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22. 전원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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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잠시 휴식.
밥 먹고 바로 움직이면 체한다.
나는 바닥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었다. 파비아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검왕검 내부의 가상 공간에 진입한다. 파비아도 함께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파비아의 코어에도 나의 마력은 스며들어 있어서, 나의 마력을 출입증으로 인식하는 검왕검의 가상 공간에 출입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나의 코어는 크게 상처 입어서 마력을 다룰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나 자신이 이 과정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검왕검이 내 마력을 인식해서 의식을 잡아 당길 뿐이니까.
소화가 될 때까지는 잠시 가상 공간에서 수련할 생각이다. 희고 흰,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수평선 위에 올라선다.
"넓다아……"
파비아는 검왕검의 내부로 들어오는 일 자체가 드문 편이라 아직도 이 공간이 얼떨떨한 분위기다.
운동 능력이 높고 활달한 파비아와 이 공간은 상당히 상성이 잘 맞다. 주변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끝 없이 뻗은 새하얀 공간의 저편에 백신아가 서 있다.
흰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백신아는 등을 돌린 자세였다. 인기척을 느낀 순간 이쪽을 돌아본다.
"어서 오세요, 검주. 그리고 파비아 아씨."
"응, 신아도 안녕!"
파비아와 백신아. 두 사람이 실제로 얼굴을 마주본 횟수는 몇 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상당히 활달한 성격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빠르게 말을 트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도도도 발소리가 나게 달려간 파비아가 백신아의 오른손을 꼭 쥔다.
백신아도 파비아의 스킨쉽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파비아의 성격과 나를 비교하면서 스윽 눈치를 준다.
"아, 검주도 파비아 아씨를 절반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요. 검주는 다 좋은데, 애정 표현이 좀 부족하신 게 흠이에요."
백신아는 현재, 파비아의 품에 안겨서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파비아는 백신아보다 키가 조금 크다. 비교 대상이 루이스라서 조금 작게 느껴졌을 뿐, 원래 덩치가 있는 편이었으니까.
체구 자체는 꽤 평범한 편인 백신아다. 조금 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사이가 좋다는 걸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난 백신아가 저렇게 순박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됐고. 시작하자."
"네, 네, 알겠습니다."
백신아가 씨익 웃으면서 파비아와 떨어진다. 그리고 수평으로 팔을 들어서 위아래로 천천히 손짓한다. 그 순간 이 가상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에너지가 한 점에 모이면서 인간의 형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말쑥한 남자가 서 있다. 보이드, 정확히는 그의 젊은 모습이다.
허유는 보이드의 몸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보이드의 육체를 자신의 출력을 감당할 수 있는 몸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그의 회춘도 그 중 하나였다.
내게도 그의 젊은 모습은 꽤 각별한 존재이다. 검왕검을 주운 이후, 보이드와의 첫 조우에서 마주친 그의 분신은 지금처럼 젊은 시절의 그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보이드의 젊은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투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음 속의 불씨가 당겨진 듯 하다.
가상 공간 속에서 보이드와의 전투가 시작된다. 지금의 보이드는 과거, 나와 마지막으로 부딪쳤던 그때 당시의 전투력을 재현하고 있다.
보이드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허유의 기술은 모두 보이드의 기술에서 기초하고 있다. 힘과 속도의 차이가 압도적임에도 내가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허유의 기술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 덕에 충격을 흘려낼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빠르게 잡을 수 있었다.
콰직!!
실체화된 보이드의 형상이 칼에 베여 쓰러진다.
그때 당시, 최종결전에서 보이드가 보인 능력은 특급의 영역에서도 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루이스의 추측으로는 약 5위권의 특급 모험가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여러 번의 사건을 거쳐 특급의 실력을 체감하게 된 나는 루이스의 추측이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실, 나의 실력은 아직 최상위권의 특급에게 이빨이 박힐 수준까지는 아니다. 최하위권의 상대라면 충분히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지만 그 이상을 노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가상 공간 속에 실체화된 보이드를 쉬이 쓰러트렸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가상 공간 속에서 보이드의 데이터와 한두 번 붙어본 게 아니라서 그렇다.
나는 이제 눈을 감아도 보이드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검술에 익숙해져 있었다. 공략법을 가지고 있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외워 버릴 정도로 싸웠다.
보이드와 두 번 다시 싸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결을 거르지 않았다.
그와의 싸움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맞서 싸워서 이겨낸 싸움이 아니었다. 그 점이 아쉬웠다.
물론 스페트로와의 싸움도 마찬가지.
나는 이 가상 공간에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승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보이드 정도는 이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졌다.
물론 스페트로는 아니다. 스페트로는 내가 외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해서, 지금껏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무리 외우고 연습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 스페트로와의 싸움이 딱 그 꼴이었다. 가상 공간 속의 보이드를 쓰러트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도 스페트로는 여전히 까다롭다.
차이가 지나치게 큰 탓이다.
허유와의 싸움도 아마 비슷한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 예측된다. 놈이 쓰고 있는 건 보이드의 기술이다. 오히려 검술의 수준이나 실력은 보이드의 원본보다도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보이드와 다르게 허유는 지금의 내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차이는 바로 출력에 있다.
허유가 가지고 있는 힘과 속도가 지나치게 높은 탓에, 모든 공략법을 알고 있어도 도무지 대처할 수가 없다.
"다음."
가상 공간에 실체화된 보이드가 베어 찢어 쓰러진 직후, 백신아는 다시 손을 휘둘러서 또 다른 보이드를 실체화시켰다. 하지만 그 힘과 속도는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빨라졌다.
조금 전보다 힘겹게 쓰러트린 후, 쉰 목소리로 말한다.
"다음."
보이드의 출력을 조금씩 높여 가면서 언젠가 다가올 허유와의 싸움을 준비한다.
맞서 싸우는 보이드의 출력이 5%만 높아져도 상대하는 난이도는 수십 배로 수직상승한다. 예측하고 움직이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게 되니까.
이 정도로 차이가 벌어지게 되면 예측이나 운영보다는 순수한 피지컬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피지컬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가상 공간에서 펼쳐지는 지금의 대결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나 자신의 운영력을 높이기 위해서 최대한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보고 있다. 당연히 모든 전략이 효과를 볼 수는 없다. 나는 수련 속에서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큭!!"
목이 날아가고.
"컥!!"
가슴을 수평으로 찢기고.
"윽!!"
몸이 머리부터 좌우로 양단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의식만을 가지고 데려온 가상 공간. 고통은 현실과 거의 같았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잘려 나갔던 사지가 다시 접착되었다.
몸이 재생한 그 순간 다시 수련이 시작된다.
파비아도 비슷했다. 파비아의 경우,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잊고 있던 기술을 되살리는 쪽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두 사람의 파비아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둘 중 하나는 진짜로, 둘 중 하나는 이 가상 공간 내에서 생성된 가짜였다.
파비아는 짐승처럼 네 다리로 바닥을 짚은 채, 검을 입에 물고 싸운다.
솔직히 저러다가 이빨 다 나가는 거 아닌가 싶은데, 개과 수인이라 뭐가 다르기는 다른 것 같다. 오히려 손으로 검을 휘두를 때보다 훨씬 더 잘 싸우는 걸 보면.
파비아는 과거의 기술을 하나도 모른다. 그저 본능만으로 싸우는 중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육체에 남아있다. 파비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육체에 남은 기억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또 한 사람의 파비아'는 검을 입으로 물어서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검을 좌우로 쪼개서 손등에 부착시켜 싸우는 등 다양한 전술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비아의 무기 자체가 그녀에게 맞춰서 제작된 무기라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아마 금속에 파비아의 체조직이 일부 이식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루이스가 파비아의 검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보통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루이스의 직감은 때때로 나의 논리를 훨씬 앞서 나갈 때가 있으니까.
"크우아아우!!"
파비아는 가상 공간 속의 자기 자신을 쓰러트리고 다음 상대를 요구했다. 백신아가 손짓한 순간, 이번에는 보이드의 모습이 파비아의 눈앞에 나타난다.
지금의 파비아는 특급 모험가의 말석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다. 그에 비해서 보이드는 나와의 최종결전에서 나섰던 그때의 실력 그대로.
전력을 비교해보면 파비아가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 보이지만, 나는 의외로 파비아가 해볼 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비아의 진짜 실력은 보이드가 비교조차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고수이니까.
그 경험을 잘 끌어낼 수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캬앙!"
하지만 아직은 좀 부족했던 거 같다. 파비아가 뭉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소리를 내지른 뒤, "깨갱"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졌다.
울보인 파비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입술을 꾹 깨문 채 참아냈다.
장하다. 솔직히 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파비아가 나날이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게 조금 낙이 되어있다. 우스운 일이지만, 실제로 파비아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힘이 솟아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파비아에게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 세운 뒤, 검왕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며 백신아를 돌아봤다.
"신아 너도 어때? 한 판 붙어보는 게."
"음……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안될 거 같아요."
"왜?"
"손님이 오셨거든요. 검주, 일어나셔야 할 거 같아요."
백신아는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손짓한 것만으로도 가상 공간은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파비아의 의식은 마치 자석의 같은 극끼리 반발한 것처럼 가상 공간에서 쫓겨 나와 순식간에 육체로 돌아왔다.
손님이라, 도대체 누구지? 내가 고개를 돌린다. 그때 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아마 백신아는 벨이 눌리기 전에 손님의 존재를 눈치채고 나와 파비아를 쫓아낸 게 아닐까 싶었다.
벽에 기대어 두었던 검을 들어올린 후, 현관으로 다가갔다. 침을 흘린 채 가상 공간에 들어가 있던 파비아도 핫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조금 전에는 올리비아였지, 그럼 지금은 누굴까? 오늘 하루에만 묘하게 손님이 자주 찾아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원래 이 정도로 왕래가 잦은 장소는 아니라서 더더욱.
문고리를 돌린 순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이었다.
제2위의 특급 모험가 마그누스, 제3위의 특급 모험가 스텔라.
그리고, 사상최강이라고 불리는 제1위의 특급 모험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전해지는 이 나라의 최강자들이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그들은 큰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경지로 따지자면 그들 이상의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한 최강무적의 검사를 스승으로 두고 있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세 사람의 면면을 보고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제1위가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엄지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대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찾아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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