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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79화 (179/287)

〈 179화 〉 20. 리벤지 (3)

* * *

절망.

비슷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은 기억이 있다. 파비아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검왕의 제자, '또 한 사람의 파비아'에게서.

검왕이 존재했던 그 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왔다.

내게는 도대체, 어떠한 형태의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 자세하고 듣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건 또 무슨 말장난이지? 이런 소리를 듣기 싫었다면 그냥 처음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가.

괜히 함부로 입을 놀려대면서 사람의 신경을 긁어대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네 곁에 있는 그 여자, 파비아. 그 여자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보이드의 시선이 내 오른팔에 붙어 있는 파비아를 바라본다.

"나 또한 검왕검의 제작 과정에서 내가 가진 인지 능력을 초월하는 파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파장은 내 수준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해불가의 파장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나도 꼼짝 없이 미쳐 버릴 상황이었지."

그 때의 기억을 곱씹은 것만으로도 보이드는 전율을 느낀 것인지, 구속복에 감긴 그의 오른손이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위대한 무인……, 검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미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 수준이 아주 높지는 않았던 탓에 파장에 깊숙히 접촉하지 못했고, 검왕께서 빠르게 대처해주신 덕에 아슬아슬하게 인격을 보존할 수 있었지."

검왕.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보이드는 몇 살은 족히 젊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에, 나이를 뒷구멍으로 쳐먹은 듯한 노인이었지만 그럼에도 검왕을 존경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다. 구제불능의 쓰레기 같은 존재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보이드에게 있어서 '그것'은 검왕을 향한 존경이 아닐까 싶었다.

"애송이. 네놈은 내가 지금까지 거쳐 온 검왕검의 소유자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

나 이외의 다른 소유자를 알고 있는 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 이전에 또 다른 검왕검을 쥐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검은 검사'와의 대결에서 이미 드러났고, 보이드는 검왕의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다.

나 이전에 있었던 다른 계승자와도 검왕검을 두고 다퉜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처음에는 네놈이 제일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네 녀석과의 최종결전을 대비해서 쳐둔 함정은 다른 소유자였다면 돌파하지 못할 함정이었다. 대부분의 소유자들은 검왕검에 휘둘릴 뿐, 그것을 제대로 다루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으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괜히 움찔하게 된다.

보이드의 함정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함정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함정이었다.

검왕검의 기능을 봉인할 뿐만 아니라 천변무궁류의 흐름까지 틀어막아 버리는 극악한 함정.

보이드의 말을 들어보면 그 함정은 나 이전에 있었던 다른 소유자들과의 대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이드가 나와 충돌하게 되었다는 건, 그가 지금까지 나 이전의 소유자들에게서 검왕검을 빼앗지 못했다는 의미이니까.

앞선 소유자들에게 호되게 당한 후, 와신상담의 자세로 검왕검의 소유자를 붕괴시킬 함정을 팠다.

천변무궁류도 쓸 수 없고 검왕검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내게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함정마저 뛰어 넘어서, 지금 여기에 있다.

"거기다가 '검왕검의 시련'까지 통과했지. 머지 않아, 네가 지금까지의 소유자 중 최고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너조차 검왕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분은 수많은 무인 중에서도 정점에 오르신 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경지에 올라선 절대무적의 무인."

검왕의 신화를 노래하는 보이드의 얼굴에서는 황홀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검왕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검왕 이외의 그 누구도 광기에 휩싸인 나를 구해줄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분의 도움으로 광기에 완전히 침식 당하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나 자신의 한계로 내게는 몇 가지 제약이 붙게 되었다."

보이드의 흰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첫 번째, 기억의 모호함."

"기억의 모호함?"

"그렇다. 그때의 상황과 내가 광기에 빠지게 된 이유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도록 검왕께서 내 기억을 아주 조금 봉인하셨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려고 해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아."

"세부적으로 기억하고 있으면 다시 광기에 침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리고 두 번째."

구속복으로 몸을 감싼 보이드가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바깥에서 온 파장'에 접촉하는 과정에서 '바깥의 존재'와 연결되고 말았다. 내가 그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면 그것을 매개체로 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어. 사실 이것이 진정한 이유다."

"마치, 악마 같은걸."

보이드가 말하는 것은 악마 소환의 원칙과 비슷하다.

나와 루이스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개념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사상최강의 적, 스페트로가 바로 그 악마 소환의 원리를 응용해서 스페트로 일족의 인간들에게 기생하고 있었으니까.

악마 소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정확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악마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서 차이점이 있어서, 몇몇 질이 나쁜 악마는 이름이 아니라 그 특징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나타날 때가 있다.

보이드가 말하는 '바깥의 존재'가 그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침묵에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는지. 사실 이 정도까지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니까."

"……."

나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루이스는 특급 모험가의 감각으로 상대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 불수의근의 움직임을 통찰해서 그 말의 진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드의 모든 말이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너도 이제 네게 찾아올 '절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

"대충은."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불명이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해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거라. 오랜만에 그때의 일을 떠올렸더니, 속이 조금 메스껍구나."

보이드가 눈을 감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등받침에 몸을 기댄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보이드의 얼굴을 한 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일별했다.

『당신이, 검왕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때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긴 침묵 끝에 처음으로 나온 한 마디였다.

『검주를 너무 얕보지 말아주시겠어요? 솔직히 좀 불쾌하거든요.』

"검왕검의 관제 인격인가……."

『거,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천변무궁류가 봉인 당한 검주도 제대로 못 이기는 주제에.』

백신아의 목소리에는 강한 경멸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보이드는 그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천천히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다.

"내가 저 애송이를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검왕검이여, 그것은 네가 어디까지나 검왕의 진정한 실력과 바깥의 존재들의 무시무시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이드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탄이 섞여 있었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너희는 곧 그들과 충돌하게 되겠지. 그때가 된다면…… 나의 경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 * *

볼일을 마친 후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연금술사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리가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처럼 누워 있기만 했나보다.

파비아와 루이스를 먼저 욕실로 들여보낸 후, 연금술사의 머리맡에 앉았다. 연금술사는 내가 가까이 다가와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

"응."

"제가 생각하는 이론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이론? 갑자기……?"

"구상 자체는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기회가 없어서 검증은 못 하고 있었죠."

연금술사가 커다란 눈동자를 깜박이며 대답했다.

"그럼, 한 번 들어볼까."

"그러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이론을 연금술사에게 설명했다. 연금술사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눈만 여러 번 깜박인다.

"……검증은 해봐야 되겠지만, 이론상으로 크게 구멍은 없네.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크지 않다는 건데."

"아, 그건 일반적인 경우예요. 제 유파는 천변무궁류.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검술이잖아요. 천변무궁류에 조금 전의 이론을 더하면……"

내가 추가로 설명하자 연금술사도 제대로 이해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네 검술하고 조합하면 비약적인 전투력 상승을 얻을 수 있겠네. 리스크는 크지만."

"네, 자세한 건 술식을 확립하고, 실제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상한 수치가 제대로 나와 준다면…… 설령 스페트로 수준의 고수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을 거예요."

불가능은 아니다.

천변무궁류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힘을…… 이 손에 쥘 수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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