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4. 합체 (5)
* * *
흔들린다.
지금의 나는 검왕검 내부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 위에 서 있다. 상하전후좌우로 희게 뻗은, 새하얀 지평선.
한 가지 색으로 칠해진 탓에 다소 어지러운 느낌은 있었지만,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꽤 익숙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또 평소와 다른 분위기다. 공간 자체가 파도치듯이 흔들리고 있어서 상당히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비위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공간이 돌아가는 꼴만 보고 있어도 멀미를 하지 않을까 싶다.
고개를 돌린다. 백신아는 늘 서 있던 그 자리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긴 코트, 나부끼는 새하얀 머리카락.
오른손에는 검왕검을 쥐고 있다.
"오셨군요, 검주."
"그래."
백신아가 고개를 돌려서 옆얼굴을 내게 보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눈동자의 흰자 부분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다.
이유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백신아의 눈동자를 달라지게 하였는가.
내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기가 또 하나 늘었다.
흰자는 검은색이고 동공은 붉다. 밤중에 표적을 겨누는 레이저 포인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보기 좋지 않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마치 내 심장을 꿰뚫어 버릴 듯하다. 상당히 살벌하고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마치 백신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다.
조금 전에 백신아도 말했었지, 이제껏 가둬두었던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생각이라고.
이것이…… 백신아의 숨겨진 본질이라는 소리일까?
"조금 전 들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겠습니다."
이상하다.
백신아의 태도는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표정, 흘러나오는 목소리. 모두가 내가 알고 있는 백신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르다.
지금까지 녀석과 함께 지내온 세월이 내게 경고한다.
뭔가 다르다고.
"검주의 말씀대로, 강한 정신, 혼에 대한 판단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는 괴로운 순간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을 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괴로운 순간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을 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판단할 테니까요."
"맞아. 그래서 궁금한 거야. 네가 말하는 '강한 정신'은 도대체 어떠한 의미야? '강한 영혼'을 평가하는 기준은 뭐지?"
시선을 맞춘다.
그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나도 행동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추구하는 '강한 정신'이 백신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오른손에 검을 쥔 백신아가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내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원을 그린다.
"제가 요구하는 '강한 정신'이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코어에 간섭하는 그 순간 검주의 정신에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압박이 가해질 텐데, 검주는 그 압박을 계속 버티면서 싸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해요."
"끈기라."
"하지만 눈에 보이는 수치로 측정 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과 다르게, 정신적 능력은 평가 기준이 지극히 애매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검주에게 도전 과제를 하나 내드릴 생각이에요."
백신아가 나를 돌아본다. 녀석의 양쪽 눈 모두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공만이 붉은 색으로 빛난다.
"그 과제를 통과하면 네가 코어에 접속해도 버텨낼 수 있는 건가?"
"네, 그렇답니다. 이 과제를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제가 접속해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검을 쥔 오른손이 천천히 들린다. 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린 채 백신아가 내 얼굴을 노려본다.
쿵!! 바로 그 순간 흰 공간이 통째로 뒤흔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공격을 성공 시키면 합격입니다."
"뭐라고?"
"못 들으셨나요? 제게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 시키면 합격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게 제가 검주에게 드리는 과제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해졌다.
표정 관리에 성공한 건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얼굴 근육에 지나치게 힘을 준 탓인지 관자놀이의 혈관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진심으로 임할 생각이니까요. 이제까지의 소꿉장난과는 차원이 다를 거예요."
"소꿉장난……"
조용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타인에게 얕보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충격이 조금 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신아의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나와 백신아 사이에는 실제로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오히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 속에서 투지가 솟구쳐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맞서 싸워서 결과를 내고, 그 말을 다시 주워담게 만들고 싶다.
가슴 속에서 불이 확 일어난다.
"바로 시작하면 될까?"
"네. 언제든지 덤비셔도 상관 없어요. 하지만……"
허가가 떨어진 순간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달려 나갔다. 백신아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했지만 그런 건 내가 백신아에게 공격을 맞추고 나서 들어도 늦지 않다.
백신아는 제대로 된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바람처럼 달려 나가서 황룡직도의 태세로 검을 내려친다.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백신아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들어서 내 공격을 방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페이크, 백신아가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세게 내딛으며 방향을 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백신아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백신아의 등뒤를 점했다. 배후를 노린 가로 베기.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검이 부딪친다. 백신아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팔을 뒤로 돌려서 내 검을 받아냈다.
저런 불안정한 자세로는 힘을 제대로 주기도 어려울 텐데 도대체 어떠한 원리를 공격을 흘려 보낸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내가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방어 했다면 팔과 어깨가 한 번에 부서졌을 것이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실력의 차이를 느끼게 만든 한 수였다.
서로 검을 맞댄 상태로 힘을 주어도 밀리는 느낌이 없다. 팔꿈치가 아프진 않은 것일까. 팔꿈치가 부서지기 딱 좋은 자세였다.
"하지만 이런 살풍경한 공간에서 싸우는 것도 슬슬 질릴 때가 됐죠. 좀 더 무대를 화려하게 꾸며 볼까요?"
그 순간 내가 서 있던 하얀 대지가 파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대지에 색이 칠해지기 시작한다.
재봉틀로 흰 옷에 무늬를 새기는 것처럼, 새하얀 대지 위에 하나둘씩 새로운 풍경이 자아난다. 바닥에서 초목이 자라고 물이 솟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새하얀 하늘에 푸르른 색이 채워진다.
새하얀 가상 공간에 거대한 도시가 들어서기까지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것도 가능했었나?"
"그럴 리가요. 이제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허유에게 패배한 이후로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전체적으로 높아진 거죠."
캉!! 백신아가 불안정한 자세로 나의 검을 튕겨낸다.
새하얀 바탕 위에 백신아가 새롭게 쌓아올린 도시는 마치 수백 년 전의 세계 같다. 건물의 양식이나 배치 등이 지금과 비교해서 상당히 무르고 느슨하게 보인다.
"여기는 어디지?"
"모르겠어요. 마음 가는 대로 만들긴 했는데……, 제 어디에서 이러한 도시의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과거에 들렀던 도시인 걸까요?"
백신아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늘 하던 농담일까.
이제는 그조차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백신아는 비밀이 많은 존재였다. 내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친근한 사이라고 해도 비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으면 그것은 거짓된 사이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연금술사나 루이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성벽이 존재한다. 그녀들 또한 마찬가지다. 내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나와 그녀들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백신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로 흔들릴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백신아가 맞기는 한 건지.
지금까지 내게 보였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던 건지.
마치 다른 존재가 백신아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검왕검 내부의 가상 공간에 돌입하기 직전, 녀석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부터 이제껏 보지 못한 백신아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될 거라고.
그 말은 이러한 의미였을까.
나더러 충격 받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의 진의를 이제야 할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혼란까지 포함해서 '과제'인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굴 근육이 굳어서 침착하게 보이는 것뿐, 사실 꽤 격정적이고 불안정한 심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후우우우우……"
자, 집중하자.
여기가 어디고, 백신아가 어떠한 상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 뿐.
눈앞의 적을 베고 지나가는 것.
그 이외의 사실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두고, 눈앞의 상대만을 생각하자.
이 가상 공간 속에서 백신아는 나와 동일한 수준의 신체 능력과 마력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이제까지의 전투 중에서 가장 편한 조건으로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무술가로서 가지고 있는 기교나 심리전, 수 싸움에 있어서 백신아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변수를 창출해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승산은 절망적인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백신아가 내게 준 과제는 승리가 아니었다. 일격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된 공격을 명중 시키는 것.
아무리 실력의 차이가 크더라도……, 지금의 내 실력이라면 충분히……
핏.
"……아."
다음 순간, 갑작스레 내 시야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하지만 날아오른 것은 내 머리 뿐이었다. 몸뚱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목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말씀 드렸을 텐데요. 이제까지의 소꿉장난과는 다르다고."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조금 늦게 머리를 잃은 몸이 그 자리에 떨어진다.
재생은 그로부터 10초 뒤였다.
한 순간 단절되었던 의식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목에는 아직도 환통이 아릿아릿하게 남아있다. 통증에 몸서리를 치면서 쓰러진 몸을 일으킨다.
여기는 검왕검 속의 가상 공간, 아무리 심하게 부상을 입더라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설령 목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통증은 남는다.
한 번 전신을 스치고 지나간 죽음의 감각은 쉽사리 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흐트러진 호흡을 천천히 정리하며 백신아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까지는…… 설렁설렁 한 거였나?"
"설마요."
백신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전 언제나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검주의 수준에 맞춰서, 수행이 될 만한 수준으로 힘을 조절하고 있었죠."
녀석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미소로부터 허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코 닮아서는 안 되는 두 존재의 얼굴이 한 순간 겹쳐진다.
"난이도를 조절하는 건 매우 중요해요. 너무 낮추면 수행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높여 버리면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죠. 그래서 지금까지는 매우 공을 들여가며 검주의 수준에 맞춰 난이도를 조절해 왔습니다."
다음 순간, 이번에는 내 상반신이 쩍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순식간에 베였다.
나는 피웅덩이 속에서 죽음에 허덕이고 있었다.
볼 수도 없었고, 느끼지도 못했다.
신체 능력과 마력으로만 따지면 대등한 수준임에도 어째서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격의 차이가 나를 짓누른다.
"하지만 오늘은 달라요. 검주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 적당한 수준에서 난이도를 조절한 이제까지의 수련하곤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현재 검주의 수준에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과제입니다."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과제?"
"네, 검주가 이제껏 겪어온 그 어떤 시련보다도 가혹하고 괴로운 형태의 시련이 될 거예요. 애초에 이건……, 성공하라고 제시한 시련이 아니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성공하라고 만든 시련이 아니라면, 도대체 백신아는 이 시련을 제시함으로써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기 위해서 전신에 힘을 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세 번째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파괴되었던 육체가 몇 초의 대기 시간을 거쳐 다시 한 번 복구되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야?"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검주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백신아가 검을 휘두른다. 그 움직임에는 힘이 없어서, 마치 벌레를 쫓아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도, 받아내지도 못했다.
나는 그 자세에서 두 번의 죽음을 다시금 겪었다.
"크……, 악……!!"
"세상 일이라는 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은 존재합니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상반신이 앞으로 굽혀진다. 고통, 그리고 죽음을 거듭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탈력감이 나의 전신에서 일어설 힘을 빼앗아나갔다.
도저히 의식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태임에도 백신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지금 제가 검주에게 제시한 시련 또한 마찬가지. 이것은 지금의 검주가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신아의 목소리에 희미한 슬픔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보다시피, 지금의 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어째선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백신아가 쓰러진 내 앞으로 다가온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상 세계 속의 햇빛을 등진 탓에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다.
"절대로 해낼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 우리들 무술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제가 검주에게 제시하는 과제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