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23. 무? 그리고. (15)
* * *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검 속에 잠들어 있던 백신아가 스스로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반투명한 실루엣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 있었으니까.
허유가 사라진 자리에는 샤를로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수녀복의 후드만이 남아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나 대신, 백신아가 그 후드를 주워와서 내 손에 쥐어준다.
"……."
무력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런 감정조차 사치였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나는 아마 30분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우반신이 걸레짝이 되었고, 목뼈까지 부러졌다. 출혈의 양이 범상치 않았다. 지금의 내가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회광반조, 죽기 전에 타오르는 최후의 불씨 덕이다.
「검주, 지금부터 응급처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께 데려가고 싶지만, 그 전에 검주의 몸이 한계에 도달할 가능성이 너무 높아요.」
좌우로 걷힌 구름 사이로 해가 비춘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백신아의 모습이 보였다. 절반쯤 투명한 상태였다. 과거, 영화 속에서 보았던 고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백신아는 현재, 나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 행동에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르는지 그녀는 그 어느 때, 어느 순간에도 몸에서 검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 쪽이 본체일 수도 있겠다.
백신아는 샤를로트의 후드를 내 오른손에 쥐어준 뒤, 내 몸이 파손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발끝으로 울퉁불퉁한 지면을 고르게 한 뒤, 천천히 눕힌다.
「목뼈, 그리고 목이 부러지면서 함께 부서진 턱뼈, 그리고 안와골절부터 치료하겠습니다. 검주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검주는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셔야 해요. 샤를로트 아씨를 되찾기 위해서…… 검주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짧은 말 사이에 검주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양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일까. 백신아는 검의 날 부분을 이로 물어서 고정한 다음, 오른손과 왼손으로 나의 파손 부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녀석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마치 역장 같은……, 부드러운 파문이 상처 부위를 시작으로 전신에 퍼져 나갔다.
그 다음은 몸통. 백신아는 부러진 뼈가 폐와 내장을 찌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부위가 없어서, 정확히 어느 부분이 어떠한 형태로 파괴되어 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녀석의 손길이 오체에 닿을 때마다 전신을 찌르고 있던 통증이 조금씩 흐릿해져 간다. 그리고 그때쯤 되어서 나는 내가 어느 부위가 어떠한 형태로 파괴 되었는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이오?"
치료를 시작하고 5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요하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부서진 지형을 헤치고 내가 쓰러진 위치까지 다가왔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가 보기에도 나의 부상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마저 패배한 건가……. 아니, 그것보다도……"
요하네스가 고개를 슥 돌린다. 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광경은 상당히 기묘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여자가 검을 입에 물고 나를 치료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반투명한 실루엣의 형태를 취한 백신아는 검날을 입으로 물고 있는 상태에서 의사 표현이 가능한지 요하네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백신아입니다. 제 목소리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하고 있소."
요하네스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그는 백신아가 가면 검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직접 부딪쳐보고 짧게나마 대화까지 나눠본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백신아와 요하네스는 추후 재대결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에게도 백신아의 존재는 크게 인상적이었는지 목소리를 들은 순간 지금의 상황을 납득한 것 같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패배한 것 같구려."
요하네스가 씁쓸하게 눈을 가늘인다. 이번 전투가 시작되기 전, 나와 그는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광증이 있는 요하네스는 함부로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다. 그는 허유가 출현한 충격파로 의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떠안았다.
그가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쳤다는 의미이다.
허유에게 패배하고,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나와는 천지차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검주가 돌아가신다면 복수전도 할 수 없어요. 마력을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급처치를 끝마친 뒤 검주를 옮겨야 합니다.」
"알겠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지."
요하네스는 내 몸을 사이에 두고 백신아와 마주 앉았다. 내 좌반신에 손을 대고 백신아의 지시에 따라서 마력을 공급한다.
「검주, 이것은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서진 뼛조각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어요. 수술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
치료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흥분으로 잊고 있던 고통이 조금 전부터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백신아는 그런 나의 상태를 깨달았다.
녀석의 오른손이 뜨여 있던 내 눈꺼풀에 손을 대었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눈동자가 닫힌다.
「검주, 잠시 눈을 붙이고 계시길. 검주께서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 검주가 해야 할 일은 부서진 몸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쥐고 잡아당긴 것처럼 내 의식이 어둠 속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의식이 사라져 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오른손으로 쥔 후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 * *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익숙한 연금술사의 공방이다. 팔과 다리, 거기다 얼굴에도 붕대를 감아 두었는지 전체적으로 상당히 갑갑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또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소모했을까.
나의 몸뚱이는 이제껏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며칠일까. 그 싸움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 일주일? 보름? 아니면 설마…… 한 달을 그대로 누워 있었던 건 아니겠지?
걸레짝이 되어 있던 몸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시야는 몽롱하고 발걸음은 위태롭지만, 싸움이 끝난 직후 내 몸 상태를 고려하면 이것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육체의 회복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에 걸맞는 시간을 지불했을 터, 도대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젠장, 달력은 어디에 있지? 오늘은 도대체 며칠이야?
그때, 공방의 두꺼운 문이 열렸다. 품에 종이 바구니를 안은 연금술사가 지금 막 바깥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선생님……, 윽……"
그 얼굴을 본 순간 긴장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자리에 쓰러졌다. 연금술사는 채소가 가득 들어간 종이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을 상당히 오랜만에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초인의 영역에서 싸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 감각이 꼬이기 시작하는 문제점이 있다.
"오늘, 오늘이…… 며칠이죠……?"
"네가 실려온 뒤, 아직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겨우 열두 시간만에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 아니었을 텐데……"
"응. 나 혼자만의 힘이었다면."
연금술사가 내 어깨를 잡고 몸을 부축한다. 어지간한 일에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 그녀의 침착한 정신이 이런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흥분 상태에 있던 정신이 조금씩 잠잠해지면서, 상황을 냉정한 안목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고개를 돌린다.
내가 누워 있던 침대의 옆에는 낮은 서랍장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서랍장 위에는 수녀복에 쓰이는 후드가 보인다.
샤를로트가 남기고 간 물건이다.
그것을 본 순간, 힘이 다할 것 같았던 몸뚱이에 다시 힘이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부축한 연금술사가 나를 공방의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정확히는 방이 아니고 창고 같은 좁은 공간이다. 연금술사의 공방은 거실과 실험실, 그리고 침실이 전부인 협소한 장소다.
좁은 창고에는 원래 다른 물건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공간에 여유가 있는 상태다. 잘려 나간 내 왼팔을 수납한 유리관을 보관하기 위해서 다른 물건을 최대한 치워 두었다.
창고에는 투명한 수용액 속에서 부유하는 내 왼팔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리관을 마주 보는 형태로 검왕검이 놓여 있었다.
부서진 나머지 조각을 회수했는지 쪼개진 두 쪽이 나란히 누워 있다. 지금은 자가수복이 진행되고 있다. 아직 다 붙지 않아서 흔들리는 상황이지만 완전회복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아, 검주. 깨어나셨군요.」
백신아는 바닥에 누운 검왕검의 옆에서 쪼그린 자세로 앉아 있었다. 쭉 뻗은 오른손 검지가 검왕검에 접한 상태다.
아, 아직 피가 부족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진 않지만 얼추 이해가 간다.
내가 허유에게 패배하고 목이 잘리기 직전, 검집의 잠금쇠가 멋대로 풀리면서 검왕검이 뽑혀 나왔었다.
검왕검, 그리고 그 검왕검을 쥔 백신아가 허유와 맞서 싸운 덕에 나는 최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샤를로트는 구할 수 없었지만 백신아는 최선을 다했다.
백신아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열두 시간 전, 1위하고 신아가 널 데리고 왔어. 그리고 내가 수술을 했지."
연금술사가 고개를 힐끔 돌렸다. 의료용으로 분리해놓은 별도의 쓰레기통에 피로 절은 마스크가 보인다.
"난 최소한 반 년은 회복이 필요할 거라고 전망 했는데, 네가 회복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어. 아마도 신아가 네 몸에 무슨 처치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우수한 의사인 그녀가 보기에도 나의 회복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치에 맞지 않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백신아의 영향이었다.
도대체 어떠한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신아 덕에 내가 시간을 크게 아낄 수 있었던 건 틀림없다.
"고마워, 신아야."
「그렇지 않답니다, 검주. 전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백신아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검왕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아니, 떼어낼 수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의 백신아는 마지막에 보았던 그때의 모습처럼 반투명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백신아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 여기에 있는 건 내가 가상 공간 속에서 익히 얼굴을 보아온 백신아였다.
어설프게 투명한 상태에 위치한 그 모습은 영화 속에 나오는 유령을 떠올리게 한다.
백신아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그리고……, 검주가 겪은 모든 일은 따지고 보면 제 탓이기도 하고.」
"그건 무슨 소리야?"
「머지 않아 말씀 드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내가 수상쩍은 말에 의문을 느낀 직후, 백신아는 어설픈 태도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부채 의식? 어째서 백신아가……?
「그것보다도……, 검주. 바깥으로 잠시 나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검주가 꼭 보셔야 하는 게 있어요.」
백신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좌우의 손에 하나씩 부서진 검왕검의 조각을 쥔 상태다.
내 생각이 맞다면 백신아는 아직도 검왕검에 귀속되어 있는 상태다. 스스로 검왕검에 영향을 끼쳐서 움직임을 조작하는 건 가능하지만 검왕검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검왕검이 다시 붙을 수 있도록 단면을 세게 밀착시킨다. 그 상태로 움직인다.
연금술사의 부축을 받으면서 공방 바깥으로 나간다. 아직 세상은 어두웠다. 그 싸움 이후로 열두 시간이 흐른 게 사실이라면 세상이 어두워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저게 뭐야……?"
눈을 크게 뜬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저편에 어둠 속에서도 형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물이다.
그 구조와 모양은 수도에 남아있는 고성을 닮아 있다.
"조금 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건물이야. 아마 저 성을 제작한 건 보이드의 몸을 차지한 그 존재이겠지."
날 부축 중인 연금술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지 올 테면 와봐라……, 그런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