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19. 이세계 전이자 (4)
* * *
"이런 건 어때?"
몸에 타월 한 장을 두른 연금술사가 욕실에 들어왔다.
지금의 그녀는 알몸에 타월 한 장 뿐. 하지만 노출도 자체는 오히려 평소보다 낮게 느껴진다.
그녀의 일상복은 등 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검은 원피스니까. 그것도 레이스까지 달린.
흰 가운을 겉에 걸치고 다니니까 평소에는 느끼기 어렵지만.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왜 타월을 두르고 들어온 걸까. 이제 와서 알몸을 거리낄 사이도 아닌데.
매너리즘에 빠진 그녀 나름대로의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연금술사가 목욕 의자를 하나 더 꺼내서 내 뒤에 앉는다. 그녀는 다리가 긴 편이라 앉은 키가 낮다. 그녀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을 때, 그 위치에는 내 등골이 있다.
"반신반의했지만 정말로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네. 하지만 근육에 조금 무리가 갔고, 관절에도 조금 피로가 쌓여 있어."
연금술사가 내 등에 손바닥을 대고 신체 상태를 읽었다. 이미 몇 번씩 했던 이야기지만, 오늘의 나는 그다지 무리하지 않았다.
요하네스의 광증은 힘과 속도 위주로 싸우는 마그누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했지만, 유능제강????에 특화된 천변무궁류 앞에서는 효과가 크게 반감되었다.
제대로 된 상태의 요하네스였다면 어렵지 않게 찢어낼 수 있었을 방어 앞에서 그는 몇 번씩 좌절했다.
싸움이 끝났을 때 내게 남은 것은 조금 지친 몸뚱이와 살짝 당겨진 인대 뿐.
지금까지 입어온 부상과 비교하면 대단한 상처도 아니다.
"오늘의 소감을 듣고 싶은 걸. 제1위와 2위가 싸우는 모습을 봤고, 광증에 휘둘리는 제1위와 부딪쳐보기도 했잖아."
"선생님도 그런 데 관심이 있으세요?"
"그다지. 난 싸움에는 관심 없어. 하지만 네게는 중요한 일이니까."
연금술사는 부끄러운 말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소한 일로는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어린애 같으면서도 어른 같고, 어른 같으면서도 어린애 같다.
"……음, 일단 대장이 1위에게 패배한 건 제게도 충격이었어요. 대장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저와 루이스가 그렇게 도와줬는데도 패배해 버렸으니, 지금의 대장은 상당히 비참한 심정일 거예요."
실패의 경험은 내게도 많다.
같은 실패자로서 나는 마그누스의 처지에 특히 공감이 갔다.
요하네스가 타고난 무재??와 마력으로 승승장구한 인생이었다면, 마그누스는 나처럼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에서도 몇 번씩 미끄러진 칠전팔기였으니까.
마그누스도 재능이 있었으니까 2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그가 이제껏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점에서 알 수 있듯, 그 재능이 눈을 뜨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그와 나하고 참 비슷한 부분이 많구나.
마그누스가 숨겨진 재능을 노력 끝에 각성한 것처럼, 나 또한 백신아와의 만남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와 마그누스가 연이은 패배에 좌절하고 검의 길을 포기했다면 절대로 얻지 못할 기연??이었다.
마그누스가 나를 특히 잘 챙겨주고, 내가 그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도 서로 닮은 점이 보여서 그런 걸지 모른다.
솔직히 존경스럽기는 하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그의 삶을 살짝 동경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오늘의 패배도 부디, 늘 그랬던 것처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이겨내겠죠. 대장은 강한 사람이니까."
"그럼, 오늘의 1위에 대한 소감은? 그것도 듣고 싶어."
"솔직히 별로였어요."
나는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모조리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내 기분을 표현했다.
"광증에 휘둘려서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신아를 이길 수 없죠. 신아도 말했지만, '가면 검사'로서 맞붙었던 그때가 더 강했어요."
"그렇구나."
연금술사의 말에는 묘하게 영혼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제1위에게도, 그리고 2위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다. 스스로 필요 없다 여기는 인간에게는 일말의 감정조차 품지 않는 인격이다.
그녀가 내게 지금의 질문을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내가 그쪽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게 끝이다. 그 이상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저도 그 사람의 광증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요하네스가 새로 획득한 심득의 구결을 일단 전해 들었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그 구결을 들으면 너도 광증에……"
"아, 그건 괜찮아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지식의 전달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파비아가 광증에 빠진 이유는 자신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지식에 접해서이고, 요하네스가 미친 건 그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 없는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고차원적이고 밀도 높은 정보량이 사람의 정신을 부순다.
이른바, '지식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쓸데없이 알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은 그만큼 고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종류의 압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의 유파는 천변무궁류, 이 무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징이 나를 지식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판독 오차라는 말이 있죠. 관측에 쓰이는 기기의 정밀함이 떨어져서 정확한 수치를 판독할 수 없을 때 쓰이는 표현이에요."
예를 들어 시간을 0.01초 단위로 끊어서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치자.
이 기계는 0.01초 범위 내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수치를 측정할 수 있지만, 0.001초의 영역까지는 재지 못한다.
관측자가 기계를 통해서 측정한 시간과 실제 시간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결국 관측하는 기기에 따라서 관측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발생하니까.
천변무궁류의 검사와 타 무술가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천변무궁류의 검사는, 볼 수 있는 깊이가 전혀 다르다.
다른 무술가와 구별되는 압도적인 관측 범위로 마력의 흐름을 포착하고, 그 마력의 흐름을 계산해서 제어하는 것.
그것이 천변무궁류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다.
나는 천변무궁류의 검사로서 다른 무술가와 구별되는 어마어마한 관측 범위와 계산력을 가지고 있다.
즉…… 같은 심득을 접하더라도 이해하는 속도가 다르다.
마력이 부족한 데다가 애초에 그쪽 방향으로 수련을 한 건 아니라서 구결을 전해듣는다고 그 기술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 지식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지는 일은 없다.
요컨데, 요하네스가 새롭게 도달한 심득조차도 천변무궁류와 비교하면 뒤쳐지는 수준의 심득이다.
그보다 높은 수준의 절학─── 천변무궁류를 익히고 있는 내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시사하는 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천변무궁류가 요하네스의 새로운 심득보다 수준이 높은 절학이라는 것은 이 검술을 개발해낸 장본인이 '그 영역'에 완숙하게 올라서 있다는 증거다.
검왕.
그의 저력은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다.
"그럼, 크게 문제는 없는 거야?"
"네. 물론 저도 천변무궁류의 감각으로 이해한 거라서,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주는 건 전혀 다른 난이도지만요."
나는 심득을 이해했고, 주화입마에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심득을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내더라도 나 이외의 사람은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 이유로 내가 요하네스의 광증에 조력을 한다고 해도 근시일 내에는 조금 어렵다. 이건 다른 사람에게 협력을 부탁하기도 어렵다.
요하네스가 새롭게 얻어낸 심득은 매우 수준이 높고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라서 연금술사나 루이스가 전해 들어도 광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물론 마그누스도 마찬가지.
지금의 요하네스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심득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
가능성이 있는 건 '또 한 사람의 파비아'와 스페트로 정도일까.
둘 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제2위에 이어서 1위까지…… 네가 그러니까 꼭, 무슨 의사 선생님이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네."
"그런가요?"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요하네스의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조력하고 있으니까.
"모두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네, 더 강해진 그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저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나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무의 본질은 대적해서 이겨내는 것.
대적해야 하는 상대가 크면 클수록 넘어섰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강함의 최대치가 높아진다.
지금의 내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언젠가 마그누스는 물론이고 요하네스마저 뛰어 넘을 생각이다.
하지만 그들도 내게는 통과점이다.
당장은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나의 목표이지만 내가 이기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다.
언젠가, 내가 넘어서고 싶은 진짜 상대는……
"난 무술가가 아니라서 너나 루이스의 사고방식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즐거워 보이네."
"네, 재미있어요."
날이 갈수록 충만해지는 힘이 나를 취하게 한다. 하지만 힘에 잡아 먹히는 건 금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나 스스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거면 됐어. 네가 무리하게 몸을 축내지만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네, 고마워요 선생님."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시작해도 될까. 나는 한 달 동안 오늘만을 고대해왔거든."
역시,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던 거겠지.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근래 들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연금술사의 성욕을 고려하면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한 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괴로운 한 달이었어. 내게는 그랬는데, 신현이 네게는 어땠어?"
"전 의외로 버틸 만 했어요.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오히려 다른 욕구는 줄어들더라구요."
"그렇구나. 그럼 한 달 동안 쓰지 않고 계속 참고 있었겠네."
"……그렇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사실 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보다시피 루이스의 몸뚱이는 걸어다니는 포르노 수준이니까.
거기다 루이스도 은근히 참기 어려운 듯한 얼굴이라서 둘이서 함께 고생했다.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던 건 연금술사도 인내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끼리 해소하는 게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도 참는데 우리가 못 참을 수는 없지', 그런 고집도 있었다.
인내, 노력, 극기 등 연금술사는 무술가에게 요구되는 수많은 가치와 완전히 동 떨어진 인간이다.
그런 사람도 참고 있는데, 우리가 못 참아서 뒹굴기 시작하면 솔직히 좀 부끄럽잖아. 체면이 뭐가 돼.
이건 내 직감인데, 아마 오늘은 연금술사를 안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루이스, 그리고 파비아도 엄청 오랫동안 참고 있었겠지.
"그럼…… 시작할까."
연금술사가 천천히 목욕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그녀는 가운 안에 검은색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코피가 나올 것 같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예상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