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19. 이세계 전이자 (2)
* * *
요하네스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스페르로 가문의 별장의 응접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요하네스의 몸 상태도 나와 비슷하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신체적으로 크게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가 지친 눈으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응접실에는 나와 파비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으면 그도 부담스럽겠지. 요하네스의 마음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그가 부담감을 느껴서 잘못한 사실을 입에 담거나, 진실이 왜곡되는 걸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요하네스가 들어온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신현입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요하네스라고 불러주시오.'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요하네스는 바닥에 몸을 붙인 파비아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중요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 이름…… 이쪽의 사람은 아니군. 동방에서 온 것인가? 그게 아니면……"
"저도 그쪽하고 같아요. 다른 세계에서 여기에 떨어진 사람이니까."
"과연. 신기한 우연이구려."
테이블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찻잔에 요하네스가 손을 올렸다. 그는 홍차에 술수가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지, 차를 들이키는데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요하네스는 홍차를 들이키고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마치 계산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조금 전의 일은 재차 사과드리겠소.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마그누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지나치게 강해지는 바람에 계산을 잘못한 탓이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기권을 했어도 되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그러한 형태의 승리를 마그누스가 인정할 거라 생각하오?"
요하네스의 말은 상당한 촌철살인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러한 형태의 결착은 마그누스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요하네스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기권하고 싶지는 않았소. 1라운드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느 정도 광증을 제어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중간부터는 나도 의식이 날아갔지, 그것은 명백한 나의 계산 실수였소."
"마그누스 대장은 알고 계셨습니까? 그쪽의 그, 광증을."
"……알고 있었소. 그리고 내가 그 이유로 머지 않은 시일 내에 특급 모험가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것도."
요하네스는 아마 1라운드를 진행하던 시점에서 스스로의 이상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마그누스를 그 꼴로 만들었다.
조용히 떠올린다. 2라운드 초반, 마그누스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힘과 속도로 쉴 새 없이 맹공해 들어가던 요하네스의 모습을.
그의 말처럼, 2라운드의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움직임에는 어느 정도 합리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2라운드의 어느 순간부터 그의 공격이 급격하게 잔인하고, 가학적인 형태로 '질'이 달라지면서 일방적인 괴롭힘이 시작됐다.
문제는 그 힘과 속도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서 도저히 마그누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요하네스는 스스로의 이상을 눈치챘음에도 기권하지 않았고, 마그누스는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기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고집과 자존심이 오늘의 사태를 만들었다.
이해는 하지만 공감은 할 수 없다. 과신의 결과로 요하네스는 살인자가 될 뻔 했고, 마그누스는 그 자리에서 죽을 뻔 했다.
조금 전의 요하네스는 백신아가 난입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멈춰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요하네스를 제외한 특급 모험가 전원이 덤벼도 결과는 마찬가지.
백신아 이외에 가능한 사람을 꼽으라면 스페트로와 '진짜 힘을 해방한 파비아' 정도일까.
그때 내가 요하네스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살육을 반복하며 그 자리를 피바다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백신아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진짜, 무식한 아저씨들이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크고 중대한 것인지 잘 모르는 건가.
오늘의 사태는 자칫 잘못하면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따위의 시시콜콜한 말을 쓸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그 힘이 끼칠 영향력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어야 화를 피할 수 있다.
"오늘 벌어진 사건으로 새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소. 역시…… 지금은 이 광증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을."
요하네스가 미간에 손을 짚었다.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살짝 져 있었다.
"주화입마?火??를 겪은 겁니까?"
요하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나는 새로운 무?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을 거듭하고 있었소."
의외로 특급 모험가 중 제대로 된 세력을 꾸린 특급은 드물다. 루이스는 말할 필요가 없는 독고다이. 스텔라도 개인 연구가 주력.
1위와 2위 또한 인맥을 써서 영향력을 뻗치긴 하지만 세력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다.
이 두 사람의 본질은 순수한 구도자에 가깝다.
"그러던 중 나는 아주 우연히, 기존의 경지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는 '어느 영역'에 접촉하게 되었지. 현존하는 그 어떤 무도적 경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 신의 경지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은 경지에."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이 되어있던 요하네스의 눈빛이 잠시 울적해진다.
"하지만…… '그 영역'은 지금의 내 실력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큰 실력 상승을 대가로 전투가 길어질수록 심해지는 광증을 얻게 되었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탄한다.
"광기란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했을 때, 정신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발생하는 방어 기재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내가 '그 영역'에서 접한 것은 나의 능력이나 인지 능력으로도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던 막대한 정보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하네스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의 손은 알코올 중독자처럼 마구 경련하고 있었다.
"'그 영역'에 아주 살짝 접촉해서 그 편린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이 꼴이 되었지. 내가 가지고 있던 무술에 대한 상식이 뿌리부터 부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소. 나 자신이 가진 무술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주화입마가 찾아온 것이지."
"특급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 광기를 제어할 자신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소. 나를 얽매는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후, 오롯이 수행에 집중하는 것만이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했소. 지금의 주화입마와 광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 영역'의 힘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는 수밖에 없으니까."
요하네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지금의 그가 겪고 있는 광증의 원인은 그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상위의 심득心?에 접촉해버렸기 때문이다.
수준이 높은 심득은 그만큼 흡수하는 난이도가 높다. 흡수에 성공하면 비약적인 경지의 상승을 이뤄낼 수 있지만, 흡수에 실패하면 그 즉시 주화입마에 빠져서 기존의 경지를 아예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그 심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뿐.
요하네스의 은퇴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당위성이 존재했다.
"여기, 이쪽에 있는 이 친구도 그쪽하고 비슷한 경우예요."
"그게…… 무슨?"
나는 파비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파비아. 제 사저이며, 진짜 실력을 발휘하면 그쪽과 호각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최정상의 검술고수입니다."
"그 소녀가 사저……?"
요하네스의 눈썹이 휘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나와 파비아의 사제 관계는 조금 특이하다.
본인들은 스스로를 사저와 사제로 여기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 신기한 경우이다.
"그리고 이 녀석 역시, 경위는 조금 다르지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그 너머'의 지식에 접한 탓에 광증에 빠져 있었죠."
구르제스의 지하에서 보았던 파비아의 일기장을 떠올린다.
그때, 파비아를 광증에 빠트렸던 이유는 모두 두 가지.
첫 번째는 검왕검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접촉하게 된 '저편의 지식'이었고, 두 번째가 해신이었다.
두 가지 원인 중 하나, 해신을 우리가 쓰러트리는 것에 의해서 파비아는 광증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파비아의 진정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파비아' 역시 짧은 시간이나마 인격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
"파비아가 광증을 회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서 광기를 대신 감당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진짜 인격을 의식 깊숙한 곳에 숨긴 후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서 그 인격이 광증에 빠지게 만들었죠."
"……그런 방법이."
요하네스가 작게 놀란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의 파비아는 진짜 파비아라고 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의 파비아'가 광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분리해낸 인격이니까.
'또 한 사람의 파비아'는 의식 깊은 곳에 숨어서 광증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아마 지금의 요하네스처럼 수행으로 바깥에서 얻은 지식을 소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파비아가 '또 한 사람의 파비아'와 잠시 교체한 이후로 언어능력이 급상승한 점에서 알 수 있듯, '또 한 사람의 파비아'의 수행이 지금의 파비아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의 파비아는 광증을 모른다. 광증의 극복이 머지 않았다.
나는 파비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파비아, 넌 이 사람이 싸우는 걸 관객석에서 보고 있었지. 네가 보기엔 어땠어?"
"……으으음, 그게 말이야. 사제."
"응."
"광기가 뭐야아……?"
아,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사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파비아도 이해할 수 있게 의성어를 섞어가면서 최대한 말을 풀어서 설명했다. 이제 파비아에게 설명하는 일에는 도가 텄다.
설명을 들은 파비아가 나와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인다.
"사제 말을 듣고 보니까, 아까 전에 두 아저씨가 싸울 때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어. '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자꾸 움찔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
"아, 아저씨……"
요하네스가 살짝 충격에 빠졌다.
마그누스야 그렇다 쳐도 요하네스는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은 얼굴인데, 파비아의 눈에는 둘 다 아저씨인 모양.
사실 두 사람 모두 50이 넘은 아저씨들이라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중에서 파비아가 제일 연상이라는 건 잠시 잊어두고.
"그리고 나도 사제랑 처음 만나서 싸웠을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좀 이상했어. 나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었거든."
파비아 본인의 의견도 나와 같다.
두 사람의 광증은 원인이 조금 차이가 난다는 걸 제외하면 거의 원리가 같다.
자신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지식을 받아들인 결과, 그 사단이 터졌다.
"그럼 파비아. 너하고 이 사람이 하나씩 겪은 일을 번갈아서 말해보는 건 어떨까? 서로의 경험을 하나씩 제시하다 보면 좋은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잖아."
"솔직히 좀 귀찮지마안…… 사제의 부탁이니까, 한 번 해볼까!"
파비아는 사저와 사제라는 표현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 결과물이 조금 어설플 수는 있지만, 파비아는 사저로서, 최대한 사제를 신경 써주고 싶어했다.
요하네스와 파비아는 광증을 겪었던 경험을 하나씩 제시하면서 공감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순식간에 종이 한 장을 기록으로 가득 채웠다.
"후우……"
그리고 잠시 휴식.
손님용 소파에 늘어져라 앉은 요하네스가 나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그대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했었지.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에 떨어진 전이자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해준 파비아의 턱을 살살 간지럽히던 상황이었다. 파비아는 이런 걸 상당히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나와 동향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대에게 질문이 하나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겠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대답이라면."
요하네스가 살짝 긴장했다.
잠시 후, 그가 굳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대는 이 세계,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그다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좋은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볍게 이죽거린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지옥 같은 세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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