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21. 아우터 스페이스 (9)
* * *
자리에서 일어난 진 노인이 내게 친근한 미소를 보이며 등을 두드렸다.
"소개하지. 백신현이라고, 잘 풀리면 내 사위가 될 수도 있는 친구일세."
"사위라……."
조합장의 눈빛이 의구심으로 가득하다. 조금 전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도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기억하고 있던 내 모습과 눈앞의 상황이 잘 매치되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와 나의 마지막 접촉은 불과 반년 전이고, 나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별의별 사건사고에 휘말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보기에는 이래도 상당히 능력이 있는 친구야. 모험가 등급은 아직 3급에 불과하다지만, 실제 능력은 특급을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이라네."
"그런가? 자네가 젊은이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드문데."
조합장과 진 노인은 연배가 비슷한 탓인지 서로 평대를 나누는 사이 같았다.
중절모가 어울리는 인상의 준수한 노인이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워 하는 듯한 얼굴이다. 지금의 나는 코어의 기능이 멈춰 있는 데다가, 왼팔까지 떨어져 나간 외팔이니까.
그러나 조합장의 평가는 내게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내 실력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추후 내가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에 참가하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증명될 것이다.
반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고, 나 자신의 가치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내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난 아직도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기다리고 있다.
"백신현입니다."
조합장의 얼굴을 본 순간 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흥분해서 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담담하게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조합장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이어서 진 노인이 연금술사를 소개했지만, 그녀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내 뒤에 선 연금술사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조합장의 시선이 내 얼굴을 은근하게 훑는다.
"어……, 그런데 자네 혹시…… 나를 기억하고 있나?"
"네, 제게 명함을 주셨죠."
"그랬지.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은 듯 하군."
그의 시선이 슥 움직인다. 지금의 나는 왼쪽 어깨가 없는 외팔이었다. 어찌어찌 의수를 하나 달아 놨었는데, 어제 허유와 부딪치는 과정에서 아예 부서지고 말았다.
별의별 인간군상이 다 모이는 모험가의 세계에서도 외팔이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다음 검정 시험 때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음, 기대하겠네."
말 자체는 부드러웠지만, 나 자신은 이 말을 선전포고처럼 토해냈다.
그래,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무시하고 떨어트렸던 모든 사람들에게 제대로 증명해보이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 백신현이 어떠한 인간인지 증명해보이고 말 거다.
조합장과 악수를 풀고 고개를 돌린다. 진 노인은 아직 미팅 중인 것 같았다.
"진 어르신, 전해드리고 싶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의 미팅이 끝난 후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겠네, 사위."
"실례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나온다. 문을 닫고, 천천히 호흡한다. 인적이 드문 계단 쪽을 통해서 내려가는데 연금술사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꼭 조합장하고 마주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여기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영감이 나오면 그때 다가가는 방법도 있었잖아."
"그런다고 무조건 조합장과 마주치는 걸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조합장이 바깥까지 같이 따라 나오면 어차피 마주쳐야 했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쪽에서 먼저 부딪치기로 한 거죠."
사실 내가 조합장을 피해다니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잘못은 오히려 조합장을 비롯한 당시 시험관들이 잘못했지.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통과자 중에서 내가 가장 우수한 인재였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나를 마력을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떨어트렸지.
그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피해다니면 모를까, 내가 그들을 피해 다닐 이유는 없다.
어차피 내가 다음 시험에 참가해서 통과하면 앞으로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모험가 조합의 1층으로 내려왔다. 로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진 노인 측의 경호원이 다가와서 종이 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펼쳐보니 미팅 장소와 시각이 쓰여 있었다.
아, 여기는 내가 아는 가게다. 창문이 없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술집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자주 쓰이는 장소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연금술사와 시선을 맞췄다.
"먼저 가 있으면 될 거 같네요."
"그럴까."
연금술사는 수도의 지리를 잘 모른다. 내가 앞서 가면서 연금술사를 이끌었다.
『검주를 탈락시킨 사람이라서 되게 기대했었는데,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네요.』
검집 속에 들어있던 백신아가 몸을 흔들었다. 도대체 백신아는 어떠한 인간군상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나중에 물어보면 재미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 같다.
『나중에 검주가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통과하면 어떤 식으로 나오려나. 무척 궁금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면전에 대고 칼을 날려주고 싶은 기분이에요.』
백신아의 목소리에서 호전적인 성질이 감지된다. 하지만 사실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은 백신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애초에 마력이 없던 시절의 나라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의 난이도였고, 그 시절과 비교해서 무시무시하게 강해진 지금의 나라면 눈을 감은 채 도전해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반년 간 나는 수많은 싸움을 넘나들었고, 그 중에서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 정도로 낮은 난이도의 싸움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한 달 전에 있었던 검정 시험에서도 참가하기만 하면 합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내가 큰 전투를 치른 후 보름 정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도전할 수 없었다.
다음 시험에는 참가할 수 있을까. 아니, 당연히 참가할 생각이다.
허유와의 싸움을 뛰어넘은 후에.
* * *
진 노인은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술집에 찾아왔다. 그의 경호원이 문 바깥에 서고, 룸 안에는 그 한 사람만이 들어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진 노인이 마주본다. 연금술사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 사위."
"노인장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려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역시. 사위와 관련 있는 일이었군. 그럴 것 같아서 사위가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네."
"잘못 알고 계신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이제 겨우 열여섯 시간 정도가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벌어진 사건의 밀도는 매우 높다.
나는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한 허유와의 접촉, 그와의 전투.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씩 설명했다.
특히 허유의 강함을 공들여 설명했다. 어제 나와 부딪쳤던 허유는 본체의 힘의 1%도 채 휘두르지 못하는 상태였고, 추후에는 어제보다 몇 배나 더 강해져서 나타날 거라는 사실까지.
"으음……!"
철석간담의 진 노인이라도 그 사실에는 놀랐는지 굵은 눈썹울 꿈틀거렸다.
"아마도 보이드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바깥에서 찾아온 존재'로 추정됩니다. 노인장께서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십니까?"
"……."
진 노인이 침묵했다.
그 침묵을, 나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면 좋을까.
그리고 진 노인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물론 알고 있네. 나도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중원에 있는 본가에 돌아가면 자료가 있을 것이야."
"그건 무슨 소리죠?"
"나도 선대 가주에게 흘러가는 말로 들은 것 뿐이라 자세한 건 알지 못하네. 하지만 먼 과거, 선대 가주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
진 노인은 잠시 호흡을 끊은 후, 건조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존재들이 있고, 그들은 이 세상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다'."
"……그건 그야말로, 제가 마주쳤던 그 존재의 특징과 일맥상통하는 거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네."
잘은 모르겠지만, 진 노인의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전설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선대께서는 내가 알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면 아예 알려주지 않는 게 정상이지. 그런데 굳이 그런 말씀을 내게 남기셨다는 건…… 우리 본가 또한 그들과 모종의 사정으로 엮인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그러한 이유로, 진 노인은 본가에 돌아가면 그들에 대한 정보가 기록된 서책 따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모르는 척 눈을 돌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언젠가는 진실을 걸고 맞서 싸우게 되는 날이 오게 되어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게도 시간을 주게. 그럼 내가 본가에 돌아가거나, 아니면 사람을 시켜서 그들에 대해서 기록한 책을 찾아볼 터이니."
"다른 사람에게 시킬 생각이라면 수양이 깊은 사람에게 지시하세요. 어중간한 사람은 지식을 읽어내다가 오히려 미쳐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심하지."
진 노인은 이후에도 스케줄이 가득 차 있는지, 대화를 끝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네. 사위도 몸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진 노인이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술집을 나선다. 진 노인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지, 대화가 막히지 않고 술술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대화가 답답하지 않아서 그 점은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때, 연금술사가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내가 경고했잖아. 너무 믿지 말라고."
"그건 알아요. 하지만 저 할아버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잖아요. 함부로 제 뒤통수를 쳐서 척을 질 정도로 모자란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뒤통수를 치지 않더라도, 교묘하게 네 행동과 사고를 조종할 수는 있지. 그러한 실력이 충분히 되는 사람인걸."
"제가 그 정도로 모자란 놈은 아니죠."
"그건 그렇지만."
이 점은 동의하는지, 연금술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두고보자고요. 저 할아버지가 선생님이 경고한 것처럼 진짜로 제 뒤통수를 치려 든다면, 그때는 저도 늘 하던대로 맞서 싸워주면 되는 거니까."
* * *
"재미있지 않나?"
술집을 나서는 길, 진 노인은 그의 등뒤에 선 경호원을 보지 않고 말을 걸었다.
키가 큰 경호원은 침묵한 채 바위처럼 진 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보아하니 사위도 자네와 같은 존재인 듯 싶네."
"……."
"바깥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 전사. 따지고 보면 자네의 후배라고 볼 수 있겠군.'
바위 같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을 술집의 입구로 돌린 후, 굵은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