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21. 아우터 스페이스 (4)
* * *
가끔씩 그런 게 있다.
꿈이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자각할 수 있는 꿈.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제삼자의 위치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얼굴은 상당히 앳되 보인다.
입은 옷은 교복. 나는 그 뒷모습을 본 순간, 그것이 열네 살 시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목길에서 등을 돌리고 나오는 소년, 그것이 나였다. 교복은 피투성이로 젖어 있어서, 주변에 즐비하게 세워진 빌딩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아, 기억난다.
이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직전에 보았던 풍경이다.
* * *
"……."
향 냄새가 났다.
나는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창문은 없고, 문은 장지문. 여기는 어디지?
마지막 순간까지 허유의 검에 대항한 끝에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연히 연금술사가 고쳐주겠거니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상반신을 일으킨다. 피부가 따끔따끔하다.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나는 상반신에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았다. 상반신과 오른쪽의 팔뚝, 그리고 얼굴에도 빽빽하게 침이 꽂혀 있었다.
어, 그러니까 혹시 연금술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치료해준 건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연금술사의 스타일은 아니다.
몸이 아프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일까, 묘하게 머리도 몽롱해서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얼굴과 상반신에 꽂혀 있던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일단 장지문 바깥으로 나가서,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다른 사람들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지. 그 사실을 알고 싶다.
벽에는 나더러 입으라는 듯 편하게 입는 무복이 걸려 있었다. 조금 작긴 하지만 입을 수 있다.
장지문을 열고 바깥으로, 바깥은 이제 막 동이 튼 것 같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흐릿한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종 소리가 울린다.
여기는…… 혹시 절인가?
절의 마당을 가사를 입은 승려가 쓸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합장을 한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합장을 했다.
승려에게서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이 느낌은 마력이지만, 상당히 청량한 느낌이 든다.
마력을 다루는 승려……, 거기다가 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부지까지.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신현아."
"선생님."
그때, 절의 오른쪽 부지에서 연금술사가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그녀의 옷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전투 복장이라서, 나는 내가 기절한 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선지 연금술사의 낯빛이 조금 안 좋다.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하다.
"선생님, 안 주무셨어요?"
"그런 것도 있고, 널 치료하느라 마력을 다 써서 조금 기운이 없어."
아,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에게서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내 마력은 상당히 충만해서, 내용물이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림의 치료 방법 중에서도 특히 독한 걸 썼거든. 그런데 그걸 버텨내기 위해서는 너 자신의 마력으로 중화를 시켜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네 코어는 지금 쓸 수 없는 상황이야."
"……그렇죠."
오른손을 가슴에 얹는다. 코어에 마력은 가득 차 있지만, 마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처럼 마력이 흘러 나오지 않았다.
내 짐작대로라면 최소한 일주일은 회복에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너의 마력과 나의 마력은 거의 성질이 같잖아. 그래서 내 마력으로 대신 중화하면서 치료시킨 거야."
그래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구나.
마력을 쓰지 못하는 연금술사는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형편 없으니까.
"그런데 잠시만요, 소림이요? 그럼 여기가 그 소림사예요?"
"응. 1위하고 마그누스의 연줄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 그 두 사람은 니르바나 사원에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소림하고 가까운 사이이잖아."
연금술사가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부터 마당을 쓸고 있던 승려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 일단…… 안에서 계속 이야기할까."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방에 연금술사가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이부자리를 개서 올리고, 내 몸에 꽂혀 있던 바늘도 한쪽으로 치웠다.
"네가 쓰러진 건 지금으로부터 여덟 시간 전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해?"
"네. 보이드의 몸을 차지한 이상한 놈하고 싸웠고, 간신히 보이드의 몸을 손상시켜서 약화시켰지만 끝장은 내지 못했죠. 그리고 그 녀석이 3개월 뒤에 다시 붙어보자면서 제멋대로 도전장을 보냈고."
"뇌에 이상은?"
"어, 딱히 없는 거 같은데요. 살짝 머리가 몽롱한 걸 제외하면 멀쩡해요."
"그래도 나중에, 하산한 뒤에 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럼 그렇게 하죠."
연금술사의 태도가 묘하게 조급해보인다. 그녀 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루이스하고 파비아, 그리고 신아는 어디에 있는 거죠? 절 냄새가 싫어서 바깥에 있나?"
"원칙상 소림사에는 날붙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게 금지되어 있어. 그래서 세 사람은 지금 소림사 근처에서 대기 중. 아마 경계를 서고 있을 거야."
음, 무당파의 해검지 같은 곳인가.
소림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문제다. 소림사는 서로 이어진 세 개의 봉우리에 하나씩 절을 세워 두었는데, 그 중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도 있으니까.
다들 무사한 거 같으니, 그 점은 다행이다.
"소림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면, 저도 꽤 심하게 다쳤나 보네요."
"응. 부상도 부상이지만, 내 코어에 묘한 암기?? 같은 게 스며들어 있어서 회복을 계속 방해했어. 나의 힘으로 치료를 진행했다면 죽지는 않았더라도 뇌에 큰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아."
"윽, 그래서 뇌에 이상이 없냐고 물어보신 거구나."
나는 이마를 살짝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
보다시피 나의 사고 능력은 무사하다.
소림의 치료가 제대로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소림의 치료가 그 정도로 대단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그 부상이 하루만에 고쳐질 건 아니었는데."
"소림은 몸 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인체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해박해. 나는 평소에 소림이 땡중밖에 모이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을 조금 고쳐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물론 흉터가 없는 건 아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등에도 찢어진 흉터가 있었으니까.
그때, 나의 부상은 골절상 뿐만 아니라 척추가 틀어지고 골반뼈가 아작이 나는 등 결코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도 놀랍도록 빠르다.
이것이 구파일방 중 제일이라고 불리는 소림의 저력인가.
연금술사도 어디 가서 뒤쳐지는 사람은 아닌데, 그런 그녀의 솜씨와도 구분되는 수준이라니.
역시, 세상은 넓구나.
"음음, 불이 켜져있군. 신현아, 일어났으면 혹시 들어가도 되겠니?"
그때 장지문 바깥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실루엣은 마그누스다.
나를 소림으로 이끈 것이 마그누스와 제1위가 가지고 있는 소림의 연줄 때문이었으니, 이번에는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저 사람 퇴근해도 되나? 어디 아프진 않아?
"들어오세요."
"실례하마."
그는 몰래 병원에서 빠져 나온 사람처럼 환자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그누스가 어째서 이 일에 끼어들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허유의 공격은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흩뿌렸으니까. 마그누스도 특급 모험가라면 그 파장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고, 그 자리에는 내가 쓰러져 있었다.
마그누스는 내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나를 소림사로 이끌었을 것이다.
"몸은 좀 어떠냐, 일어날 수 있겠어?"
"네. 멀쩡해요. 소림사의 수준이, 대단하네요."
"그렇지? 여기 방장 할아버지 솜씨가 보통이 아니거든."
그는 씩 웃으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품에는 과일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이거, 나를 병문안 온 사람들이 사다준 것인데 너한테 주마. 나보다는 네게 더 필요할 거 같아."
"……잘 먹겠습니다."
마침 출출했던 참이다. 고개를 숙이고 과일 하나를 손에 쥐어서 콰득 베어문다. 청량한 맛이 몸속에 확 퍼지면서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 먹고 나서 나하고 같이 방장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꾸나. 소림에 신세를 졌으면, 당연히 인사를 해야지."
"네."
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과일을 하나씩 씹어 삼킨다. 지쳤을 때는 역시 고기보다는 과일이다. 혈관 속에 에너지가 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어제 일어난 소동은 스텔라와 요하네스가 수습하는 중이다. 민간인 피해는 없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마그누스는 내가 묻지 않은 질문에도 먼저 대답하면서 나를 안심시켜주고 있었다. 나를 아끼는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현장에 네 친구도 찾아왔었는데, 잘 설명하고 돌려 보냈다. 나중에 한 번 찾아가도록 하거라."
"제 친구요?"
"란즈 가주의 비서로 있는, 머리카락이 파란색인 친구 말이다. 네 친구 맞지?"
"아, 네. 맞아요."
올리비아였구나.
마그누스와 올리비아는 스페트로 가문을 둘러싼 사건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대략적인 인간 관계를 파악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란즈 가주도 특급 모험가이고, 올리비아도 1급이다.
아마 도시 전체를 뒤흔든 진동을 느끼고 움직였지만 제1위와 2위와 비교해서 찾아오는 게 늦었던 탓에 닭 쫓던 개처럼 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쩌다보니 내 선에서 끝을 내긴 했지만, 사실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나와 부딪친 그때도 겨우 1푼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재수도 없지. 최근 들어 꼭 지뢰밭 위를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걸 건드려도 사건이고, 저걸 건드려도 사건이다.
요즘 들어서 왜 자꾸 이러지? 갑자기 불행의 별 위에 태어난 것마냥 별의별 희한한 사태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굿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마침 여기는 소림사니까, 조언을 좀 들을 수 있을까?
"……음, 종이 울렸군."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마그누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처럼, 장지문 바깥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새벽 일과가 끝난 거 같으니까, 이제 슬슬 나가보자. 지금이라면 방장 어르신을 뵐 수 있을 거다."
"네."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직 몸에 피가 좀 부족한 탓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연거푸 주저 앉고 말았다.
연금술사가 내 옆에 서서 몸을 부축한다. 마그누스도 나를 도와주고 싶어했지만, 연금술사가 거부했다.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선다.
장지문 바깥으로 나가서 불당으로 들어간다.
소림사는 상당힌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불당까지의 거리도 보통이 아니었다. 무당과 쌍벽을 이루는 구파일방 제일의 세력이라는 것이 피부로 실감된다.
하물며 여기는 본파도 아니고 해외에 파견한 분파.
그럼에도 이 정도 크기라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해외에 위치한 시설인 만큼, 본파에 비해서 수많은 제약이 걸려 있을 텐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는 의미가 되니까.
소림사를 이끄는 속가의 방장이 그 정도로 우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불이 피워진 불당 앞에 가사를 걸친 어깨가 넓은 승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그누스가 입을 열었다.
"백율 대사大?, 신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미타불."
승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눈동자는 푸른색이고 수염은 노란색이다. 전형적인 이 대륙 사람의 특징이라서, 나는 그가 이 대륙 출신으로 소림 속가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선, 실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의 이름은 소림으로 귀의하면서 새로 개명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백신현 시주. 의식을 되찾은 것 같아서 다행이오. 이 소림의 의술로도 쉽게 회복시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소이다."
"신세를 졌군요. 감사를 표합니다."
나도 이것이 예의인가 싶어,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백신현 시주. 실례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귀하에게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네, 질문하십시오."
인사치레를 끝마친 후 백율 대사가 나와 은근히 시선을 맞추면서 입을 열었다.
"귀하는 검왕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