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41화 (241/287)

〈 241화 〉 24. 합체 (7)

* * *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다. 눈코입 할 것 없이 혈관이 내부에서 손상된 상태라 물이 닿을 때마다 따끔따끔했다.

연금술사는 욕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가상 세계에서 무슨 일 있었어?"

"네, 뭐. 좀 있었죠."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가상 세계 속에서 겪은 통증이 환통의 형태로 전신에 아릿아릿하게 남아 있었다. 백신아의 말처럼 그 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면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 놀랐어. 하지만 잘못 손 대면 안될 거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 검왕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

듣자하니, 연금술사는 내가 가부좌를 틀고 가상 공간 속에 헤엄치는 동안 밤을 세워가며 루이스의 검을 만지고 있었던 것 같다.

루이스의 검은 제대로 된 성능 시험도 못하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니까.

허유와의 격전 속에서 부품이 파손되진 않았는지 각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제대로 한 번 살펴 볼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점검의 결과는 문제 없음. 루이스의 검은 허유와의 격전 속에서도 강도와 기능을 한결 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검왕검과 같은 다종다양한 기능은 없지만, 예리함과 강도에 있어서는 검왕검 이상이라 할 만하다.

연금술사는 점검이 끝난 루이스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 놓고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바퀴를 움직여서 내 쪽으로 드르륵 다가온다.

호기심을 느끼는 연금술사에게 내가 겪은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백신아는 내게 교육이 아니라 시련을 제시했고, 그 시련의 강도가 너무 높은 탓에 정신적으로 입은 충격이 육체에도 영향을 끼친 거라고.

"아, 신현아. 이마에서 피."

"또 피 나네요."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 엄지로 이마를 한 번 쓸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마가 살짝 깨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또한 가상 공간에서 입은 수많은 상처가 현실의 육체에 영향을 끼친 예시였다.

안 그래도 흉터가 좀 생긴 상태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상처가 나면 곤란하다.

나는 앞머리를 살짝 만져서 이마의 상처가 보이지 않게 했다.

연금술사는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고개를 돌려서 검왕검을 보았다.

"신아야."

평소에는 늘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던 백신아가 드물게도 대답이 없다. 그 다음에는 나도 한 번 불러 보았다. "야, 백신아" 하지만 검왕검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검왕검에 붙어있던 반투명한 백신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검왕검을 손에 쥐어본다. 검왕검의 기능은 살아 있는데, 왜 대답이 없을까.

검왕검을 손에 쥐고 잠시 이래저래 만져보던 중 나는 백신아가 휴면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왕검의 기능은 살아 있지만 의도적으로 외부의 접촉을 차단한 상태였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보아하니, 한 번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게 원인인 거 같아요. 검왕검이 부러졌을 때 이 녀석은 검왕검 내부에 존재하는 마력을 소모해서 움직였는데, 그거 때문에 기능부진에 빠진 게 아닐까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에 제약에 붙었다는 소리야?"

"아마도요."

검왕검이 부러진 바로 그 순간, 나는 아무리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검왕검이라도 이 정도의 손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느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검왕검은 무사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만전의 상태와는 거리가 있었다.

검왕검의 가상 공간 속에서 백신아가 했던 말을 새삼 떠올린다.

그때, 백신아는 마치 일부러 내가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놓은 것처럼 나왔지만…… 사실은 단순히 검왕검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찾아왔기 때문에 나를 쫓아냈던 게 아닐까.

내가 허유와의 싸움 이후 큰 후유증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백신아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게 아닐까.

가상 공간 속에서 내게 모질게 굴었던 것도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숨기고 나를 시련에 집중 시키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느껴졌던 위화감이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신아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가상 공간 속에서 이 녀석은 의도적으로 제 성질을 자꾸 긁어댔어요. 분노는 힘을 끌어낼 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감정이죠. 도발적인 언행이나 건방진 태도도 제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취한 액션일 가능성이 있어요."

실제로 나는 백신아의 의도대로 수 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뒹굴어 대면서도 의지를 꺼트리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녀석이 생각하는대로 유도된 느낌이라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하지만, 신아의 의도가 널 열 받게 해서 의욕을 불러 일으키려 하는 거라면……, 네가 의도를 눈치챈 시점에서 효과가 반감될 거 같은데. 신아가 연기한다는 걸 알아낸 시점에서 화를 내기 어려워질 거 같아."

"그렇겠죠."

내 성질을 긁어서 행동을 유도하려는 걸 알았으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느낌이 조금 달라지겠지.

"그건 결과적으로……, 네게 마이너스가 될 거 같은 느낌이. 의욕을 내기 어려울 거 아냐."

"아니예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흰 천으로 지혈했다. 가상 공간 속에서 겪어온 고통이 전신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 순간 전신의 흉터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다.

"분노가 힘을 끌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꼭 분노가 있어야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긍정적인 감정도 의욕을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죠.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 연기까지 하면서 제 의욕을 끌어 내려는 신아가 좀 기특하게 보이거든요."

아프다. 하지만 아프면서도, 오히려 나는 의욕이 넘쳐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인은 백신아의 행동이다. 금방 들킬 게 뻔한 연기로 내 투지를 불태우려고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기특하고 재미 있어서, 나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분노는 사람의 힘을 끌어내는 데 큰 효과가 있다. 하지만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건 분노 뿐만이 아니다.

백신아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나는 분노 이외의 다른 감정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녀석의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힘이 빠지려던 다리에 다시 한 번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사실 신아가 그러지 않아도 제 분노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의 나는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건 나 자신의 무력함과, 나 한 사람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이다.

일일이 백신아가 내 성질을 긁어댈 필요가 없었다.

나를 움직이는 분노는 상당히 끈질기고 강도 높은 것이라서 허유를 쓰러트리고 샤를로트를 되찾는 그 순간까지 결코 꺼지는 일 없이 계속 타오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마의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붕대를 감아서 막았다. 오늘 저녁까지는 아물겠지. 붕대를 감은 상처 부위에서 가려움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붕대 위로 상처를 자꾸 긁게 된다.

"신아는 휴면 상태니까, 오늘은 집에 놔두고 갈게요."

"오늘도 요하네스를 만나러 가는 거야?"

"네, 오늘부터 다시 수련을 재개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검왕검을 연금술사에게 주고 루이스의 검을 허리에 찬다. 모처럼 휴면 상태에 들어갔으니, 좀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쓰러지고 그러진 마."

"괜찮아요. 체력은 자신 있으니까."

주먹을 쥔 상태로 팔을 들었다. 연금술사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 번 웃고 말았다.

연금술사는 나가려던 나를 손짓으로 다가오게 한 다음, 내게 허리를 숙일 것을 요구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니 연금술사가 입술을 맞춰온다.

입술이 잠시 붙었다가 떨어진다. 연금술사가 시선을 맞췄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겠지. 열심히 해."

"네."

어차피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연금술사는 몇 마디 말로 나를 타박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를 응원하는 걸 선택했다.

그녀의 응원에 감사했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마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백신아는 분노를 통해서 내 힘을 끌어 내려 하였지만, 앞서 말했듯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분노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쓰러지려던 다리에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 * *

요하네스와는 늘 만나던 산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오늘은 쉬는 편이 낫지 않았겠소?"

그의 시선에서 걱정이 뚝뚝 떨어진다. 그에게까지 이런 소리를 듣는 걸 보면 내 안색이 안 좋기는 한 것 같다.

연금술사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죽은 건 아니라지만 가상 공간 속에서 겪은 죽음은 내 정신에 큰 데미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오히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어야 한다.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허유가 갑자기 샤를로트를 풀어주진 않을 테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소모할 필요가 있었다.

오른팔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때마다 어깨에서 소리가 들렸다. 뚜득, 뚜득, 뚜득, 소리가 기분 나쁘다.

"좀 쉬지 그랬냐. 병상에서 일어난지도 얼마 안 됐을 텐데."

"아이샤가 용케도 허락을 해주셨군요."

"쉰다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죠. 몸이 움직이는 한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까지는 요하네스와 둘이서 수행을 해 왔지만, 오늘부로 이 수련에 마그누스와 스텔라가 합류했다. 그들 역시 태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를 걱정하는 표정인 건 비슷했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더더욱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상 최강의 특급 모험가와, 그 뒤를 잇는 2위와 3위가 한 자리에 모인 상황이다. 그들과 함께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계기가 필요했다.

현 시점에서 나는 백신아의 시련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하나라도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가 아닌 나는,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쌓아 올려서 합리적인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방법밖에 모른다.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샤를로트가 그 자리에 남기고 간 후드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속의 장작에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못 말리겠구만."

세 사람 중 특히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마그누스는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루이스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그럼, 시작할……"

그 순간 내 코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내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세 사람의 분위기가 일제히 굳는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코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고 고개를 휘휘 저은 후 뽑다 말고 다시 집어 넣었던 루이스의 검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뽑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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