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23. 무? 그리고. (8)
* * *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 내가 싸워보고 싶었던 것은…… 충분한 준비를 거쳐, 완벽한 기술을 손에 넣은 자네였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붙으면 의미가 없잖아."
허유에게선 긴장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놈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놈의 힘, 그리고 놈의 격.
오만을 오만이라고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아니, 오히려 오만을 부려주는 편이 내 입장에선 차라리 낫다.
허유가 전투에 진지하게 임했다면, 오만이나 방심 없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살려서 내게 덤벼들었다면 내게 승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놈은 다르다.
보이드부터 요하네스까지, 나와 백신아가 지금껏 맞서 싸워온 존재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내게 덤벼 들었다. 그들에게 싸움은 놀이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능력과 신념하는 증명하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고귀한 승부의 장이었다.
하다못해 보이드조차 싸우는 이유가 잘못되어 있었을 지언정 싸움 자체에는 매우 진지하게 임했다.
놈의 철저한 성격 때문에 나도 어마어마하게 고생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허유는 다르다.
놈에게 있어서 싸움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맞서 싸워온 다른 적과 다르게, 진지하게 임하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있어서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놈의 오만이나 방심을 파고들지 않으면 합을 나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것밖에 없는 걸까.
적의 방심을 기대하지 않으면 승산을 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나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좋다고 덤벼오는 상대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까. 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싸우는 건 마음에 들지 않건만."
허유가 가볍게 숨을 토해낸다. 놈이 한 걸음,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그 순간, 그 한 걸음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마력이 구체의 형태로 퍼져 나갔다.
나와 샤를로트는 동시에 커다란 압박을 느꼈다. 마치 쏟아지는 급류 속을 홀몸으로 헤쳐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력은 그 뿐만이 아니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허유를 바라보는 시야에 쉴 새 없이 노이즈가 발생한다.
나와 검왕검 사이의 연결이 약해지려 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것은 보이드가 보유하고 있던 술식으로, 검왕검이 가지고 있는 기능 중에서 단 한 가지를 봉인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은 당연히 검왕검 내부에 들어 있는 백신아이다. 그런데 지금의 술식은 검왕검의 기능에 간섭해서 백신아가 내 몸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나는 허유와의 첫 조우와 마찬가지로, 백신아의 조력 없이 싸우게 된다.
허유와의 첫 전투 이후 두 달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백신아의 도움 없이, 혼자서 싸우는 상황을 대비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행에 수행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처럼 허유의 술식에 의해서 백신아가 봉인되거나, 백신아에게 걸려 있는 제한 시간 이내에 결판이 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서브 플랜이다.
안타깝게도…… 나와 백신아 사이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물론 분하다. 나의 수행이 무의미한 것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자존심이 아니니까.
조용히 호흡한다. 급류처럼 쏟아지는 허유의 마력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는 육체를 다잡으며 술식의 빈틈을 통찰했다.
'속지 마라.'
어마어마한 출력으로 나를 속이고 있을 뿐, 술식 자체는 보이드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아무리 거대한 마력으로 휘둘러지고 있다 하더라도, 엄연히 약점은 존재하며, 나의 기량이라면 백신아의 도움 없이도 파해식으로 지금의 술식을 해체할 수 있다.
검을 뽑는다. 보이드의 술식이 가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검왕검의 기능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마력도, 나의 검술에도 영향은 없다.
평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샤를로트."
"신현 씨……?"
"몸을 숙이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있어. 곧, 바람이 몰아칠 테니까."
마치 거울에 비춘 듯, 나 또한 허유와 마찬가지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급류처럼 쏟아지던 허유의 마력이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더니 어깨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술식의 파해에 완료했다.
"호……?"
허유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검왕검을 구속하고 있던 봉인은 이로써 사라졌다.
원리는 어렵지 않았다.
보이드의 술식은 일정 영역의 공간을 범위로 두고, 그 범위 내에서 정해진 파장의 마력을 발산시켜 검왕검의 기능을 봉인한다. 그렇다면 이쪽은 그 파장에 맞춰서 중화시킬 수 있는 마력을 발산해서 상쇄시킨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구조는 복잡했다. 파해식을 짜는데 루이스는 거의 일주일을 소모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이드는 그렇게 보여도 만만한 놈이 아니었으니까. 검사로서는 상당히 저급하지만, 학자로서는 우수한 남자였다.
보이드는 천재인 루이스로 하여금 일주일의 시간을 소모하게 했다.
놈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다. 무게 중심은 정면으로, 그것은 단거리 경주의 출발 자세를 닮아 있었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이 시작된다.
파직!!
"음……?!"
허유는 내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낼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검과 검이 충돌한 순간, 허유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놈의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허유가 예상한 출력을 순간적으로 내가 웃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힘조절이 잘못 되었을 뿐.
"그렇군, 마력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바닥을 딛고 있던 두 다리가 천천히 떠오른다. 순간적으로 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속도는 인간 하나의 몸을 공중에 떠오르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허유는 순식간에 샤를로트의 옆에 있는 공간을 관통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쭉 나아간다. 허유의 등뒤에는 수녀원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건물의 강도는 두부 만큼이나 부드럽고 나약한 것이었다.
쿵!! 소리는 나와 허유가 건물을 관통한 뒤, 어느 정도 시간차를 두고 울려 퍼졌다.
나와 허유는 순식간에 수십 킬로미터를 주파해서 어느 초원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떠한 장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싸워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콰직!! 바닥을 세게 내딛으며 급정지한다. 허유의 몸이 그대로 쭉 나가 떨어진다. 놈은 바닥에 칼을 꽂으며 관성으로 밀려 나가던 몸을 억지로 멈춰세웠다.
하지만 놈에게 데미지는 없다. 그럴 것 같았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조금 멀리까지 튕겨 나간 허유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몸을 일으키면서 웃는다.
"저 아이를 끌어 들여야 할지 말지 고민을 좀 했는데, 괜히 저 아이를 끌어 들였다가 자네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면 곤란하니까, 특별히 봐 주었다. 내가 싸우고 싶은 건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힘을 휘두르는 자네거든."
허유는 내 목적을 알면서도 어울려 주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내가 샤를로트로부터 허유를 떼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허유가 작정하고 샤를로트를 인질로 잡았다면 나도 샤를로트와 허유를 제대로 분리해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다.
나의 속도는 딱 허유를 당황시킬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건 그렇고……, 이미 코어의 경계를 무너트린 상태였나? 아, 하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준비를 하긴 했을 거야. 그렇지?"
"……."
"그것을 숨기고 있었군. 나를 위한 깜짝 선물인가?"
아직은 10% 정도였다. 이 이상 출력을 높여 버리면 안 그래도 짧은 전투 지속 시간이 더 줄어들어 버릴 테니까. 허유와 싸우기도 전에 힘이 다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최소 십몇 분은 지속시킬 수 있다. 물론 지속 시간이 다하고 나면 반동이 어마어마하게 몰려 오겠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는 미리 해방하고 와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지금의 나는 두 달 전과 비교해서 마력의 최대치와 출력이 몰라보게 높아진 상태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의 내가 보유하고 있는 전력은 두 달 전의 수 배에서 십수 배.
하지만 허유에게는 지금의 출력으로도 도무지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런 상황에서까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다른 외력에 의지하는 것인가? 싸움의 흥을 깨려 하는군."
"외력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부정할 수 없다. 천변무궁류는 내가 뼈를 깎아가며 습득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백신아에게 몸을 넘겨주는 행위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외력의 개입이니까.
하지만 상관 없다. 그런 걸 따지기에, 나는 아직도 너무나 나약하다. 그것은 두달 간의 수련을 거쳐도 달라지지 않는다. 분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겨우 두달 간의 수련으로 좁힐 수 있을 정도로 나와 그녀의 차이는 만만한 게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서브플랜, 그녀의 힘으로 결판을 내지 못했을 때 싸움을 마무리하는 역할로 족하다. 오직 그 역할을 완수하기 위한 수련이었다.
무술가의 자존심? 물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자존심에 눈이 돌아가서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나는 못난 놈이 아니다.
그렇다, 이 싸움에 어울리는 건 내가 아니다.
바로 곁에 천하제일의 검사가 함께 있었다. 그녀에게 이 싸움을 넘겨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검왕검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허유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그러한 행동 하나 하나에 긴장하게 된다. 허유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백신아에게 주도권을 넘기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불현듯 허유의 몸이 한 순간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위치는 곧바로 파악했다. 바로 옆, 백신아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나서 대응하면 제때 맞추지 못할 것 같다. 급하게 몸을 틀었다. 방어 자세에 들어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그 직후에 벌어졌다.
나와 허유의 검이 부딪친 바로 그 순간, 검왕검을 틀어쥔 손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검왕검의 무게감이 한 순간 크게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 느낀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틀어쥐고 있던 검왕검의 무게가, 명백히 가벼워졌다.
쩍……, 하고 소리가 들렸다.
금속과 금속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때 허유의 검이 타격한 위치는 검왕검의 중간 지점이었다.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검왕검을 방어 자세로 들었을 때 공격이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위치다.
보이드의 검, 스페트로의 창, 해신의 무게, 요하네스의 온갖 무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검왕검의 이 부위로 수많은 공격을 받아내왔다.
그리고 설령 검을 든 내 팔이 부서질 지언정, 검왕검이 상처 입는 일은 없었다.
긁힌 흔적 정도는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잠시 뿐.
스스로 수복하는 기능을 보유한 검왕검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미한 흠집마저 회복해서, 언제나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검왕검은……, 지금의 타격을 회복할 수 있을까……?
"……."
검왕검의 빛나는 칼날에 선 하나가 사선으로 슥 그어졌다. 그 흔적은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그 선을 따라 검왕검의 절반이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바닥에 푹 꽂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 승부의 흥을 깨는 시시한 외력은 이걸로 사라졌다."
허유는 그 결과를 보고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검왕검을 부수기 위해서 행동에 들어갔고, 그 결과물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검왕검 내부의 고동이 눈에 띄게 희미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서 뽑아라. 그대의 등허리에 걸린 그대의 새로운 검을."
허유의 시선은 내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왕검의 검집이 아니라, 그 뒤에 꽂혀 있었다.
검왕검의 검집과 다르게, 그 검집은 내 등허리에 가로로 걸려 있었다.
두달 전의 싸움에서는 없었던 물건이다. 당연했다. 이 검 또한 지난 두달 간의 연구 끝에 완성된 결과물이니까.
검집 속에 잠든 루이스의 검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