기도, 체술도, 함정도, 허유를 상대로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검왕검에 의존하지 않으면 합 한 번 제대로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코어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백신현의 출력은 이제껏 없는 수준으로 크게 강화되어 있었다. 강화된 건 검술 뿐만이 아니다. 백신현의 신체 능력이나 마법 능력 역시 큰 폭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수단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천변무궁류?????……, 번외?外……"
지금의 기술은 천변무궁류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다.
천변무궁류의 위력이나 원리는 현 시대의 무학을 기준으로 잡아도 최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 나가 있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탄생한 무술인 탓에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현 시대의 무술보다 뒤떨어지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
그 점을 보완하는 것이 현 시대의 계승자인 백신현의 역할이다.
적을 향해 칼끝을 겨눈 상태에서 검왕검이 발사 되었다. 마치 탄환처럼 곧게 나아간다.
허유를 향한 경로에는 백신현이 앞서 펼쳐 두었던 마법진이 존재한다. 마법진과 칼끝이 접촉한 순간 갑작스럽게 검왕검의 속도가 빨라졌다.
정면에 펼쳐진 마법진의 개수는 다섯 개.
그리고 마법진을 하나 통과할 때마다 검왕검에 기하급수적으로 힘이 더해진다.
속도, 강도, 날카로움, 거기에다 속성까지.
마지막 다섯 번째 마법진을 통과한 순간 검왕검의 형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한 줄기 빛만이 남았다.
"허!!"
허유는 오른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왼쪽의 손바닥이 앞을 향하게 손을 든다. 그 순간 허유의 손바닥에서 발생한 마력이 그 자리에 수십 만 개의 결계를 빠르게 펼친다.
수십 만 개의 결계가 일렬로 늘어섰다. 한 장 한 장은 아주 얇은 결계이지만 그것이 수십 겹이 되자 수 킬로미터의 두께를 가지게 되었다.
가속의 끝에 한 줄기 빛으로 변해버린 검왕검과 수십만 겹의 결계가, 중심 지점에서 격돌했다.
결계를 겹칠수록 밀도는 높아지고 강도는 증가한다. 하지만 검왕검의 칼끝이 결계에 접한 그 순간 수십만 장의 결계는 빠른 속도로 분쇄되면서 바닥을 드러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각!! 수십만 장의 결계는 펼친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수많은 결계 중 살아남은 건 허유의 바로 앞에 존재하는 마지막 한 장 뿐.
검왕검은 마지막 한 장에 가로막혀서 아슬아슬하게 정지한 상태였다. 위력이 아주 조금 부족했다. 수 센티미터만 더 나아갔어도 검왕검은 허유의 목을 관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흐."
허유의 입꼬리가 느슨해진다. 이것이 실수였다.
검왕검을 쏘아 보낸 것과 거의 동시에 백신현 또한 날았다. 그 앞에는 다섯 장의 마법진이 존재한다. 검왕검이 통과했던 그 마법진이다.
검왕검이 통과했던 다섯 장의 마법진을 그 또한 스스로의 몸으로 뚫고 지나갔다.
가속한다. 가속한다. 가속한다.
다섯 장의 결계를 통과한 그때, 백신현의 몸은 검왕검과 마찬가지로 한 줄기의 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때 허유는 보았다.
결계에 꽂힌 검왕검과 백신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끈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끈이 연결되어 있는 한 둘은 떨어져 있어도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 당긴다.
이 경우, 결계에 꽂힌 검왕검이 저 멀리에서 백신현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쾅!! 결계에 의해 가로막힌 검왕검에 힘을 더하듯, 백신현의 오른쪽 발이 검왕검의 손잡이에 꽂힌다. 마치 못을 세게 후려치는 망치처럼.
공중에서 엉거주춤하게 멈춰 있던 검왕검에 다시 한 번 힘이 더해진다.
이윽고 마지막 결계마저 파괴되었다. 하지만 궤도가 살짝 빗나갔다.
검왕검이 꽂힌 부위는 허유의 목이 아니라 어깨. 그리고 허유는 어깨에 호신강기를 집중시켜서 검왕검의 압력을 버텨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허유의 몸이 뒤로 밀린다. 그의 등뒤에는 여전히 결계가 있다. 신축성이 있는 결계가 길게 늘어난다.
"오아아아아아아아앗!!!!"
포효와 함께 백신현이 다시 한 번 오른 다리에 힘을 주었다. 쩍!! 허유의 호신강기에 균열이 달린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다. 백신현이 오른 다리에 힘을 주었듯, 허유 역시 호신강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쩍! 또 다시 달린다. 허유는 재차 회복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회복이 늦었다. 쩍!! 호신강기의 재생이 조금 늦었다.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다시 한 번 균열이 달린다.
쩍!!
이때, 허유는 같은 소리가 등뒤에서도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뒤의 결계였다. 물리 결계 두 개와 마법 결계, 그리고 공간 왜곡 결계로 이루어진 네 겹짜리 결계는 허유의 역량 대부분을 집중해서 구축한 결계였다.
그 결계는 상당한 신축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결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파직!!
마치 번갯불이 튀는 것 같았다.
네 겹의 결계가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쩍!! 그 소리는 앞뒤에서 동시에 들렸다. 허유의 호신강기가 파괴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등을 기대고 있던 배후의 결계가 함께 파괴 되었다.
일부분이 파괴된 정도가 아니었다. 결계의 한쪽 면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허유의 결계는 더 이상 구조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결계가 부서진다. 호신강기가 파괴되면서 검왕검은 허유의 어깨에 꽂혔다.
허유의 육체는 그 자리에서 아득히 먼 거리를 일주했다.
대지를 갈아 엎고, 언덕을 분쇄하고, 산맥마저 관통하면서.
쿠구구구구구구구…….
이때.
둘의 싸움은 이제 막 1초가 경과했을 따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