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21.5. 개와 공주 (10)
* * *
파비아를 달래는 데 한참이 걸렸다.
파비아는 꽤 눈물이 많은 성격이다. 겁이 많은 데다가 낯가림도 심해서, 어쩔 때는 진짜로 애 같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하나둘 닦아주고, 서로 이마를 마주댄 채 가볍게 비볐다. 나도 내가 왜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느낌 상 이러한 행동이 효과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비아의 눈물이 그쳤다.
니르바나 사원에 파비아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오직 나 때문이었다. 파비아 역시 허유의 괴물 같은 강함을 보았다. 조금 더 강한 힘을 갈망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루이스가 상반신을 들어서 파비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럼, 내가 파해식을 완성하고 나서 같이 출발할까."
"응."
파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침대 위에서 눈을 잠시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루이스와 파비아는 날 사이에 끼고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눈을 뜨지 않도록 느릿하게 사이에서 빠져 나온다.
그때, 지금까지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신아가 날 향해 이죽거렸다.
「검주, 진짜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검주 얘긴데요. 와, 사람이 진짜 짐승이네요. 볼 때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올 지경이에요. 검주는 칼을 잡는 게 아니라 그쪽 업계로 가셨으면 전설이 되지 않았을까요?」
"……윽."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도 내 성욕의 크기를 잘 알고 있어서 함부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짐승 같았던 것도 맞고.
숫총각 딱지를 너무 늦게 떼어낸 탓일까. 나는 한 번 성욕이 올라오면 살짝 머리가 돌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킬킬킬, 백신아가 손잡이를 진동시키며 웃음 소리를 냈다. 나는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 성욕이 없어서 잘 와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기는 좋네요. 검주가 제대로 남자 구실은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 좀, 야."
「부끄러워 하시긴.」
본인 입으로는 성욕이 없다는데, 그런 것치고는 관심이 상당히 지대해 보인다. 순수한 흥미인 것일까.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 이야기만 계속 하게 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백신아의 말을 끊었다.
짧은 침묵. 그리고 백신아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검주.」
"응."
「검주는 죽으면 안 되겠네요. 검주가 돌아가시면, 과부만 세 사람이 생기는 거잖아요.」
"과부는 무슨…… 아니, 그래, 뭐, 그런 걸로 치자. 그런 걸로 쳐. 나도 모르겠다."
에이, 나도 이제 몰라.
부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고.
적은 강하다. 그리고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이 처음은 아니다. 열네 살의 백신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크고 작은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간 끝에 지금의 내가 있다.
쉽게 말해, 나는 불리한 싸움을 이겨내는 데 빠삭하다.
이제껏 이겨내온 수많은 싸움과 마찬가지로, 나는 또 다시 이겨내고 말겠다.
* * *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때부터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연금술사는 검의 제작에 더더욱 박차를 더하고, 루이스는 본인의 자취방에 틀어박혀서 검왕검의 봉인 술식에 대한 파해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와 파비아가 두 사람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 물론, 내가 머리를 쓰면 파해식을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지금의 나는 코어조차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때까지 몸의 컨디션을 최고 상태로 유지해두는 것이다.
사족 보행의 파비아와 함께 빈집촌의 옥상을 함께 넘나 들었다. 일종의 파쿠르였다. 옥상과 옥상 사이의 간격은 상당히 촘촘한 편이라 마력이 없는 지금의 나도 충분히 오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파비아도 마력은 쓰지 않는다. 나와 호흡을 맞추면서 훈련을 도와주는 중이다.
「파비아 아씨는 센스가 좋네요. 배우는 속도가 빨라요.」
"저건 센스라기보다는 알고 있는 걸 하나씩 다시 익혀 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건물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에서 불필요한 자세나 호흡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파비아는 스스로의 실수를 찾아내고 그것을 교정하는데 매우 능숙했다.
학습하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하지만 파비아의 숨겨진 과거를 고려하면 저건 배우는 게 빠르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다시 익혀 나가는 과정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파비아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한 사람의 파비아, 나의 진정한 사저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자는 검을 휘두르는 기교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 수준은 지금의 제1위나 마그누스와 비교해도 조금 더 높다.
지금의 파비아는 과거의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육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육체에 남아있는 기억이 여러 번 연습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파비아의 몸에 붙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겼다!"
파비아가 파쿠르 도중 처음으로 나를 앞질렀다. 개과 수인의 신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지만, 신체 능력만으로 앞서 나간 건 아니었다.
아직 나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최적의 경로를 선정하고 나아가는 능력이 그 사이에 많이 발전한 것 같았다.
지금의 승리는 그 때문이다.
파비아도 성장하고 있다.
"헥, 하, 후우…… 흐헤……"
하지만 파비아는 개과 수인의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근력과 순발력은 높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골인 지점에 도착한 직후 그대로 쓰러져서 열심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호흡에 여유가 있다. 개과 수인과 순수 인간의 차이다.
완전히 퍼진 파비아가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날 때까지 나는 파비아의 곁에 앉아서 옆자리를 지쳤다.
파비아는 여름날에 외출한 골든 리트리버처럼 혀를 쭉 내밀고 있었다.
파비아는 배꼽이 드러나도록 틀어올려서 묶은 흰 티셔츠 아래에 핫팬츠를 입은 차림이었다. 겨울 날씨에는 조금 못 미더워 보이는 복장이지만, 파비아는 체온이 높아서 운동할 때는 이 정도가 딱 맞는 거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차가운 바닥에 배를 대는 건 나중에 안 좋을 거 같다. 나는 파비아더러 누우라고 겉옷을 벗어서 그 옆에 깔아줬다. 파비아가 뒹굴 굴러서 내게 배를 보인다.
예전에는 조금 살집이 있었지만 그 동안 열심히 운동한 성과가 있는지 파비아의 배도 이제 조금 납작해졌다. 루이스처럼 일자로 복근이 죽 그어져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군살은 보이지 않았다.
"히히히, 간지러워. 사제."
파비아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배를 간질어준다. 개과 수인의 본능이 수면 위로 올라왔는지, 지금의 파비아는 진짜 강아지 같다. 귀는 연신 꼼지락거리고 팔과 다리는 어설픈 자세로 굽혔다.
배를 중심으로 가볍게 문지른 후 파비아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파비아가 구후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느 정도 휴식한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빈집촌의 옥상을 오가는 파쿠르 운동은 순발력과 실전 감각을 살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서, 매일 꾸준히 하면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신 없이 파비아와 함께 건물 옥상을 오갔다. 지금은 건기, 한동안은 햇볕이 쨍쨍할 예정이라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 이 훈련을 하게 될 거 같다.
빈집촌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의 옥상을 한 번씩 밟아본 후,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나도 파비아도 땀으로 젖어서 못 봐줄 꼴이 되어 있었다.
파비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지. 얼른 씻고, 점심 준비를 시작해야 할 거 같다.
아직 파비아는 혼자서 씻을 줄을 모른다. 하지만 연금술사와 루이스는 지금 정신 없이 바쁜 상황. 이건 내가 수고를 좀 할 수밖에 없다.
나도 부끄럽지만, 파비아와는 이것보다 더한 짓도 많이 해봤으니까. 크게 유난을 떨 필요는 없다. 상의를 벗고 씻을 준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일단 연금술사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연금술사는 벨은 물론 노크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는 별 생각 없이 다시 옷을 입고 문을 연다.
"백신현. 몸은 좀 괜찮냐?"
올리비아,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자가 문앞에 찾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나는 잠시 고민한 뒤, 그녀를 자취방 안으로 이끌었다.
"응? 사제, 뭐야아?"
인기척을 느꼈는지 먼저 욕실에 들어가 있던 파비아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파비아는 올리비아와 데면데면하게 얼굴을 익힌 사이다. 조금 경계하는 듯한 시선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그런데 욕실에서 고개만 살짝 내민 파비아의 모습을 본 순간 올리비아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한다.
그녀는 나를 기특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이거, 내가 방해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올리비아가 묘한 오해를 하게 된 거 같다. 오해할 법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최소한 지금은.
……어, 그런데 아주 오해까지는 아닌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파비아는 이제 막 옷을 벗었을 뿐이었다. 샤워는 아직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땀에 젖은 옷을 다시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새 옷을 새로 꺼내서 입혀준다.
만세, 하면 파비아가 두 팔을 높이 들어올린다. 옷을 위에서 씌워준다. 올리비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욕실 안에서 은밀하게 처리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해가 아닌 거 같은데?"
"오해 맞다니까."
아 좀, 진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