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23. 무? 그리고. (9)
* * *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뇌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검왕검이…… 찢어졌다.
칼날이 떨어져 나간 단면은 매우 아름다웠다. 삐뚤어진 흔적 하나 없이, 아주 매끄러운 단면이었다.
검왕검은 무적이 아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우리와 비교해서 아득히 높은 격을 가진 허유라면 검왕검에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막상 찾아온 그 순간 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해야 한다. 검왕검이 쪼개진 것은 비상사태였다. 그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나는 어서 생각하고,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어째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검……, 주……』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눈이 다시 뜨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유는 검왕검을 파괴한 직후, 재차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궤적으로부터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발사되었다. 회피하지 않으면 허리가 끊어진다.
나는 급하게 몸을 아래로 낮춰서 참격을 회피했다. 자세를 낮춘 나의 눈앞에는 바닥에 꽂힌 검왕검의 나머지 반쪽이 존재한다.
그것을 절반밖에 남지 않은 검으로 후려쳤다. 마치 골프공을 채로 후려치듯이, 부러진 검왕검의 반쪽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허유를 향해 날아갔다.
허유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서 검왕검의 조각을 튕겨냈다. 그럴 것 같았다. 애초에 나도 지금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허유가 조각의 투척을 걷어내기 위해서 낭비한 한 순간, 그 틈을 노려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검왕검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검에서 소리가 들렸다.
『전……, 괜찮…… 아요……. 저 조각만 무사하면…… 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신아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뚝뚝 끊어져서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애초에 어디까지 녀석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검왕검의 수복 능력으로 과연 지금의 손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등허리로 손을 뻗었다.
그 위치에는 루이스의 검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완성한 물건이다. 검왕검과 완전히 같은 재질이지만 온갖 특수 기능에 집중한 탓에 강도가 부족한 검왕검과 다르게, 이쪽은 철저하게 강도와 날카로움에 모든 용량을 소모했다.
이 한 자루를 제작하는데 해신의 핵을 모두 사용했다. 특수한 연금술과 공정 과정이 없으면 제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루이스의 검을 천천히 뽑는다.
검왕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지금, 내게는 루이스의 검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루이스의 검은 길쭉한 장검이었다. 제작 과정에서 검왕검을 상당 부분 참고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검왕검과 함께 제작된 물건처럼 보일 정도로 닮아 있다.
사실상 자매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강도나 날카로움 따위의, 검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능력치에 한해서 루이스의 검은 검왕검보다 우위에 있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검왕검을 쓰지 못하게 된 지금, 나는 지금껏 세워온 대부분의 플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코어의 기능을 아주 일부 해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상 해방하면 그에 비례해서 지속시간도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한계라고 부른다.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넘어선 대가는 원래 참혹한 법이다.
아마 코어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트리면 지속 시간은 불과 수 초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함부로 코어의 경계를 무너트리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떡하지.'
코어의 경계를 모조리 무너트리는 건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다. 일부를 무너트리는 것과 전체를 무너트리는 것 사이의 난이도는 천지차이.
경계를 모조리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천변무궁류의 제육검을 쓴 상태에서, 1분 정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와 백신아는 지금까지 온갖 방식의 편법으로 고급 기술의 조건을 완화시켜왔다.
스페트로와 맞서 싸웠던 그때의 재현이다.
백신아가 제한 시간 동안 허유와 맞서 싸우면서 코어의 완전 해방 조건을 완화시킬 수 있게 포석을 짜고, 제한 시간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내가 전투를 이어 받아서 경계를 원래 정해져 있던 준비 시간을 무시하고 무너트린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백신아가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을 위해서 수행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백신아의 조력을 받을 수 없게 된 현 상황에서 나는 대부분의 플랜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해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도주를 허용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도망칠 생각도 없다.
'생각하자. 신아의 조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됐어.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포석을 깔고, 나의 검술로 조건을 완화시켜서 코어의 기능을 완전히 개방할 수밖에 없어.'
루이스의 검을 새삼 말아쥔다.
머릿속에서 회로가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천변무궁류의 흐름으로 포석을 깔아서 코어의 기능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뿐.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을 하나씩 검색했다. 필요한 천변무궁류의 기술은? 맞춰야 하는 합의 숫자는?
허유의 기술의 기반이 보이드의 기술이라는 점이 내게 있어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모르는 기술을 계산에 짜넣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
"흡!!"
왼발을 세게 내딛으며 달려 나간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지면을 세게 내딛은 왼발 끝에 힘이 집중된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을 휘둘러 왔다. 천변무궁류의 모든 기술 중에서도 최속을 달리는 이 기술은 기선 제압부터 마무리까지 모자란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 무게중심을 정면으로 집중한 그 순간, 나는 지금부터 발해질 일참이 지금까지 휘둘러온 그 어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쿵!! 내딛은 지면을 박살내면서 달려든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이 허유의 검에 묵직하게 꽂혔다.
* * *
상식을 초월한다.
샤를로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샤를로트가 위치해 있는 수녀원과 전장 사이에는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가 존재한다. 전장을 옮기기 위해서 백신현이 허유의 몸을 제일검으로 밀어낸 결과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투에 있어서 그 정도의 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백신현은 천변무궁류의 제일검 한 번으로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주파했다.
이것은 즉, 그들에게 있어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는 그렇게 대단치 않은 거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사실은 전투가 이어질수록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펑, 펑, 펑, 샤를로트의 주변에 있는 지형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폭음이 들린 직후, 그 자리에 서로 검을 부딪치는 백신현과 허유의 잔상이 잠시 그 자리에 남았다가 사라진다.
그러한 잔상을 눈에 비치는 모든 범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샤를로트의 눈에 비치는 세계에는 수백 명의 백신현과 수백 명의 허유가 서로 검을 부딪치고 있다.
그 자리에 잔상으로 남은 백신현은 붉은 마력을 전신에 휘어감은 상태였다.
코어의 기능을 일부 해방시키고, 그 상태에서 신체능력을 극한까지 증강시키는 천변무궁류의 제이검을 더한 끝에 백신현은 간신히 허유의 검을 쫓아가고 있었다.
콰직!!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공중의 한 점에서 공기가 폭발했다. 그 다음 순간, 붉은 섬광이 하늘에서 지면을 향해 대각으로 꽂히는 궤적이 보였다.
백신현의 등이 지면에 접한 순간, 지면은 마치 스폰지처럼 부드럽게 관통되었다.
마치 부드러운 카스텔라 빵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처럼, 백신현은 지반을 아예 뚫고 들어가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깊은 지하에 처박히고 말았다.
지면에 처박히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다시 한 번 구멍 속에서 뛰쳐 나온다.
"큭!!"
지금의 백신현은 두달 전 허유와 조우했을 때와 비교해서 수 배에서 십수 배에 달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기술적인 면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지만, 코어에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최대치가 늘어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결과물이 나왔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샤를로트가 고개를 돌린다. 샤를로트는 허유와 백신현의 자세한 전투력을 측정할 수 없다. 샤를로트의 수준에서 논하기에는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높은 차원의 영역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차이를 논할 수 없는 샤를로트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지금의 전황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샤를로트의 시선에 격돌의 잔상이 비친다. 허유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백신현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다. 그뿐일까, 그의 팔과 다리에는 수많은 상처가 가득했다. 가슴팍에도 크게 베인 상처가 하나 있어서, 안쪽에서 흘러나온 피로 옷감이 흠뻑 젖어 있었다.
쿵! 콰직! 빡! 빡!!
소리는 언제나 조금 늦게 들렸다.
백신현은 불과 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사이에 바닥을 수도 없이 뒹굴었다. 바닥에 처박히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한 번 지면에 머리부터 꽂힌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다쳤는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
샤를로트의 눈에도 보였다.
허유는 아직 여유로웠다. 지금 보이고 있는 힘이 전부가 아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드러내지 않은 숨겨진 힘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아."
샤를로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무력함을 느낀 것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샤를로트는 언제나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 일 년 동안 그 감정은 점점 더 크기를 불리기 시작했다. 샤를로트가 스스로의 무력함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이 최근 일 년 사이에 지나치게 많이 발생한 탓이다.
스페트로 가문을 둘러싼 사건 때도, 해신 때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내온 수녀원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혼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백신현을 불러 들였을 때.
활화산처럼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선명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알고 있다. 무력함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을 억지로 해소하기 위해서 혼자 힘으로 도전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일이다.
샤를로트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자존심을 세워서 해결될 수 있는 국면이 아니라는 것을 이 어른스러운 소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샤를로트는 무력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백신현을 불러들였다. 지금 이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은 샤를로트의 목숨 뿐만 아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내온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싸움이다.
샤를로트는 틀리지 않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투의 수순을 알아볼 수 없는 샤를로트의 귀에도 들린다.
백신현의 생명이 조금씩 꺼져 가는 소리가.
이 자리에서 샤를로트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짐이라도 되지 않으면 차라리 다행인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법은 없을까.
이 싸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야."
그리고 그때, 샤를로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었다. 백신현과 허유의 충돌은 하늘에서, 지면에서, 수도 없이 많은 충격파를 흩뿌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산은 깎여 나갔고, 대지에는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절벽이 나타났다. 천공의 구름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마치 하늘에 커다란 균열이 내달린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샤를로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샤를로트 뿐만 아니라 누가 찾아와도 결과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올리비아도, 란즈 가주도 지금의 싸움에는 끼어들 수 없다. 마그누스와 루이스 등의 최정상급 고수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 백신현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전투 능력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아직 한 사람이 남아있다.
천하무적, 궁극무쌍.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창술사가.
다름아닌 샤를로트의 영혼 속, 가장 깊은 위치에 존재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