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24. 합체 (9)
* * *
"란즈 가주……?"
요하네스가 의문을 가진다. 스페트로 가문을 둘러싼 사건에 깊이 연관되어 있던 다른 두 사람과 다르게 요하네스는 지금의 스페트로가 란즈 가주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그누스가 오른손을 들어서 요하네스의 입을 다물게 한다. 그는 나와 시선을 잠시 마주친 후, 스페트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건 란즈 가주가 아니다. 너와 네가 과거에 쓰러트렸던 템페스트……, 그 자의 정신 에너지가 란즈 가주에게 씌인 상태지."
"템페스트……, 그 남자가?"
"그래. 사실 그 템페스트조차 육체를 지배 당한 껍데기에 불과했어. 스페트로 가문의 핏줄 속에서 대대로 기생해온 존재. 나와 신현이는 편의상 스페트로라고 지칭하고 있지."
템페스트, 그 이름은 여기에 있는 제1위와 2위가 아직 미숙하던 시절에 맞붙었던 최강의 특급 모험가의 이름이다.
특급 모험가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겁을 저지른 템페스트를 체포하기 위해서 당시의 특급 모험가 대부분이 투입되었으며, 그는 체포된 후 제피로스 정신병원의 가장 깊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요하네스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에 불과하지만 마그누스와 스텔라, 그리고 나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전 최강의 특급 모험가, 템페스트조차도 육체를 빼앗긴 피해자에 불과했다.
템페스트의 육체가 감옥에 갇힌 채 다 늙어서 쓸 수 없게 되자, 스페트로는 란주 가주와 샤를로트의 육체를 노렸다.
그 야망을 저지하고 란즈 가주의 몸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반년 전에 있었던 스페트로 사건이다.
"……그대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군. 무슨 사건사고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오?"
요하네스는 대략적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몇 년 동안 특급 모험가의 정점에 군림하며 수많은 사건을 헤쳐나온 그가 보기에도 내 인생이 참 희한하게 보인 것 같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 이 꼬라지일까.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눈앞에 저 남자가 란즈 가주의 몸을 쓰고 있는 것이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착각하면 곤란하다. 이건 란즈도 동의한 문제거든. 나에게 몸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소리지."
"목소리는 란즈 가주가 맞는데…… 내용물이 다르군. 설마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이야."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 앉는다. 그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스페트로의 말이 맞는지 확인을 구하는 얼굴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트로 뿐만 아니라 올리비아의 증언도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떠한 거래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란즈 가주가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넘겨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수상하다. 란즈 가주는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개인감정을 접어둘 줄 아는 남자였다.
과거, 스페트로가 템페스트의 몸을 쓰고 있을 적에도 겉으로는 깎듯하게 대우하면서 속으로 칼을 품었으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트로를 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
스페트로도 허유 앞에서는 그냥 잡범이다.
스페트로 또한 내가 지금까지 싸워온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강적인데도 허유를 갖다 붙이는 순간 초라해진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너도 네 수련 하느라 바쁜 상황 아닌가?"
나는 허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뜩이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너덜너덜해서 피폐한 상황인데 왜 저 자식까지 튀어나와서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스페트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인다.
최대한 빠르게 어디로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네 말처럼 나도 혼자서 조용히 감각을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마력이 서로 부딪치는 게 느껴지더군. 오래된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인정하는 세 명의 무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스페트로의 시선이 차례로 요하네스와 마그누스, 그리고 나를 살핀다. 놈의 시선에 스텔라는 비치지 않는 것 같다. 스텔라는 혼자만 무시 당했다고 여겼는지, 치맛자락을 강하게 움켜쥐며 입술을 비틀었다.
"백신현은 내가 기대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무학을 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 그 다음에 존재하는 광기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
기가 막히게도, 스페트로는 나와 요하네스를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드물게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마치 사람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분위기라 기분이 더럽다.
"그런데 너희 두 사람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과거, 나와 맞서 싸웠던 시절의 너희는 패기가 흘러 넘치는 괜찮은 애송이들이었는데 그새 늙어서 아저씨가 다 되었구나."
마그누스의 표정이 사납게 비틀린다. 스페트로의 도발적인 언동에 고의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한다. 놈은 지금 우리의 신경을 긁기 위해서 저러는 게 아니다.
저 말은 스페트로의 솔직한 진심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두 남자도 스페트로와 악연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마그누스와 요하네스는 드물게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분노하고 있는 듯, 전신에서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른다.
고작해야 말 몇 마디로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을 분노하게 만든 스페트로도 인물은 인물이었다.
스페트로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돌아본다. 조금 전에 놈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조금 수상쩍었다.
내가 스페트로가 기대하던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는데,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너희도 무예의 길을 오래 걸은 만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합리적인 수행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합리적인 수행과 이성에 매몰되는 것만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아."
경지로 보았을 때, 지금의 스페트로는 틀림없이 나와 마그누스 이상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높은 곳에서 사람을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이 짜증난다.
하지만 이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트로와 대등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던 남자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요하네스는 스페트로의 말을 듣고 다소 숙고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스페트로는 다음과 같은 키워드로 내가 나아가야 하는 영역을 정의했다.
"광기.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광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행만으로는 남들과 차별화된 경지에 오를 수 없지."
"……."
요하네스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나온다. 무예의 궁극을 추구한 결과 광증에 휘말리게 된 그에게 있어, 스페트로가 제시한 광기라는 키워드는 그러려니하고 넘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합리적인 수련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지.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일이 잘못되어서 몸이 망가지고, 두 번 다시 무예를 수련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각오. 광기에 가까운 맹목이."
외팔이 스페트로가 검지로 내 얼굴을 가리킨다.
"지금, 이 남자는 무인이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앞에 두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질 수 있겠지만, 일이 잘 풀리면 지금까지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스페트로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 나왔으니까.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무리하면 내 육체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한계를 넘어서서 백신아가 제시한 불가능한 과제를 돌파할 수 있다면……, 내 안에서 뭔가가 달라질 것 같은 직감이 느껴졌다.
정신적 고통이 지나치게 큰 탓에 내 머리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같은 수행을 반복해도 백신아가 제시한 시련을 통과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대가가 필요하다.
어차피 나는 그때 샤를로트가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목숨이다.
대가를 바치는데 거리낌은 없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저 남자를 너무 지나치게 감싸려 하는군. 내가 보기에 지금 너희가 저 남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저 남자에게 실력이 앞질러질 테고, 두 번 다시 쫓아가지 못할 테니까."
스페트로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의 시선은 마그누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특히, 마그누스 너는 더더욱 그렇겠지."
"……."
제1위와 2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광기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요하네스가 광기의 영역에 어느 정도 들어서 있는데 비해, 마그누스는 전혀 그런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뭐……, 사정은 대충 짐작이 간다. 백신현은 20년 전의 그 애송이를 닮았으니까."
20년 전? 그 애송이?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20년 전이면 아직 내가 이 세계에 오기도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동시에 흥분했다. 저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스페트로의 한 마디가 세 명의 특급 모험가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건 틀림 없어 보였다.
"너, 이……!!"
마그누스가 특히 격하게 흥분했다. 금방이라도 스페트로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얼굴이다. 그런 그의 앞을 내가 가로 막았다.
나도 스페트로와 결판을 낼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마그누스와 스페트로가 부딪치면 어느 쪽도 성하지 못할 것이다.
마그누스의 앞에 서서 그를 가로 막는다. 그와 비슷한 체격인 내가 앞에 서자 그도 다소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스페트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이런 소리하면 조금 미친 놈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독한 고통 속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마치 뇌의 껍질이 열리고, 그 안에서 뭔가가 튀어 나오려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딴 식으로 자꾸 초를 칠 거면 저리 꺼져. 네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져서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그럴까."
스페트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돌린다.
"멋대로 끼어들어서 미안하다. 아직 어린 너는 잘 모르겠지만 20년 전의 저 두 사람은 아주 끝내주는 놈들이었거든. 그런데 그 대단하던 놈들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주 못난 늙은이로 전락해버려서……, 상당히 실망이 크다."
"타인의 육체에 기생하는 네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난……, 널 우리와 같은 무인으로 인정하지 않아."
지금의 문답으로 확신했다.
나와 스페트로는 허유를 둘러싼 문제가 정리된 후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와 스페트로는 지독할 정도로 서로 맞지 않다.
샤를로트는 나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저 지독한 놈을 세상에 풀어놓는 선택을 했다.
그 뒷수습은 나의 역할이다.
* * *
쫓는다, 쫓는다.
아직 머나먼 곳에 있는 백신아를 쫓는다.
백신아가 내게 시련을 제시하고 보름이 흘렀다. 이제 정말로 결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도 시련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껏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나아가야 너의 강함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가상 공간 속, 무수히 쏟아지는 칼날 속에서.
나는 한 줄기 빛을 찾아 달려 나갔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 왔지만 아직도 백신아가 제시한 기준을 만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발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백신아는 실력의 차이가 너무 큰 나머지 내가 전투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나는 패배와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그 순간을 데이터로 기록했다.
내가 패배한 기록을 눈에 보이는 수치로 남겨서, 내가 개선해야 하는 부분과 백신아의 부족한 점을 찾아낸다.
물론 쉽지 않았다. 패배를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나의 단점을 개선해 나간 결과 차이를 미세하게 줄일 수 있었지만, 백신아의 약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최강의 모험가들은 말했다.
이 세상에 무의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일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백신아, 넌 최고야."
그 한 마디엔 단 하나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진실한 마음이었다.
"스페트로도, 그리고 그 허유조차도…… 너라면 이길 수 있겠지. 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유일하게 '무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존재야."
"……."
백신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검을 아래에 두고 위로 빠르게 걷어 올린다. 지극히 단순한 경로였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움직임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페이크와 기묘한 원리가 스며들어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쥔 검이 산산히 부서져나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검은 파괴되었지만, 나는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얼마 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검의 파괴는 곧 나의 죽음. 나는 검이 파괴되는 순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여전히 불리한 상황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서 방황할 것 같았던 내게도 발전은 있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나의 정신에 이제껏 없던 큰 변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