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21. 아우터 스페이스 (3)
* * *
"호……"
허유는 감탄했다. 보이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백신현의 모습과, 현실의 백신현이 비로소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드의 기억에 의하면 백신현은 악은 아니다. 하지만 선은 더더욱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선도 악도 아닌 전혀 다른 영역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전투를 준비하기 전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루이스와 파비아를 전력에서 제외한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상당히 위화감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진실을 깨달았다.
수라파쇄일대겁????一大?.
지금의 기술을 끌어내기 위해서 백신현은 허유의 사고를 유도했다.
민간인이라는 키워드는 허유로 하여금 범위가 넓고, 큰 피해를 발생시키는 기술을 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수라파쇄일대겁이라는 기술은 너무나도 강력한 위력과 넓은 범위를 대가로, 기술을 쓰기 전에 아주 짧은 대기 시간을 요구한다.
그 대기 시간을 노려서 파고드는 것 자체가 백신현의 목적.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다.
허유를 보이드의 몸에서 쫓아내는 조건은 그의 공격을 세 번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보이드의 몸을 허유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파괴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승리 조건.
허유가 웃었다. 보이드의 입가가 쭉 찢어진다.
젖은 뗄깜처럼 타닥타닥 불씨만 튀기고 있던 그의 영혼에 불이 붙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허유의 혼이 유희??의 색채로 물들었다.
"……."
천변무궁류의 제삼검과 제이검. 그리고 제일검.
세 가지의 기술이 조화롭게 혼합되어서, 삼위일체의 이치를 칼끝에 휘어감았다.
초근거리로 파고든 칼날이 보이드의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해, 왼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일참一?을 새긴다.
백신현이 신발 밑창을 바닥에 마찰시키면서 빠르게 정지한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이드의 육체에 깊은 상처가 새겨지면서 허유가 무력화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백신현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허유의 칼끝에 맺혀 있던 마력이 보이드의 육체가 크게 손상된 그때 제어를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마력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그대로 방치하면 이 일대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그건 안 된다. 아직 제이검의 지속 시간은 조금 남아있다. 백신현이 고개를 들어 소리친다.
"루이스!!"
그때, 루이스는 이름이 불리기 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칼을 바닥에 대고 그대로 달린다. 삼각형의 진이 순식간에 백신현과 마력 덩어리를 감싸는 모양으로 그려진다.
삼각형은 삼위일체의 원리에 따라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마법진으로 분류된다.
단순한 모양이기 때문에 변수를 끌어내기 어렵고, 한계가 명확하지만 그 구조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바닥에 새겨진 삼각형의 마법진에 연금술사가 마력을 공급했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에 희미하게 빛이 감돈다.
백신현의 코어가 그 마력에 공명했다. 애초에 연금술사의 목적이 그것이었다.
그와 연금술사의 마력은 거의 같은 성질을 띄고 있다. 같은 성질의 마력을 서로 공명시켜, 일시적으로 그 출력을 높인다.
"천변무궁류, 제오검……!"
제어불능의 상태로 폭주하던 허유의 마력이 백신현에게로 유도되기 시작했다.
천변무궁류의 제오검은 마법, 화살 등을 포함한 원거리 공격의 제어권을 빼앗아서 되돌려주는 반격기다.
대기 중의 마력을 제어하는 특성을 최대한 살린 초식으로서, 그 원거리 공격이 보다 순수한 마력에 가까울수록 제어의 난이도는 내려간다.
마력을 연소시켜서 사용하는 원소 마법이 가장 어렵고, 이기어검술은 그 다음, 화살이나 탄환 등의 투사 무기는 조금 쉬운 편이다.
그리고 순수한 마력을 사출하는 기술은 가장 쉽게 제어할 수 있다.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천변무궁류의 요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큭……!"
하지만 쉽지 않다. 마치 대륙에 사슬을 걸고, 힘으로 끌어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무게다. 제오검의 원리에 따라 간섭은 성공했지만, 간섭한 순간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팔과 다리에서 다시 한 번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미 뜯어지고 갈라진 자리였다. 제이검의 압력으로 바깥에서 누르고 있었는데, 그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계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다.
이 어마어마한 마력을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까 방향을 유도한다. 고개를 든다. 마력의 방향을 위쪽으로 틀었다.
허유의 칼끝에서 시꺼먼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밤의 어둠보다도 짙고, 어두컴컴한 것이어서 어둠 속에서도 구별이 잘 되었다.
검은 마력이 밤의 어둠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 * *
죽겠다.
아슬아슬하게 허유의 공격을 걷어낸 직후, 제이검의 지속 시간이 다 되었다. 아드레날린의 분비에 의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고통이 한 번에 파도처럼 몰려왔다.
고통을 참아내는 호흡을 써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회전하는 칼날이 혈관 속에 들어와서 내부를 파헤치는 듯한 감각.
지나치게 큰 고통은 사람을 미쳐 버리게 한다던데, 지금의 내 상황이 그렇다.
고통 때문에 시야가 여러 번 깜박였다. 마치 점멸하는 것처럼, 불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온다.
쿵!!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오른팔은 축 늘어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가 의지로 움직이고 자시고,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오른팔이 파괴되었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는 고개도 들 수 없었다. 부서진 건 팔과 다리이지만, 그 무게를 감당한 축추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 몸은 물리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아직 그 녀석이 끝장났다는 보장은 없어. 고개를 움직여서 정면을 본다. 보이드의 육체 또한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천변무궁류의 검사다. 그러니까 알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재미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쓰러져 있던 보이드의 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칼날이 베고 지나간 자리에는 타르처럼 검고 끈적끈적한 질감의 액체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면서 찢어진 부분을 접합하고 있었다.
내 검은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인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가 몸을 돌린다. 지금 보이드의 얼굴을 움직이고 있는 건 허유의 의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그의 안면 근육은 피곤에 젖은 티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로군. 우직한 거 같으면서도 교활하고, 교활한 거 같으면서도 우직하다."
나를 향해 돌아선 보이드는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검은 제대로 내게 닿았다. 이 이상의 전투 행위는 내게도 위험해. 다 죽이고 갈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이 세계에서 쫓겨 나고 말 테니까."
"……."
허유가 루이스를 돌아본다. 그의 태도는 여유로웠지만, 나의 일검이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가 제대로 공격하면 동귀어진을 노릴 수도 있는 수준까지 전력이 감소한 상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그의 품 안에서 낡은 양피지가 하나 나온다.
신기하게도 양피지는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온 순간 그대로 공중에 떠오르더니, 빛이 나는 문자를 허공에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기한은 3개월 후가 좋겠군. 나 또한 이 인간의 몸이 나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게 개조하는데 시간이 소모될 테니."
"뭐……, 라고……?"
"그대도 이런 형태로 끝을 보는 건 아쉽지 않나. 이대로 끝을 내는 건 서로에게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내 나름대로 묘수를 떠올린 것 뿐이다."
허유가 보이드의 안면 근육을 일그러트린다.
"도망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대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내가 그대를 직접 찾아갈 테니까."
"……."
"대결 한 달 전에 다시 찾아와서 자세한 일정과 위치를 알려주러 오겠다. ……음, 그냥 싸우는 건 재미가 없을 거 같고. 규칙을 설정해서 놀이처럼 놀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은데. 이건 나중에 고민을 좀 해볼까."
그는 나보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혼잣말을 입에 담았다.
내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은 허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재미있었다. 오늘따라 갑자기 하위차원의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더라니. 오래 살다 보면 이러한 즐거움도 있는 법이구나."
내게 있어서 목숨을 걸었던 사투가 그에게는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 허유는 등을 돌린 채 웃고 있었다. 등을 돌린 뒷모습에서 그의 흡족한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 쾌차하거라, 인간이여."
허유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흐릿하게 옅어지더니, 이내 흔적을 보이지 않고 사라졌다.
분하다.
나의 사투가 그저 유희로 소모되었다는 사실이 괴롭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깊이 안도했다는 사실이다.
안도했다고? 결국 적의 동정을 사서 목숨을 구하게 된 거나 다름없는데, 그게 분하지도 않아?
분노, 그리고 자기혐오가 힘이 빠진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주먹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이를 바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악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부서지고 파괴된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마치 모니터의 코드를 뽑은 것처럼, 나의 의식이 빠르게 끊어졌다.
* * *
"……위험해."
연금술사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백신현의 몸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육체적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코어 또한 일시적으로 기능이 정지한 상태다. 본래 써서는 안 되는 힘을 끊임없이 남발한 결과물이다.
한계에 도달한 백신현의 몸은 쓰러진 채 발작하고 있었다.
피웅덩이 속에 잠긴 채 발작하는 몸뚱이는 죽기 전의 단말마라도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미 한계에 달한 데다가 발작 상태에 빠진 몸은 이제 연금술사의 마법으로 고칠 수 없다.
응급처치로 목숨을 붙여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다.
연금술사의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조금 전의 공방의 후유증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백신현의 몸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치료를 방해하는 중이다.
회복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저주 같은 것이 치료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다.
회복이 늦다. 이대로라면 뇌에 도는 산소가 부족해져서 뇌에 큰 손상을 입게 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야해. 연금술사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면서 회복에 집중하는 한편, 점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등뒤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요하네스."
"그대는 입원해 있었을 텐데, 몸은 좀 괜찮은 것이오?"
"상관 없어.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저주로군. 격상의 존재가 호흡하듯이 토해내는 기운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게 된 거 같소."
고개를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는 한데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복시킬 수 있는 수단은 있겠소?"
"내 힘으로는 무리야. 너도 그렇지만, 나도 몸 쓰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겠군."
"아마도."
마그누스가 살짝 눈을 가늘이며 입을 열었다.
"소림少?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