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23. 무? 그리고.
* * *
아침이다.
나는 아침 일찍 바깥에 나와서, 루이스가 신을 스타킹을 사왔다.
루이스가 깜박하고 여분의 스타킹을 준비하지 않은 탓이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스타킹은 내가 찢어버렸다.
조금 넉넉하게 사왔다. 루이스에게 스타킹은 중대 문제이니까. 허벅지가 두꺼운 탓에, 스타킹을 신지 않으면 허벅지가 서로 스치면서 따끔따끔한 통증을 느끼는 것 같다.
루이스의 사이즈는 나도 알고 있었다. 본인에게 들은 데다가, 실제로 보고 만진 횟수도 많으니까.
준비를 끝마친 뒤, 연금술사의 공방을 찾았다. 어젯밤, 연금술사는 드물게도 제 시간에 잠들었는지 잠옷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제! 루이스 언니! 좋은 아……, 침……?"
카펫 위에 엎드려 있던 파비아가 늘 하던 것처럼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파비아가 네 발로 기어서 가까이 다가왔다. 코를 킁킁 거리면서 우리의 냄새를 맡는다.
처음에는 나, 다음은 루이스였다. 파비아는 루이스의 아랫배에 코를 대고 한참 동안 킁킁 거리더니, 도끼눈으로 우리 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루이스 언니……, 치사해……."
"윽."
루이스가 새총에 맞은 듯한 얼굴로 움찔거렸다. 씻는다고 씻었는데, 그게 잘 안 되었나보다. 파비아의 후각을 속이기에는 부족했다.
"나도 같이 불러 주지……. 언니만 치사하게에……"
파비아가 캬악, 하고 소리를 냈다. 지금의 그 소리는 개과라기보다는 고양이과의 동물 같았다. 루이스는 드물게도 겁박하는 파비아의 목소리에 반박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루이스가 잘못한 게 맞아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비아는 입술을 길게 삐죽이면서 주먹으로 내 정강이를 퍽퍽 쳐댔다. 루이스도 루이스지만, 내게도 큰 서운함을 느낀 거 같다.
참고 있는 건 우리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파비아를 내버려두고 우리들끼리 하룻밤을 보낸 게 파비아 입장에선 상당히 화가 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으, 사제도 나빴어. 나도 엄청 참고 있었는데……, 나만 따돌리다니!"
"미안해, 파비아."
이번에는 내가 진짜 잘못한 게 맞아서, 이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잘못을 인정한 뒤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빈다.
한참 동안 내 정강이와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들기던 파비아가 문득 내 오른손에 입을 대고 까득까득 물었다. 그다지 힘을 세게 준 건 아니라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조금 따끔했다.
파비아는 루이스와 비교했을 때 내게 조금 너그러운 경향이 있다. 루이스는 언니라서 봐줘야 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사제이기 때문에 사저인 본인이 이해하고 넘어가줘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
내 오른손에는 파비아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힘을 세게 주고 문 건 아니라서 눌린 자국이 있을 뿐, 상처는 아니었다. 파비아의 가지런한 이빨 모양대로 오른손에 흔적이 남았다.
"이번에는 이걸로 봐줄게. 하지만 다음에는 용서 안 해줄 거야."
파비아가 혀를 쭉 내밀면서 표정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것도 많이 봐준 거다. 내가 사제라는 점을 고려해서, 넓은 아량을 보인 것 같다.
하지만 파비아 입장에서 어젯밤의 일은 꽤 심각한 수준의 배신이었는지, 여권을 찾으러 외출하는 그 순간까지도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툴툴거렸다.
삼 개월 뒤, 내게 자유자재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백신현 자유 이용권' 세 장으로 간신히 합의했다. 루이스도 비슷했다. 다만 사제인 나와 비교해서 루이스에겐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는지 루이스는 다섯 장을 내놓아야 했다.
음, 나도 파비아를 따돌리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어젯밤은 루이스하고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이라서 의도적으로 파비아를 배제했다. 파비아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짐을 체크했다. 점검은 두세 번 해도 모자란 일이다.
원래는 니르바나 사원에 찾아가서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일정이었지만, 도중에 특급 재해들이 우후죽순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일정과 동선이 조금 꼬이고 말았다.
동선을 다시 한 번 체크, 머릿속에 숙지시킨 뒤 여행 가방을 닫는다.
외출할 시간이 되었다.
"그럼, 사제. 선생님! 다녀올게!"
파비아가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리며 인사한다. 다행이다. 백신현 자유이용권으로 마음을 좀 풀어준 것 같다.
"있잖아, 백신현."
"응."
루이스는 파비아와 다르게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이외에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는지, 내게 손짓해서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출발하기 전에,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 그저께……, 네가 내가 질문했던 사실에 대해서야."
그 말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해석되었다.
이틀 전, 나는 루이스에게 내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무의 본질'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때 루이스는 그 질문을 아주 간단한 질문이라고 일축했다.
그때의 대답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그 질문에 대답해줄 마음이 든 걸까.
루이스는 연금술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온 사람이다. 루이스의 눈에만 보이는 게 있는 것일까.
"……."
파비아는 또 다시 따돌림 당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다시 한 번 입술이 튀어나왔다. 루이스는 살짝 파비아의 눈치를 보면서 웃었다. 금방 끝날거야. 그 말은 도대체 누구에게 전한 말이었을까.
"내 생각에……, 네가 추구하고자 하는 무의 본질은……"
"……."
루이스의 말을 들은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걸까.
루이스가 제시한 개념은 나도 알고 있는 단어였지만, 루이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개념을 도저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보이자 루이스가 한쪽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렸다.
"……."
루이스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백신현이라는 인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체감했다.
* * *
오늘은 입산?山 수업이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는 수련 기간이 오래된 만큼 다양한 방식의 수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수련은 지금까지와 비교해서 조금 오래된 느낌이 드는 수행이다.
입산 수행은 기본 중의 기본, 가장 흔하고 자주 보이는 종류의 수행이니까.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공기가 희박한 고산 지대에서 수행을 한 뒤, 해가 저문 뒤에 내려오는 스케줄이다.
제피로스 근처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 하나 있다. 요하네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수행을 선택했다.
이 산은 제피로스 근처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제피로스 산맥이라고 불린다.
정확히는 순서가 반대다. 이 산에 먼저 제피로스 산맥이라는 이름이 붙은 뒤, 그 아래에 지어진 도시에 제피로스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니까.
제피로스 산맥은 여기저기가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바위산이었다. 요하네스는 사람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등산로로 나를 이끌었다.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를 여러 번 내딛으면서 고산 지대로 이동한다.
요하네스는 수련에 임하는 내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질문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어제도 그렇고,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이오?"
"어제와 오늘은 조금 달라요. 컨디션이 좋은 건 똑같지만."
이유가 다르다.
그리고 어제와 비교해도, 오늘의 나는 조금 더 다르게 보일 거라고 확신한다.
"호오, 계기를 들을 수 있겠소?"
바닥에 배낭을 놓고 요하네스가 수행을 준비한다.
나는 천천히 검왕검을 뽑으며 말했다.
"검으로 말하겠습니다."
"좋지, 견식하겠소."
직접 부딪치면 더 좋았겠지만, 요하네스는 사정상 검을 쉽게 부딪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부딪칠 수 없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다. 나는 검왕검을 뽑은 상태에서 천천히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요하네스도 자주 본 움직임이라 처음에는 달라진 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집중하는 기색이었지만, 순식간에 그의 안색이 변했다.
달라진 점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을 눈치챈 얼굴이다.
나의 천변무궁류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스며 들어 있었음으로.
"이전과 비교해서 나아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보다 선명해진 느낌이 드는구려. 그렇군. 그대도 스스로가 추구하고자 하는 무의 본질, 목표를 찾아낸 것인가?"
"그건 모르겠어요."
"……?"
요하네스의 낯빛이 의문으로 물든다.
나는 검을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치면서 대답했다.
"루이스에게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무의 본질'을 들었지만, 루이스에 들은 걸 곧이곧대로 주워 삼키는 것도 좀 줏대가 없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루이스의 통찰이 맞는지 틀린지 검증하는 중입니다."
"루이스? 그렇군, 그녀에게 조언을 들은 것인가."
"루이스는 저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요."
나와 오래 알고 지낸 건 연금술사도 마찬가지지만, 그녀의 경우 무인의 아닌 탓에 통찰이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연금술사도 루이스의 통찰을 들었을 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루이스의 통찰에 동의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백신현을 오래 알고 지낸 두 사람이 그 통찰을 긍정했다.
나 또한 마음 속으로는 루이스의 통찰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그 해석을 납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통찰과 고민이 없는 해석에는 무게가 없다.
방황하고, 고민하고, 고찰한 끝에 나 스스로가 그 표현을 납득할 수 있어야만 '무의 본질'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요하네스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내게도 가르쳐줄 수 있겠소? 루이스, 그녀가 통찰한 그대의 '무의 본질'에 대해서."
"협?"
나는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이스는 그것을 협의지심??之心 이라고 부르더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