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21. 아우터 스페이스 (8)
* * *
생각했던 것보다 열차표가 빠르게 구해줬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오늘 저녁 차를 타고 바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다.
네 명 분량의 표를 구해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표가 아직 남아 있었구나."
"네, 취소 표가 있더라고요."
샤를로트의 얼굴을 보고 나서 역으로 향했는데, 마침 네 사람 분의 표가 정확히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하고 바로 표를 구했다. 오늘 저녁이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
"이제 더 볼 사람이 있을까?"
"음, 마그누스 대장하고는 조금 전에 회포를 풀었고, 제1위도 사정은 알고 있으니까. 대장을 경유해서 소식을 전하면 될 거 같고. 그럼 이제 한 사람밖에 안 남았죠."
"한 사람?"
"네, 진 노인이요."
"……."
연금술사의 입이 닫혔다.
무서운 게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에게도 껄끄러운 존재가 있었다. 연금술사는 진 노인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껄끄럽게 여기고 있을 뿐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존재조차 드물다.
대놓고 싫어하는 그녀의 태도가 묘하게 신선해서, 좀 더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 할아버지에게도 알려주기는 해야죠. 마침 그 사람에게도 쓸만한 전력이 있으니까. 여차할 때 힘을 빌리긴 해야 해요."
"난 별론데."
"그래도 해야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가 있나요."
그녀를 지나쳐서 전화기로 다가갔다. 번호를 눌러서 요하네스의 사무실에 전화를 건다. 요하네스는 진 노인하고도 친밀한 사이였다. 그를 경유하면 진 노인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을 거다.
『아, 진 노인을 얘기하시는 거군. 알았소. 마침 나도 한 시간 전까지 진 노인과 함께 미팅을 하던 중이었소. 지금 주소를 적어줄 테니, 메모할 준비가 되면 말해주시오.』
"이미 끝났어요. 불러주시면 됩니다."
『과연, 준비성이 좋군. 지금부터 불러드릴테니, 다 적고 나서 내게 확인해주시오.』
요하네스가 불러주는 주소를 메모한 뒤,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그에게 확인을 구했다.
『내게 여유가 있다면 그대를 같이 따라가서 보호해줄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사건의 뒤처리를 하느라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오. 차라리 마그누스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소?』
"진 노인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소리인가요?"
『그렇소. 내게 있어서는 은인이지만, 그분은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명확하여, 한 번 적으로 인식된 사람에게는 자비가 없소.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 중 하나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오.』
"알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내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연락하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요하네스와 전화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연금술사는 거 보라는 듯 나와 시선을 맞췄다.
"최강의 특급 모험가도 위험하다고 하잖아. 네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니까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 영감은 조심해야 해."
"그래도 뭐, 예비 사위라고 점 찍어 놓은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허유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힘을 쓰기 시작하면 위험해지는 건 진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경호원으로 중동 지하 격투계 최강자였던 남자가 붙어 있지만, 그 남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제1위나 마그누스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다.
허유의 힘에는 당해낼 수 없다.
그 노인의 본질은 장사꾼. 허유에 의해서 이 세계가 파괴된다면 그 노인에게도 갈 곳이 없다.
설명만 잘 하면 그 노인의 협력을 받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물론,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 노인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수단을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허유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도 미래는 없다.
놈의 힘을 본 순간 그 사실을 강하게 직감했다.
"정 껄끄러우시면 선생님은 여기 계셔도 괜찮아요. 선생님이 말리시더라도, 전 그 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요."
"……그건 마음에 안 들어. 나도 같이 따라갈래."
연금술사는 내게 져 준다는 듯, 불평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 두 사람은 여기에 남아서 돌아갈 준비를 해 줘."
"왜?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파비아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툴툴거렸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나는 무릎을 굽혀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파비아와 같은 눈높이에서 시선을 마주친다.
"그건 안 돼. 너희 두 사람은 모두 특급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잖아. 너희들을 모두 데리고 가면 협력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선전포고?"
파비아는 여전히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선전포고라는 단어를 알려주고, 그 의미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또 다시 필요한 개념을 하나씩 풀어서 파비아에게 일러준다.
요즘 들어 파비아 때문에 어휘력이 부쩍 높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정확히는, 쓸데없이 어려운 표현을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설명을 더 잘할 수 있게 된 셈이니까, 나쁜 변화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파비아 너에 대해서는 그 노인도 잘 모르는 점이 많아. 네 존재까지는 알고 있겠지만, 네 진짜 실력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
파비아와 진 노인은 검은 검사와의 전투가 있기 전,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마주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파비아는 내게 의해서 코어가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 노인은 그녀의 진짜 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은 한 배를 탄 입장이지만, 언젠가 진 노인하고 반목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아직 진짜 힘이 알려지지 않은 파비아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할게, 파비아. 네 사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어?"
"……."
파비아는 내 사저였다. 함부로 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파비아는 내가 진지하게 말하면,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줄 아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행동이 더듬거릴 뿐,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니까.
"사제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알았어. 루이스 언니랑 손 꼭 잡고 있을게."
"그러지는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이해해줘서 고마워."
파비아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 머리를 살짝 당겨서 이마를 맞댔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루이스는 조금 껄끄러운 얼굴이었다.
"둘이서 가도 괜찮겠어? 코어를 쓰지 못하는 지금의 너는…… 잘 쳐도 2급 수준 이상은 어려울 텐데."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내 마력은 있든 없든 차이가 거의 없어서, 애초에 내 코어의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할 거야."
끽해야 마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에 비해서, 나의 마력은 거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니까.
"그리고 여차할 때는 신아도 있으니까. 내가 이 꼴이라도, 이 녀석의 힘을 빌리면 도망치는 정도는 가능할걸."
또한 진 노인은 나와 가면 검사를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면 검사의 역량은 그도 알고 있을 터.
함부로 싸움을 걸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좀 껄끄럽기는 해."
"이제 와서? 그럼 안 가면 되는 거 아냐?"
"진 노인이 껄끄러운 게 아냐. 그 사람이 지금 미팅 중인데, 미팅 중인 상대가 나하고 안 좋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루이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요하네스에게 들어서 받아 적은 메모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지금, 진 노인은 수도의 모험가 조합에 있어. 그리고 미팅 중인 상대는 수도의 모험가 조합을 이끄는 조합장이면서, 상급 모험가 시험이 시작되었을 때 최고 시험관 자격을 맡는 사람이지."
"……최고 시험관이라고? 그럼 혹시……"
"맞아. 진 노인은 지금 날 떨어트린 사람과 미팅 중이거든. 그래서 좀 껄끄러워."
지금도 떠오른다.
자네는 능력도 있고 안목도 있고 다 좋은데, 마력이 없으니까 합격은 못 시켜주겠다던 그 인간의 얼굴이.
그 사람은 수도의 모험가 조합을 담당하는 조합장이었다. 그리고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담당하는 최고 시험관 자격도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으로 공교로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뭐, 내가 진 노인을 만나러 찾아가더라도 미팅 중인데 설마 나를 올라오라고 하진 않겠지. 미팅이 끝나고 나서 나를 만나줄 가능성이 높아."
"그럼 된 거 아냐?"
"그건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그 할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잖아. 선생님의 친할아버지니까."
"그건 무슨 소리?"
"사고 방식이 이상한 건 건 똑같잖아요."
연금술사가 나를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때렸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다지 닮지는 않았지만, 성격만 봐도 진 노인과 연금술사는 한 핏줄이다.
나는 솜털이 간지럽히는 정도의 충격밖에 받지 못했다. 연금술사의 공격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
"그리고 진 노인은 날 거의 예비 사위로 보고 있는 거 같던데…… 그 할아버지의 성격이라면, 난데없이 나를 미팅 자리에 소환해서 소개시킬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옛날 사람들은 그런 거 좋아하니까."
루이스는 예비 사위라는 키워드에 움찔했지만, 내 의견에는 동의했다.
역시 그렇지? 나도 그게 신경 쓰여서 조금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다. 지금 진 노인하고 미팅 중인 상대는 나하고 그다지 좋은 인연으로 엮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 간다는 거야, 아니면 안 가겠다는 거야?"
"가기는 가야지. 그냥, 좀 껄끄러워서 푸념 한 번 해봤다."
내게 있어서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니까.
나는 내가, 그때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에 응시한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인재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하지만 오늘 진 노인하고 만나서 협력을 요청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것은 피하기만 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내가 다시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에 응시하면 한 번은 마주치게 될 상대였다.
이렇게 된 거 조금 일찍 부딪치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 * *
진 노인은 지금 모험가 조합에서 조합장과 미팅 중이다.
요하네스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정작 내게는 찾아오지 않은 거지? 애초에 보이드의 실종 소식을 내게 전한 것은 진 노인이다.
보이드의 실종, 그리고 그 직후 벌어진 어제의 사고.
그가 두 사건 사이의 연결 고리를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당연히 보이드를 감옥에 집어 넣은 내게 연락이 와야 정상인데.
그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의 행적에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다.
연금술사와 함께 모험가 조합으로 들어간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다.
나와 대등한 체구, 조금 까무잡잡한 얼굴.
진 노인의 경호원이다.
"……."
그도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진 노인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경호원은 곧 다른 부하를 불러서 위로 올려보냈다.
과연 진 노인은 나를 여기에서 기다리게 할까, 아니면 위로 올려 보낼 것인가.
곧 위로 올라갔던 부하가 다시 내려왔다. 그들은 잠시 귓속말로 상의하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호출이다. 위로 올라가라."
"……."
느낌상 이렇게 될 거 같았다.
연금술사와 잠시 시선을 마주친 후, 계단을 올라 모험가 조합의 2층으로 향한다.
회의실의 입구에도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내가 접근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노크한다. 안쪽에서 고풍스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입의 허락이 떨어졌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고리에 손을 얹은 뒤,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이 열린 순간 네모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남성의 시선이 이쪽으로 움직였다.
"……잠깐만, 혹시 자네는?"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때, 조합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