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19. 이세계 전이자
* * *
석연치 않은 형태로 제1위와 마그누스의 모의전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았다. 두 사람의 우열 자체는 이미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 내용 또한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 하나만큼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그누스는 잠시 의무실에서 응급 처치를 거친 후, 관객들의 한 차례 빠져나간 타이밍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그누스의 상처가 심하기는 했지만, 그 대부분은 평범한 타박상이니까. 고치기 까다로운 부상은 아니었다.
수술실 앞에서 마주친 스텔라는 마그누스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로 안색이 나쁘다.
많고 많은 남자 중에서 하필이면 마그누스를 선택한 그 취향에는 조금 의문이 느껴졌지만, 이 건에 한해서는 그녀를 신뢰해도 될 거 같다.
스텔라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병원을 빠져 나온다.
마그누스를 병원에 인도한 뒤, 한 발 먼저 바깥에 나와 있었던 요하네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면 검사."
"백신현이에요."
그는 아직 나의 본명을 모른다. 눈가를 찌푸리면서 호칭을 정정한 뒤, 고개를 돌린다.
"여기에서 대화를 나누기는 조금 그렇겠죠. 보는 눈도 있고."
나는 격전의 충격으로 삐걱삐걱 울리는 목을 왼손으로 주무르면서 말했다.
"오늘 저녁, 여기에 있는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에서. 어떻습니까?"
"그게 좋겠소. 오늘 저녁에 찾아가리다."
요하네스가 몸을 돌린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공간 이동 같지만 다르다. 지나치게 빠르게 현장을 이탈한 탓에 공간 이동처럼 보이는 것 뿐.
그는 다만 사라지기 전에 한 마디를 그 자리에 남기고 떠났다.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큰 폐를 끼치게 되었소."
지금까지 내가 제1위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오만하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인상이었는데, 그 인상을 재고할 필요가 느껴졌다.
* * *
요하네스와 헤어진 후 다시 콜로세움으로 돌아가서 샤를로트를 찾았다. 란즈 가주와 올리비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가벼운 인사치레를 나눈 후, 사정을 설명하고 요하네스와의 회동을 위해서 그들의 별장을 사용해도 될지 허락을 부탁했다.
란즈 가주는 크게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건 그에게 있어서도 최상위권 모험가와 파이프를 뚫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요하네스에게 제안부터 한 후에 허락을 요청했다.
란즈 가주와 이야기를 끝낸 후 곧바로 그의 안내로 수도에 있는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에 도착했다.
짐은 없다. 어차피 이 건을 끝내고 난 후에는 호텔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니까.
나는 별장의 거실에서 란즈 가주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를 지게 되었습니다."
"아니, 괜찮네. 이 사건에서 나는 비교적 중립에 가까운 사람이지. 오히려 내게 도움을 요청해준 게 고맙군."
란즈 가주는 크게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지금 내 뒤에 있는 건 루이스도 연금술사도 아니었다. 파비아가 내 등뒤에 찰싹 붙은 채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까지 따라와 있었다.
파비아가 멋대로 따라온 건 아니다. 내가 파비아를 데리고 왔다.
데려올 만한 이유가 있어서 데려온 거다.
연금술사와 루이스는 호텔에 들려서 장비를 가져온 뒤 합류할 예정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건가?"
"……."
파비아는 내 등뒤에 숨어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전투 능력으로만 따지면 한쪽 팔을 잃은 지금의 란즈 가주보다 파비아가 더 강하겠지만, 파비아는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다. 내 등에 찰싹 붙어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파비아. '검은 존재'하고 싸웠을 때 본 적 있으시죠? 이 녀석이 1위의 상태를 보고 조언을 줄 수 있는 친구예요. 낯을 좀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 이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조언을 줄 수 있다고……? 으음, 알겠네. 그런 걸로 생각하지."
란즈 가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2층의 개인실에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올리비아와 샤를로트가 나왔다.
올리비아는 털털한 긴팔에 긴바지. 샤를로트는 폭신폭신한 원피스 차림이다.
파비아는 그나마 아는 얼굴이 나오니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아, 샤를로트다!"
"응, 안녕. 파비아."
보다시피, 아는 사람과 대화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가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성격이다.
"올리비아 너는 예전에 지나가듯 몇 번 보긴 했지만, '지금의 파비아'를 보는 건 처음이지?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파비아야. 지금은 내 사저지."
올리비아가 기억하고 있던 파비아와 지금의 파비아는 다르다.
언어 능력도 회복한 데다가 성격도 밝아졌으니까.
"사저라고? 농담은."
올리비아가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눈치채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의 발언을 정정하지 않는 나와, 사저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파비아의 모습을 보고 올리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농담이 아니라고……? 지, 진짜로 저 맹한 얼굴에게 사저라고 부른단 말이냐……!? 난 그냥 연금술사 선생님께서 키우는 건 줄 알았는데……!"
맹한 얼굴.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의 파비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물론 파비아는 그 의미를 모른다.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화를 내기는 커녕 "맹한 얼굴이 뭐야?"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올리비아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았다.
액면가만 따졌을 때 파비아는 나보다 훨씬 어리게 보이는 인상이니까.
"있지있지, 사제. 맹한 얼굴이 무슨 뜻이야?"
"집중력이 떨어져 보이고, 좀 바보 같이 생겼다는 소리야."
"뭐어─?"
파비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화를 냈다. 올리비아도 그때서야 스스로 큰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조금 전의 말은 실언이었습니다. 사과드리……"
"……그치만 듣고 보니까 그런 거 같기도? 사제, 사제도 그렇게 생각해?"
"응, 너는 좀 맹한 얼굴이지."
하지만 파비아는 잠시 발끈하는 듯 하더니, 그게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까 그럴 듯 했나보다.
이런 점이 맹하다는 의미이다. 파비아의 본성을 실로 잘 짚어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백신현 너, 사제라는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내가 진짜 사제 맞다니까. 파비아는 사저, 그리고 나는 사제. 그게 맞아."
"……천변무궁류의 항렬이란 도대체?"
올리비아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웃으며 파비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파비아는 이렇게 보여도 나는 물론이고, 너보다도 나이가 많아."
"그, 그럴 수가……"
"그리고, 너보다도 세지."
지금은 마력을 갈무리해서 힘을 아끼고 있지만, 파비아가 제대로 힘을 쓰기 시작하면 올리비아는 물론 란즈 가주가 나타나도 감당할 수 없다.
기술의 수준은 조금 저급하지만 파비아의 출력은 특급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 힘을 제대로 쓰기만 해도 특급 이하의 실력자들은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다.
란즈 가주도 한쪽 팔을 잃은 지금은 무리다. 팔을 잃은 후 그의 전력은 크게 떨어져서, 루이스에게 특급 모험가의 최하위를 내주게 되었을 정도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도록 하지……."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려서 샤를로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가씨는 혹시 그녀의 상태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 응. 신현 씨를 보러 자주 찾아갔었으니까. 그때마다 만나서, 파비아의 상태가 호전되는 걸 지켜봐왔어."
"그런데 어째서 제겐……"
"미안해, 올리비아. 파비아에 대한 이야기는 네게 말해줘도 괜찮은지 신현 씨에게 먼저 물어본 후, 그 다음에 가르쳐줘야 할 거 같았거든."
샤를로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파비아를 둘러싼 사정이 제법 복잡한 데다가 나의 비밀과 크게 연결되어 있다보니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지금 알게 된 올리비아는 처음에는 조금 슬픈 얼굴이 되었지만, 곧 샤를로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아끼고 사랑하는 샤를로트는 타인의 비밀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해야 하는 말과 그래서는 안 되는 말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머리가 좋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올리비아는 새삼 샤를로트를 향한 애정이 깊어졌는지 푸근한 미소로 샤를로트를 돌아보았다.
다시 시선이 움직였다. 그 방향에는 내가 있었다.
"어떠냐, 백신현. 이게 바로 우리 아가씨다. 존경스럽지 않나?"
"내가 저 나이였을 때하고는 비교가 안 돼."
"그 시절의 너는 어땠지?"
"속도 좁고, 신경질도 심하고,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녔었지."
"나도 그 나이 때는 비슷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정말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분이시군."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좋겠다. 모시는 사람이 샤를로트처럼 멋진 녀석이라서."
이건 살짝 진심이다.
검의 목적이 올바른 주인에게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이라면, 심복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올바른 주인에게 올바르게 쓰이는 것.
나도 백신아의 주인이기 때문에 올리비아의 심정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겠지.
나 역시 샤를로트를 높이 평가하지만, 여기에는 샤를로트를 놀리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 샤를로트는 캐치볼을 하듯이 오고 가는 칭찬 속에서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맞아맞아! 샤를로트는 멋져. 내가 잘 모르는 것도 잘 가르쳐주고 말야아."
그 흐름에 파비아도 올라탔다. 물론 파비아는 이게 샤를로트를 놀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모른다.
순수한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샤를로트는 이미 붉어지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의미가 없다. 숨기지 못한 귓볼이 엄청 빨갛다.
"그, 그만해……. 나, 얼굴이 터질 거 같아……"
"뭐, 사실이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샤를로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샤를로트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살짝살짝 떼어내면서 말했다.
"그, 그런데 신현 씨. 파비아를 데리고 온 건 역시…… 그 1위 분의 상태가 그때의 파비아하고 비슷해서 그런 거야?"
"맞아. 직접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파비아의 광증과 그 사람의 광증은 거의 대동소이한 거라고 생각해."
샤를로트는 광증에 덮쳐진 파비아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설마, 그것만으로 파비아와 제1위의 공통점을 파악하고 내 의도를 추측해낼 줄이야.
도대체 얘는 못하는 게 뭐지? 사랑스러워 죽겠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가씨?"
"응…….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파비아도 오늘 1위의 사람이 보여줬던 광기에 찬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거든. 파비아도 그때, 기억 나?"
"……조, 조금은?"
"다 기억하고 있구나……"
"가우우우……"
그녀에게 있어서 그때의 모습은 상당한 흑역사인지, 파비아가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위,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올리비아가 입맛을 다시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다시 움직인 올리비아의 시선이 나를 가리켰다.
"상당히 공교로운 인연이로군. 그렇지 않나? 백신현."
샤를로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올리비아의 지금 이 한 마디는, 나 이외의 사람은 조금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신기하지 않나.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중에서도 진짜 고수는 한손에 꼽을 정도인데…… 제1위와 너는 다른 세계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올리비아가 대단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조금 의아한 얼굴이다. 눈을 크게 뜨면서 질문한다.
"신현 씨, 올리비아.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그 사람도 나하고 같거든."
나는 눈을 가늘이며 대답했다.
"그도 나처럼 다른 세계에서 여기로 떨어진 전이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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