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21. 아우터 스페이스
* * *
거지 같은 기분이다.
결국, 내가 보이드에게 '그 존재'에 대해서 추궁하고, 보이드는 나와 대화하던 도중에도 내게 '질투'와 '증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 정체불명의 정신체가 보이드의 몸에 강림했다, 그런 의미인데.
진짜, 재수 한 번 더럽게 없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눈앞의 적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느낀다. 전신의 세포 하나 하나가 강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저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서는 안 되는 생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놈의 상태를 관찰한 끝에 알아낸 사실이 있다.
"그래서, 넌 보이드의 소원을 이뤄줄 생각인가?"
"그럴 이유는 없다."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한 존재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 인간의 감정에 흥미가 있어서 내려왔을 뿐. 마땅한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 이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유희가 될 거 같구나."
그 말에서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깊은 비인간성을 느꼈다.
장난삼아 개미집을 무너트리는 유아적인 성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말과 태도가 매우 자연스럽다.
스스로의 존재를 억지로 과시하려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감이 있다.
인간과 명백히 구분되는, 격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천천히 호흡했다. 지금까지 내가 맞서 싸워온 존재 중에서 최강은 스페트로와 요하네스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가늠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다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지각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듯한 기분이 든다. 마력의 크기 자체는 코어가 무사하던 시절의 보이드와 큰 차이가 없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마력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나는 호흡을 토해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안 되겠지. 지금의 보이드는 네 힘에 익숙해지지 않았어. 함부로 힘을 휘두르면 그 육체는 붕괴하고, 정신체로 돌아간 너는 다시 원래 있는 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다."
"그것을 꿰뚫어 보았나."
"보이드의 코어를 수복하고 육체를 회춘 시킨 것도 같은 이유겠지. 마력을 쓰지 못하는 노인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니까. 그렇지 않나?"
"정확히 보았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이 인간의 몸으로는 내 힘을 감당할 수 없어. 지금의 내가 끌어낼 수 있는 힘은 아마 본체의 1푼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마저도 세 번까지밖에 휘두를 수 없다."
본체의 1푼…… 즉, 1%.
지금 느껴지고 있는 힘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가.
도대체 그 본체라는 건 정체가 뭘까.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눈앞의 존재가 보이드가 표현했던 '바깥의 존재'라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바깥'의 지식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그 아주 작은 편린에 조금 접한 것만으로도 파비아와 요하네스가 광기에 빠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러한 세계에서 큰 부담 없이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겁 먹을 필요는 없다. 결국 눈앞에 있는 건 본체의 1%도 되지 않는 힘을 휘두르고 있을 뿐인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 또한 연금술사가 설명했던 악마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경유하지 않으면 이 세계에 남지 못하는 제약이 있는 것 같다.
보이드의 몸을 파괴하고 그 삶에 완전히 종지부를 끊어 버리기만 해도 충분하다.
여기에서 끝을 내야 한다. 저기 서 있는 존재가 보이드의 육체를 지금보다 더 강화해서 가용할 수 있는 출력이 높아지면 많이 곤란해진다.
"공격할 생각인가."
"……."
"그것도 좋겠지. 어서 시작해 보아라. 비록 삼 초밖에 싸워줄 수 없는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
하지만 제약이 걸려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백신아가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검주, 저한테 몸 안 넘기고 뭐 하세요?』
'안 돼.'
『네?』
'느끼지 못했어? 지금 이 순간, 보이드의 술식이 저 녀석의 몸에서 펼쳐졌어. 보이드는 미리 준비를 해 둬야 쓸 수 있는 술식이었는데……, 그걸 지금 어마어마한 출력을 써서 우격다짐으로 펼쳐 놓은 거야.'
처음부터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저 존재의 말이 끝난 직후, 부지불식간에 빠르게 술식이 발동되었다.
백신아가 느끼지 못한 이유는 짐작간다. 애초에 저 술식 자체가 검왕검의 사각을 찌르는 기술이었다.
검왕검의 제작에 참여한 스탭인 보이드는 검왕검이 감지 하지 못하는 교묘한 형태로 이 술식을 제작하였다.
워낙 지독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수순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보이드의 대? 검왕검 술식. 그 효과는 검왕검의 기능을 일부 차단하고, 천변무궁류를 봉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술식에는 그에 맞는 제약이 존재한다. 나는 보이드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술식의 핵을 찾아내고,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검왕검과 천변무궁류의 봉인을 풀었다.
생각보다 구멍은 많은 술식이다. 검왕검의 기능을 봉인하는 건 말 그대로 일부에 지나지 않고, 천변무궁류 봉인 역시 공간 중의 마력을 둔화시키는 정도라서, 지금의 내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조금 마력의 흐름을 둔화시킨 정도로 내 천변무궁류를 봉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상대는 스페트로와 요하네스조차 비교할 수 없는 적이다. 고작 1%의 힘을 휘두르고 있는 게 그 정도다.
보이드의 원본과 다르게 지금의 술식은 압도적인 출력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완화시킨 채 쓰인 것이다. 즉, 술식의 중추를 구성하는 핵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지금부터 다가올 세 번의 공격을 나는 백신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버텨야……
"……초심을 잃었어, 초심을."
"흠?"
나는 무심코 한심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야, 난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 거지.
백신아의 힘이 없으면 이제 제대로 싸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전락해버린 건가.
나는 그게 싫어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수행을 거듭해온 게 아니었나. 백신아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반푼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백신아는 강하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지만 그 녀석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백신아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분 뿐.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계가 명확해서, 거기에 기대기만 하면 안 된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온갖 다양한 위기 앞에서, 나의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처음 검을 쥔 그 순간부터 쭉 그렇게 생각해 왔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나약한 마음이 삐져 나온 것 같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흔들릴 것 같은 정신을 붙잡는다.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가 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루이스, 그리고 모두들."
"응."
"저 녀석의 공격은 내 혼자서 막아볼게."
"뭐?"
루이스는 크게 놀란 얼굴이었지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적어도 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버티는 데에만 집중하면 나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저 자식이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그 피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 거 같은데, 너희는 그게 민가로 향하지 않게 막아줘."
"……."
버티는 건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으로 장담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
그 이외의 요소까지 커버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으……, 아아……"
그때, 등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천변무궁류의 감각으로 그 신음 소리의 주인을 느끼고 있었다.
파비아다. 바닥에 주저 앉은 파비아가 연금술사의 품에 안긴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파비아의 표정이 보인다. 파비아는 강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강적 앞에서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던 파비아가 눈앞의 존재에게 몸을 떨고 있다는 건 내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파비아의 광증 또한 '바깥의 존재'에 접촉한 것이 원인이다.
그와 같은 부류의 존재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아. 응……, 알았어……, 사제……"
하지만 파비아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식은땀에 젖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신아 너는, 크게 느끼는 게 없어?'
파비아는 눈앞의 존재에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백신아는 어떨까.
파비아와 보이드가 바깥의 파장과 접촉하게 된 건 검왕검의 제작 도중이었다. 검왕검에 바깥의 지식이 쓰였을 가능성은 높다.
『그다지, 느껴지는 건 없는데요.』
그런데 파비아와 다르게 백신아는 조금 초조하게 보일 뿐,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할 수 있겠어요, 검주? 출력의 차이가 너무 커요. 세 번만 버텨내면 된다지만, 전 솔직히……』
'그래도 해야지, 다른 길이 없잖아.'
지금의 백신아는 나를 걱정하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기시감을 느끼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의문이 느껴진다. 하지만 굳이 후벼팔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한 존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숙련자의 영역에 오른 천변무궁류의 검기가 보이드의 술식을 무시하고 마력의 흐름을 끌어 들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검은 검사'의 천변무궁류 파해식마저 무너트린 내게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보이드의 육체를 차지한 존재가 흡족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호, 이 인간의 기억 속에서는 그대의 검술에 최적화된 술식으로 남아 있던데, 그게 통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한 것인가."
"현실은 가위바위보가 아니야. 아무리 상성 상 유리한 기술이 있다고 해도, 기량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의미가 없지."
지금의 나와 보이드의 차이는 그 정도다.
애초에 보이드의 기교적 수준은 천변무궁류를 모르던 시절의 내게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내가 보이드에게 고전했던 건 그저 출력의 차이가 그 정도로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솔직히 말해 나도 조금 기대가 된다. 그대의 검, 그리고 그대의 검술……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첫 만남인데…… 자꾸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거든."
천변무궁류를 모르는 건가?
검왕은 그저 그 경지에 올라서서 지식만을 습득한 것 뿐이었을까.
조그만 의문을 가슴에 안은 채 나와 그 존재가 서로 마주본 상태로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 검. 그 검에서 묘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보이드의 얼굴로, 그 존재가 웃는다.
"마치 우리와 같은 존재인 듯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그 검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공격이 시작된다.
그 존재는 보이드의 기술을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 출력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광대무량?大無?.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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