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23. 무? 그리고. (7)
* * *
"……."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다. 샤를로트의 오른손에는 브로치가 들려 있다. 백신현에게 선물 받은 물건으로, 모양은 수수하지만 애초에 보이는 목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다.
붉은색 루비가 박혀 있는 브로치는 마력을 발신하는 마도구였다. 백신현의 선물이다. 샤를로트의 집안은 적이 많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지면서 그들의 행동은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백신현은 스페트로 가문 자체에 닥쳐온 위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아직 어린 샤를로트가 어른의 사정에 휘말리는 것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브로치는 그것을 위해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샤를로트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 때, 브로치를 손에 쥐고 마력을 공급하면 백신현에게 신호가 전달된다.
그는 말 뿐인 남자가 아니었다.
위치는 수녀원 마당, 샤를로트는 수녀원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당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다리로 서 있는 건 두 사람 뿐이다.
샤를로트.
그리고, 수녀원의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샤를로트를 제외한 전원의 의식을 빼앗아버린 키가 큰 남자.
검은 정장, 검은 구두, 검은 머리카락. 피부색을 제외한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점철된 남자였다.
그 얼굴에 샤를로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두 달 전, 백신현에게 들은 사실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을 젊은 시절로 회춘시켜서 사용하고 있었다.
보이드는 샤를로트의 가문과도 꽤 연이 깊은 인간이고, 샤를로트 또한 그의 늙은 모습을 실제로 본 기억이 있다.
그가 정말로 보이드의 몸을 회춘시켜서 쓰고 있다면, 그의 얼굴에서 보이드를 볼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흠……, 역시 그렇군."
검은 정장의 그 남자는 아직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녀원의 입구로 당당히 들어왔을 뿐.
그저 그것만으로도 마치 산소 부족에 시달리듯 수녀원의 동료들이 하나씩 쓰러져갔다. 원장 수녀를 비롯한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코에 손을 대면 미약하게나마 호흡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무의식적으로 밟힌 잡초처럼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샤를로트만이 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샤를로트가 나이에 비해서 높은 기량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그 재능을 완전히 발휘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수녀원에는 샤를로트보다 확실히 기량이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 수녀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가 존재하는데, 원장 수녀를 포함한 어른들 역시 그가 찾아온 그 순간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1급과 2급은 한 사람씩, 그리고 3급은 두 명이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역시 의식을 잃지 않는군. 꼬마야, 내 생각에 너는 무척 특별한 아이 같구나."
그리고 그 남자는 샤를로트만이 기절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듯, 마당에 서서 샤를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어떠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조금 전 공중의 어느 한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구체의 형태로 균등하게 퍼져 나갔고, 그 충격을 샤를로트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 있는 전원이 동시에 감지했다.
아마 그 충격파는 이 수녀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정도로 충격이 크고, 빠르게 퍼져 나갔으니까.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의식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수녀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한 건 그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였다.
"……."
샤를로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나기 전부터 샤를로트는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가슴이 괴롭다. 칼로 푹 찌른 것처럼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충분히 버틸 만 했다. 샤를로트는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 잡은 채 오른손으로 쥔 브로치를 손 안에서 데굴데굴 굴렸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 바로 그때, 샤를로트는 품안의 브로치를 뜯어내서 마력을 공급했다. 신호가 전송된 것을 감지했다.
백신현은 아마 샤를로트의 신호를 수신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떡하지.
그 사람이 올 때까지 어떻게 버티면 되지.
눈앞의 남자를 알고 있다. 백신현조차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괴물. 불과 합을 세 번 나눈 것만으로도 백신현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서, 코어의 기능마저 일시적으로 정지했을 지경이라고 들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애초에 샤를로트는 지금 무기도 없는 상황이다. 무기를 쓰지 않는 주먹다짐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게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샤를로트도 안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꼬마야. 난 네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거든."
언뜻 보았을 때, 눈앞의 남자는 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르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꺼먼 기운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눈앞이 한 순간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강조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담백한 태도와 말투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게감이 있다.
예를 들어, 개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대단치 않은 일이다. 개미가 하는 일에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는 인간은 개미에 관심이 있는 곤충학자 뿐일 것이다.
그것과 비슷하다.
눈앞의 남자는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그 행동은 가볍게 그지없다.
마치 개미를 앞에 둔 인간처럼.
개미 앞에서 무게감을 잡거나,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네 안에 존재하는 피……, 혈통을 통해서 이어져오는…… '나와 닮은 존재'의 고동이란다."
* * *
"요하네스, 이쪽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와 요하네스는 빠르게 하산했다. 다른 곳으로 빠질 틈은 없었다. 샤를로트가 있는 수녀원을 향해 달려서 내려간다.
그런데 거리의 분위기가 익숙했다. 마치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어느 지점부터 의식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는 바,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원이 뽑힌 기계처럼 의식만 없는 상태였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짓을 벌인 당사자가 누구일지는 짐작이 간다.
"요하네스, 여기에서 갈라지죠."
"무슨 소리지?"
"거리에서 쓰러진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을 보아하니 집안에서 쓰러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거기다가 지금은 점심 시간이잖아요. 요리를 하기 위해서 불을 올린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기절하기라도 했다면…… 대형 사고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알겠소. 조금 굴욕적이긴 하지만, 둘 중 하나는 기절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겠지."
또한 요하네스는 전투가 지속될수록 점점 증상이 심해지는 광증을 달고 다닌다. 그 광기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 지 알 수 없는 지금, 그를 함부로 전장에 데려가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요하네스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서로 갈라져서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샤를로트는 수녀원에 있다. 그리고 수녀원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지?
도대체 왜, 이 타이밍에 샤를로트를 찾아온 걸까.
두 달 전의 일이 떠오른다. 허유와의 첫 전투를 끝마치고, 소림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병상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샤를로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 있는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을 찾았다.
그때, 샤를로트는 허유의 출현과 동시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허유의 존재감에 크게 반응했다.
같은 핏줄인 란즈 가주의 경우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직 어린 샤를로트가 스스로의 핏줄을 이겨내지 못했던 탓인지, 아니면 스페트로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 특화된 샤를로트의 특이성이 허유의 존재감에 더 강렬하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이 타이밍에 허유가 샤를로트를 찾아갔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정도 뿐이다. 샤를로트가 허유의 존재감에 반응했듯, 허유 또한 샤를로트의 존재감에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준비는 아직 되지 않았지만, 그런 걸 신경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바위처럼 틀어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다. 수녀원의 입구가 보인다. 도착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네 안에 존재하는 피……, 혈통을 통해서 이어져오는…… '나와 닮은 존재'의 고동이란다."
"샤를로트!!"
수녀원의 넓은 마당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나는 샤를로트, 나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소녀. 그리고 또 하나는 보이드, 아니 허유다.
허유는 내게 등을 보인 채, 샤를로트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혈통? 나와 닮은 존재? 그런 키워드가 지금 들려온 것 같다.
하지만 그 대화는 내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끊어졌다. 샤를로트와 허유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해 움직인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 자신은 허유의 존재감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육체는 허유를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패닉에 빠졌다.
내게 패배를 안겨준 존재는 많았지만, 허유는 그 중에서도 격이 다른 존재다. 한 번 부서졌다가 회복한 몸이 맞서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삐걱삐걱, 영혼과 육체가 어긋난 탓에 전신의 관절이 녹슨 금속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굳은 몸뚱이를 영혼으로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서 자세를 잡는다.
"오, 역시 무사히 회복했군. 자네라면 틀림없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네."
허유는 오히려 내가 나타난 것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감정에서 호의를 느끼고는 오히려 소름에 몸서리쳤다. 놈에게 있어서 나는 적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놀이상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샤를로트는 왜 찾아왔지? 이건 나와 너의 싸움이 아니었나?"
"아, 그런 건 아니야. 이건 자네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일세.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이 아이가 아니라, 이 아이의 피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나와 닮은 존재'거든."
샤를로트의 피, 그리고 피와 연결되어 있는 허유와 닮은 존재.
두 가지 단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존재가 하나 있다.
개념으로 따졌을 때, 그 존재는 허유와도 닮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을 그릇으로 삼아 활동하는, 절대적인 영혼을 가진 존재.
즉, 스페트로.
"물론, 보이드의 기억을 들여다본 바…… 나와 닮은 그 존재는 이미 자네에게 한 번 패배를 경험한 모양이지만,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네. 중요한 건 이 세계에 나와 닮은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내가 그 존재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거지. 어쩌면 훗날 우리들의 영역에 도달할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래서 샤를로트를 찾아온 건가.
허유는 마치 벌레라도 쫓듯 가볍게 손을 털면서 말했다.
"자네는 잠시 거기에서 기다리게. 이 용건이 끝나면 그때 놀아줄 터이니."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대답했다.
허유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이런, 자네와는 좀 더 나중에 싸우고 싶었는데. 나는 아끼는 술은 나중에 까는 성격이란 말이다."
그가 검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준비하던 기술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막 덤벼들어도 되겠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로 덤벼서 흥을 깨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허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그의 말처럼 나의 기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기술을 쓰지도 않았는데 놈은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알아냈다.
놈의 남다른 격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애초에 그 기술은 석 달 안에 완성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었다. 석 달 동안 개 같이 고생해도 완성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내 목표였다.
지금, 다시 한 번 스페트로에게 몸을 빼앗기면 샤를로트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스페트로는 그런 놈이다.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는 없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내 수행의 성과를 확인해보는 수밖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