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24. 합체
* * *
연금술사는 내게 성의 존재를 확인시킨 후, 나를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백신아의 응급처치가 효과를 보아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지만, 아직 내게는 육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이 생기면 깨워줄게, 그때까지 쉬고 있어."
오늘의 그녀는 평소와 비교해서 상당히 태도가 부드러웠다.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는 귀중한 모습이다.
내가 심하게 다쳤을 때, 혹은 오랜 기간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고통 속을 헤메이고 있을 때, 그녀는 이따금씩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물론, 내가 무사히 회복을 끝마치고 나면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이전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간다. 나를 턱짓으로 부려먹으며, 걸핏하면 떼를 쓰는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쉽지 않네요."
그녀는 내게 휴식을 종용했지만, 나는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나의 육체는 지극히 피로한 상태였지만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지금의 패배는 괴로운 것이었다.
샤를로트를 되찾는 그 순간까지 내 마음에 평화는 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뜬다. 목뼈 골절은 물론 얼굴과 턱의 뼈에도 큰 손상을 입은 나는 머리에도 미라처럼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가 걸리적거리는 탓에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얼굴 형태가 망가지진 않을 거야. 하지만 우반신의 손상이 너무 심해서, 붕대를 풀고 나면 흉터가 좀 남을 수도 있어."
"그런가요."
"하지만 그건 내가 제거해줄 수 있어. 안 그래도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닌데, 흉터까지 남으면 더 못볼 꼴이 될 거야."
붕대를 감은 뺨 위로 연금술사가 손바닥을 가볍게 얹는다. 그녀의 조그만 체구와 앳된 얼굴에서 연상의 분위기가 풍겨온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평소에는 도대체 왜 그 모양 그 꼴일까.
나는 평생 지금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허유에게 내 목숨이 위협 당하던 그 순간보다도 더 심각한 패닉에 빠져 있었다.
눈을 감고 싶어도 감을 수가 없다.
연금술사도 그런 내 상태를 짐작했는지 한숨을 한 번 쉬고 내 이마에 손바닥을 얹는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네가 아니겠지. 네겐 무리한 요구였던 것 같아."
"천성이니까요, 이건."
"나도 알고 있어. 너하고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는 그다지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흡족해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나의 대답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로 들렸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혼내지 않으시네요."
"내가?"
"네. 제가 다치고 들어오면 늘 혼을 내셨잖아요."
내가 어디서 다치고 들어올 때면 그녀가 늘 부서진 몸을 고쳐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일을 좋아서 하는 건 아니다. 내 몸을 치료할 때마다 그녀는 그때마다 매번 "다음에도 이런 꼴로 돌아오면 고쳐주지 않을 거야" 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그 말을 아직 듣지 못한 것 같다.
이젠 그녀의 꾸중을 듣지 않으면 오히려 좀이 쑤실 지경이라 내가 먼저 말을 꺼내봤다.
"내가 널 그때마다 혼낸 건 맞지만, 이번 건으로 혼낼 생각은 없어."
"그런가요?"
"응, 넌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녀의 입에서 매우 드문 말이 나왔다. 아니, 연금술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연금술사는 내가 누운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뒤,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나한테 혼나야 하는 이유가 있어?"
"……그건."
"예를 들어 내가, 샤를로트에게 위험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알고 싸우러 간 너를 잘못했다고 책망하면."
"그때는 제가 선생님께 화를 내겠죠."
"그렇겠지."
연금술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연금술사가 그 어떤 표현으로 나를 책망하더라도 이해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양보할 수 없는 건 있다.
그때, 샤를로트를 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진 내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내가 연금술사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너 자신의 생존만이 목적이면 샤를로트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시하는 게 맞아.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네가 그런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넌 내 흥미를 끌지 못했을 거야. 그런 일반적인 인간을 조수로 받아 들여야 할 이유는 없지."
그녀가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로 붕대를 감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 통증을 살짝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 감각은 회복되어 있었다.
"오히려 네가 샤를로트를 포기했다면 나는 그런 네게 실망했을 거야."
"……그런가요."
"물론……, 이것도 네가 살아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네가 죽어서 돌아왔다면 틀림없이 지금처럼 입에 발린 말은 할 수 없었겠지."
연금술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어쩌면 그녀가 나를 심하게 혼내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오늘의 패배는 이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철저하게 패배했고, 어쩌면 오늘부로 내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온몸이 걸레짝이 되었지만, 살아 남은 채 그녀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연금술사는 그 사실에 만족했기 때문에 그 이상 나를 탓하지 않는 게 아닐까.
침대 위에 누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를 향해 연금술사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조그만 입술이 살짝 붙었다가 떨어진다.
실제로 입술이 붙어 있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감촉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해. 혼을 내는 건 다음 기회에."
"고마워요."
"아무리 나라도 지금의 널 혼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그런가.
연금술사 입장에서는 좀 불쾌했을 수도 있겠다.
"그것보다도 문제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녀석을 쓰러트리고 샤를로트를 되찾겠냐는 거야."
"전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코어의 기능을 완전해방 시켜서, 최대한 그 놈의 출력에 가까이 다가가는 수밖에 없죠."
원래는 백신아에게 몸을 넘겨서 준비하고, 내 차례가 돌아오면 코어의 기능을 해방시켜서 본격적으로 싸움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왕검이 부서지고 백신아의 기능이 봉인되면서 나의 전략은 시작부터 붕괴하고 말았다.
루이스의 검과 임기응변으로 맞서긴 했지만 한계는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때 스페트로가 샤를로트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허유의 본체도 아닌 분신에게 패배하고 말았을 거다.
허유와의 재대결은 나의 철저한 패배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단 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허유의 현재 전력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개월 전에 있었던 첫 대결, 그리고 어제의 2차전.
양쪽의 수치를 비교해서 한 달 뒤에 있을 3차전에서 허유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가늠한다.
충분히 승산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코어를 완전해방 시킬 경우 내가 실제로 전투 활동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는 건데.
어쩌면 좋을까.
차라리 내가 루이스의 검을 쥐고 백신아는 저 상태 그대로 전투에 참여해서 2대1로 밀어 붙이는 방법도 있나……?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백신아?"
고개를 돌린다. 침실의 구석에 검집에 들어간 검왕검의 모습이 보인다.
안개처럼 흐릿한 백신아가 검왕검의 손잡이를 쥔 상태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기억하세요? 그 녀석이 떠나기 전에, 제가 그 녀석에게 호언장담 했었잖아요. 한 달 안에 검주를 그 녀석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려 놓겠다고.」
"기억해."
피를 많이 흘려서 머리는 몽롱했지만, 그 기억은 잊지 않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검주, 전 불가능한 일은 입에 담지 않아요. 한 번 입에 담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검이랍니다.」
따로 생각한 방법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걸 위해서는 검주 역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현재 검주께서 가지고 있는 기량으로는 코어가 완전히 해방 되었을 때 그 출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휘둘릴 가능성이 너무 높아요.」
"확신이 있는 거야?"
「네. 어제의 패배는 제게도 쓰라린 것이었지만, 검왕검이 부서지는 과정에서 전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도 그 중 하나예요.」
백신아가 천천히 손을 쥐었다가 편다.
나는 물론이고 연금술사의 눈에도 백신아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가상 공간 속에서 수도 없이 마주쳐왔던, 흰 머리카락이 백신아가.
검왕검이 파괴되면서 달라진 변화였다.
그 싸움이 남긴 몇 안 되는 긍정적인 결과물 중 하나였다.
"너도 이제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됐잖아. 그럼 차라리 너와 내가 힘을 합쳐서 2대1로 덤비는 건 안 되나?"
그게 가능할 경우, 이 이상 효과적인 전략은 없다.
천변무궁류의 검사가 서로 힘을 합친다면 호흡을 맞춰서 천변무궁류의 속도와 위력을 훨씬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백신아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건 불가능하답니다.」
"어째서지?"
「어제, 그 녀석을 상대로 제가 직접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건 검왕검이 파손되면서 내부에 들어 있던 마력이 누수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누수된 마력을 추진력으로 삼아서 움직일 수 있었던 거죠.」
"진신내력 같은 건가?"
「네, 정확히 짚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검왕검이 수복될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생각이 없답니다. 검왕검의 마력을 잘못 낭비하면 저 자신의 존재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검왕검 그 자체의 마력이라.
인간의 진신내력은 수련을 통해서 쌓아올린 마력과는 다르게 한 번 소모하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한 진신내력을 사용한다 함은 수명을 불태워서 일시적으로 힘을 얻어내는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검왕검의 내부에 존재하는 마력이 인간의 진신내력과 같은 것이라면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다. 최악의 경우 검왕검의 가동 정지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나는 아직 백신아에게 배울 것이 없다.
그런 식으로 백신아를 잃을 수는 없다.
「검왕검이 자가수복을 통해서 완전히 고쳐지면, 전 다시 이 세상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거랍니다.」
"쉽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
「슬프지만 그게 인생이죠.」
백신아는 재미없는 농담으로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노력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든다.
「그래서 한 달 뒤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검주에게 제시하고 싶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요.」
"좋은 방법이 있는 거야?"
「네.」
백신아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검주가 합체를 하는 거예요.」
합……
뭐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