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8. 전사의 자존심 (7)
* * *
휴식 시간은 1분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체력을 회복하던 마그누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를 돌아보며 이상한 말을 했다.
"신현아. 혹시 내가 진다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잊어주거라."
그런 신경 쓰이는 말을 해놓고 잊어달라니,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가 갑자기 나약한 말을 입에 담는 모습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질 생각으로 싸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에 이 말은 마그누스가 해주었던 말이다. 승산은 낮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승리를 붙잡기 위해서, 그는 나와 루이스를 여기로 불러들여서 수행을 요청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집중력이 흔들리는 걸 감안하고서, 그의 등을 팡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마요. 이길 생각으로 싸워야죠."
"……그래, 네 말이 맞다."
마그누스는 살짝 웃는 듯 했다.
시합장 위로 올라선 그의 등이 유독 작게 느껴졌다. 도대체 왜지? 조금 전의 라운드는 확실히 그가 유리했다. 마지막 일격을 꽂아넣지 못했을 뿐, 일방적으로 마그누스의 페이스로 흘러갔다.
마지막 체력까지 짜낼 각오를 했으면 했지, 힘이 빠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승리는 바로 코앞에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조금 전 백신아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그누스의 마력의 형질이 아주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하지만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마그누스가 감지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것은 수준 이상의 천변무궁류의 사용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루이스도,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오직 백신아 한 사람만이 위화감을 느끼고 내게 진언했다.
"……."
나는 아직 마그누스가 알려주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전의 회동에 불참했던 제1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마그누스와 실력차를 벌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제1위는 어째서 아직 현역으로 왕성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벌써 은퇴를 결심했는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마그누스는 어물쩍거리며 질문을 넘겨버렸다.
달라진 제1위. 그리고 무리하게 제1위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우리를 호출한 마그누스.
그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이 조금씩 윤곽이 잡히는 듯 하였다.
시합장 위에 올라선 두 사람이 마주본다. 유효타는 거의 없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크게 지쳐 있었다.
단기전에 특화한 전술과 우리들의 조력에 의해서 단기간에 무위를 급격하게 끌어올린 마그누스의 실력이, 제1위를 위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요하네스의 움직임이 변했다.
그는 검을 역수로 쥔 채 무게 중심을 아래로 낮췄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세다. 요하네스의 리히테나워식은 기본에 충실한 무예. 변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와서 전혀 다른 검술이라고? 마그누스가 기존의 검술에 대항하는 파해식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일까.
마그누스가 가지고 있는 우위가 한 가지 사라진 순간이다.
하지만 의외로 최악은 아닐수도 있다. 역수로 쥔 검은 그 특성상 방어에 크게 취약해서 마그누스의 공격을 버텨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게 아니다. 우리가 머리를 쓰는 만큼 상대도 머리를 쓴다. 그건 그냥 당연한 거다.
적의 대응이 달라졌다면 대응도 그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마그누스에게 조력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번 라운드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와야 한다.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버텨내거나, 아니면 기세를 이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파고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부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그누스의 몸은 나와 루이스의 사이를 뚫고 벽에 처박혀 있었다.
벽에 처박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뚫고 반대편까지 나아갔다.
고개를 돌렸을 때, 마그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예 콜로세움의 바깥까지 밀려 나간 것 같았다.
"마그……!!"
그의 이름을 소리친다.
다음 순간, 마그누스가 뚫고 나아간 벽의 저편에서 한 줄기 빛이 달려 나왔다. 검붉은, 혈액을 닮은 마력 입자가 흩날렸다. 마그누스가 뚫려 있는 공간을 역주해서 다시 경기장 위로 돌아왔다.
특급 모험가 사이의 결투에는 다운 룰도, 장외 룰도 없다. 오직 한 쪽의 의식이 완전이 끊어지거나 항복을 선언한 경우에만 결착이 내려진다.
마그누스는 경기장으로 돌아오면서 이미 충분한 가속을 붙였는지, 어마어마한 속도를 죽일 생각도 없이 그대로 요하네스에게 부딪쳤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그 공격을 몸을 회전시키면서 유려하게 회피하더니, 팔꿈치로 마그누스의 관자놀이를 세게 후려쳤다. 그의 안면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가 솟았다.
유출된 혈액의 크기에 비해서 부상은 크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그누스가 제1위와의 일전을 대비해서 쌓아올린 수많은 힘과 기술이, 갑작스럽게 전혀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제1위의 움직임이 전혀 다른 패턴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마그누스의 대응이 쫓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순수하게 제1위의 힘과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마그누스가 한 번 검을 휘두르는 동안 그의 몸에는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겨났다.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망치로 후려치고.
요하네스의 속도가 높아진 만큼 그의 주변을 어검술의 원리로 부유하던 무기들 또한 빨라졌다.
"커헉!!"
다시 한 번 마그누스의 몸이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그 위치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마그누스를 추적해서 공중으로 날아오른 요하네스가 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 순간 그의 여섯 병기가 모두 어검술의 원리로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발목을 휘어감은 채찍이 마그누스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활은 스스로 시위를 당기며 이기어시의 원리로 날았다. 창, 망치, 월도가 마그누스의 인중, 명치, 배꼽을 각각 노리며 발사되었다.
리히테나워식? 제13형, 회천일섬回?一?의 원리로 요하네스의 몸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회전톱날을 닮은 기세. 경로는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낙하한다.
제1위의 공격이 쓰러진 마그누스의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진다.
마그누스는 그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지불해야 했다.
"크읍─"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의 가슴이 위로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마그누스의 마력이 움직인다. 그 흐름이 눈에 보였다.
"─파?!!"
모든 마력을 신체의 한 점에 집중시킨 후, 단숨에 해방시킨다.
마력의 폭풍으로 다가오는 모든 병기의 돌격을 아주 조금 늦추고 채찍의 구속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 자리를 회피했다.
마그누스가 급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온 순간, 제1위의 공격이 쏟아진 자리에는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발생했다.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구멍을 두고 무저갱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지금 발생한 구덩이가 바로 그런 꼴이었다. 그 끝을 볼 수 없다. 그 정도로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간 일격이었다.
폭풍이 휘몰아친다. 돌조각이 마구잡이로 나부낀다.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기장의 사방에서 마법사들이 나타나 장벽을 펼쳤다.
나와 루이스는 돌조각이 쏟아지지 않는 안전한 위치를 이미 찾아내서, 그 자리로 위치를 옮긴 상황이었다.
한 차례의 공방이 끝났다. 마그누스와 요하네스는 다시 경기장 위로 돌아와 있었다.
"쿨럭!! 커흑……!!"
요하네스의 절기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하긴 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한계라는 건 넘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한계라고 부른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수련이나 혹은 큰 대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그누스는 일시적으로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서 무리를 했다.
그 결과, 코어는 손상되고 근육에도 문제가 발생한듯 마그누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순수한 힘과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이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두 가지는 마그누스가 제1위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였으니까.
키는 거의 비슷하지만 근력량은 나와의 트레이닝으로 최근 들어 근력을 급격하게 높인 마그누스가 우위. 그리고 신체 강화 술식의 효율도 마그누스 쪽이 높다.
무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술이 아니다. 모든 무술의 근간에는 그 기초가 되는 동력과 원리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제1위는 그 모든 기본 원리를 죄다 무시한 채 마그누스를 압도하고 있다.
"크으어억……!!"
요하네스는 여유를 부리는 건지, 마그누스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마무리를 짓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마그누스가 일단 일어나면 그 다음부터는 가차 없다.
요하네스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한 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마그누스가 쓰러져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너무나도 속도가 빠른 탓에,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설령 특급 모험가라고 해도 요하네스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앞의 공방을 제대로 쫓아가고 있는 건 천변무궁류의 검사로서 감각을 단련한 나와 백신아, 두 사람 뿐이다.
사실 나도 몇 개는 놓친 게 있다.
요하네스는 놀아주듯이 2라운드에 주어진 시간을 쓰레기처럼 소모했다.
일부러 마무리를 짓지 않고 있다.
저건 그냥……, 놀고 있는 거다.
"거, 거기까지!!"
2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마그누스는 이제 스스로의 다리로 시합장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나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 관객석에서는 환호성도 들려오지 않는다.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기권하죠."
그건 루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마그누스는 이미 한계였다. 숨을 쉬고 있을 뿐인 시체에 가깝다. 이제는 승산을 논하는 것조차 재미없는 농담이 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지금의 마그누스를 경기장 위에 올려 보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건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제 생각도 그래요. 지금은 기권해야 합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승산은 없다.
마그누스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서, 한쪽 얼굴의 피부는 벗겨지고 퉁퉁 부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아니, 괜찮다……"
마그누스가 무겁게 호흡했다.
하지만 사실, 지금의 그에게는 성대에서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조차 버거운 작업이었다.
"아직…… 나는……"
"웃기지 마요."
나는 지금의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부상 상태에서 전투를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웠지만, 지금의 그와 나는 다르다.
나의 싸움은 패배하는 순간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수 있는 싸움이었다. 아주 조금, 자존심을 내려놓기만 하면 충분한 지금의 마그누스와는 상황이 다르다.
차라리 여기에서 내가 그를 기절시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오른손을 들었다. 이 손으로 그의 목을 강하게 후려치기만 해도 충분히 그의 의식을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마그누스가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시선을 맞췄다.
"……부탁하마."
"……."
* * *
3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요하네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그누스를 훑었다.
"다시 올라올 거라고 믿고 있었소. 그대라면."
"……."
마그누스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애초에 그에게는 스스로 입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대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대검의 제작자는 마그누스의 부친이다.
아버지는 재능 없는 대장장이였다. 쇠를 두들겨 밥을 벌어먹을 정도는 되었으나, 그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검을 제작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실력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재능은 없었지만 열정은 있었다. 하지만 그 열정은 최악의 형태로 끝을 맺었다.
부주의에 의한 화재 사고였다. 수면 시간도 줄여가면서 새로운 검에 제작에 들어갔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작업 중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물건에 불이 붙었고, 진화할 틈도 없이 대장간을 불태우는 화재로 이어졌다.
불은 삼일 밤낮을 꺼지지 않고 끈질기게 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잿더미가 된 그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이 대검이었다.
이름은 질실강건????.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크고 무거워서, 도저히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었다.
아무도 다룰 수 없었던 이 무기는 화재 사고를 주의하라는 의미에서 마을 광장에 전시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 마그누스의 나이는 열넷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장장이만 될 생각을 하던 열넷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를 만든 것은, 전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열넷의 마그누스는 모험가의 길을 선택했다.
대장간이 불타면서 당장 가족들을 부양할 돈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도 있었다.
'최고의 전사에게 쓰이기 위해서 너는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전부터 모험가의 길을 동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산골의 좁은 시골 마을은 열넷의 소년에게 있어 너무 좁았다. 한 번이라도 좋다.
저 넓은 하늘로 날고 싶었다.
'그러니까…… 함께 싸워서, 이기자. 함께…… 최고가 되는 거다'
대검을 조용히 말아쥔다.
검을 쥐고 날아드는 요하네스. 그리고 마그누스는 카운터를 노렸다.
요하네스의 돌격에 맞춘 일참.
훙─.
하지만 마그누스의 대검은 허공을 찢으며 빗나갔을 뿐이다.
요하네스가 조소하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작별이오."
요하네스의 검이, 마그누스의 가슴을 꿰뚫기 위해서 내질러졌다.
* * *
그리고 바로 그때.
천변무궁류?????
제일검?一?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