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18. 전사의 자존심
* * *
마차를 타고 기차역이 있는 도시에 도착. 그리고 다시 수도행 열차에 올라타서 출발했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수도에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이미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때 어처구니 없이 떨어졌던 일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참 신기하지. 보이드와 스페트로, 그리고 그 검은 존재와의 싸움마저도 벌써 잊어버린지 오래인데.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다고 오래 담아두고 있는 것이.
"수도는 보기만 해도 공기가 탁해 보이네. 제피로스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때 루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스는 열차의 창가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창밖에 멀리 보이는 공화국의 수도를 바라보며 내게 말을 건다.
"용건이 끝나면 금방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확실히 냄새는 좀 심하긴 한데."
제피로스도 제법 개발된 도시였지만 그래봐야 시골이다. 공화국의 부가 집중된 수도와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하지만 그런 탓에 공기도 상당히 탁하고 수질도 안 좋다.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라지만, 나도 수도의 환경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비슷하다.
처음 수도를 방문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수도의 모습에서 어릴 적 책 속에서 읽었던 셜록 홈즈의 세계를 겹쳐보고 있었다.
근대의 런던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공기가 안 좋은 것도 비슷하다. 물론 여기는 넓은 대륙이라 세부적인 기후로 들어가면 차이점이 많이 나오지만.
그래도 첫 눈에 봤을 때 느낀 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셜록 홈즈와 잭 더 리퍼의 도시, 런던.
열차가 공화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의 이름은 노토스.
거스트 공화국의 수도로, 이 나라의 온갖 행정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최중요 도시이다.
그 중요성으로 출입할 때 거치는 검문도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지만, 이 점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이 친구, 제 조수거든요."
루이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다른 손으로 특급 모험가의 자격증을 제시했다.
공화국에 열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최고 수준의 모험가 중 한 사람인 루이스는 대부분의 검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다. 특급 모험가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신뢰성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특급 모험가는 한 사람에 한해서 사용인 취급으로 검문을 면제 시켜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의 조수 취급을 받는 건 살짝 열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말대꾸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입을 다문다.
루이스도 그런 내 처지를 알고 있어서, 몇 단계의 검문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몇 번씩 약올리며 장난을 쳐댔다.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짜증났다.
하지만 루이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몇 시간은 걸렸을 검문이다. 그걸 30분으로 끝마친 걸 위안으로 생각하자.
모든 검문을 통과한 뒤 역사 바깥으로 나온다.
노토스의 탁한 공기에 코가 찌릿했다. 루이스처럼 예민하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공기의 질이 더러웠다.
허리춤의 검이 흔들렸다.
「여기가 그 소문으로만 들었던 수도구나. 되게 발전된 느낌이네요.」
"난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 공기가 나쁘잖아. 이런 곳에선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려울걸?"
루이스가 툴툴 거리며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갈색 캐리어는 내 것과 비교해서 두 배는 커 보였다. 최소한의 짐을 제외하면 거의 몸만 온 거나 마찬가지인 나와 비교해서 차이가 크다.
"마그누스 대장도 참 이해가 안 돼. 이런 곳에서 수행이 될까? 수행이란 자고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해야 하는 법인데."
"사람마다 집중되는 환경이 다르니까."
대꾸하면서 나란히 걷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우리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는 사람이 많다. 나는 외팔이이고, 루이스는 외모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래야 띄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 이 정도 시선은 익숙하다. 무시하고 걷는다. 달라붙은 시선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노토스의 거리를 걸어서 멀리에서도 보이던 높은 호텔 앞에 멈춰선다. 마그누스가 우리에게 준 티켓은 두 종류였다.
수도로 올라오는 열차표, 그리고 호텔의 숙박권.
외지의 사람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한 호텔이다. 거의 사시사철 만실이라 예약경쟁이 치열해서 인맥이 없이면 티켓을 구하기도 어렵다던데.
마그누스의 여기의 티켓을 한 달 숙박권으로 끊어줬다.
어마어마한 가격이 예상되지만 사실 특급 모험가의 벌이를 생각하면 많은 돈은 아니다.
루이스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 여러 까다로운 의뢰와 음지 격투계에서 돈을 벌어온 나도 충분히 예약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그누스가 공짜로 티켓을 주겠다는데, 그걸 거부하기는 좀 어려웠다.
「와! 진짜 넓어! 저번에 구르제스에 찾아갔을 때 숙박했던 호텔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요!」
나도 루이스도 이런 부분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성격이라 조용하게 체크인하고 짐을 푸는 분위기였는데, 백신아는 유독 기뻐했다.
녀석은 검이면서도 우리 이상으로 사리사욕에 충실한 경향이 있다.
넓은 거실에 방이 두 개 딸린 스위트룸이다. 침대는 침실에 하나, 발코니가 있는 방에 하나.
침대는 더블 베드였다.
"……넓은 침대는 네가 쓸래?"
"그럴까, 그럼."
괜히 루이스와 같은 방을 쓰게 된 탓인지, 나도 모르게 녀석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루이스도 괜히 죄 없는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연신 넘겨대는 중이다.
침대를 정하고, 짐을 푼 뒤 쉴 틈도 없이 호텔에서 나왔다. 출발하기 전, 마그누스가 미리 쥐어 주었던 쪽지를 펼쳐서 그의 별장 주소를 찾았다.
그렇다, 별장이다.
지금은 잠시 출장 명목으로 수도에 나와 있지만 그의 본래 활동지역은 제피로스였다. 실제로 제피로스에는 그의 저택이 있고, 지금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주인을 기다리며 고용인들이 관리하는 중이다.
마그누스는 우리가 이동하는 동선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의 별장과 호텔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빠르게 걸어도 30분. 별장 주변에도 호텔은 있었을 텐데, 그 중 하나를 골라줬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동선을 짤 수 있었을 거다.
그가 동선을 생각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왕 초대하는 거 제일 비싼 호텔에 묵게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제2위의 특급 모험가 답지 않게 그는 거만한 면이 없고 소탈한 인간이었다.
실제로 제피로스의 일개 모험가에서 시작해서 특급의 자리에 오른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이기도 하고.
그의 별장은 노토스의 외곽에 존재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함부로 찾아올 수 없는 높은 언덕 위에 넓은 저택이 있다.
커다란 정문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넓은 정원이 쫙 펼쳐진, 상당히 넓은 저택이었다.
하지만 정원에는 꽃 한 송이 없이 삭막하다. 저건 그냥 흙바닥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파헤쳐진 흔적도 보인다.
마그누스의 수행이 만든 흔적일 것이다.
저택 앞으로 다가가자 마그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별장은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는 건지 마그누스 이외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 왔구나. 두 사람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안녕하세요, 마그누스 대장."
"그래. 마지막으로 보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갑다. 그래, 허리춤의 검은 안녕하시고?"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허리춤의 검이 스스로 진동하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마그누스 씨."
"음, 오랜만이다."
마그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철창으로 높이 세워진 정문을 밀면서 몸을 돌린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한 번 둘러보고 바로 돌아가서 쉬거라. 본격적인 수행은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하늘은 벌써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둡다고 수행을 못할수는 없겠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 점이 또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관리해주는 사람은 없습니까? 혼자서 수행하다 보면 별장이 엉망이 될 거 같은데."
"어차피 '그런 용도'로 쓰는 별장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란다. 좀 심하다 싶으면 사람을 불러서 정리시키고."
그런가, 말 그대로 수행을 하는 용도인 건가.
정문을 넘어서 안쪽으로 들어간다. 안에서 둘러본 정원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부서지고 쪼개지고, 그래도 땅이 부드러워서 농사는 잘 되겠다.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그 다음은 저택으로.
그의 말처럼 거의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가 낡아서 헤진 데다가 거미줄도 잔뜩이었다. 먼지 냄새도 심해서 낡은 귀족이 살 법한 분위기가 난다.
……나도 정리정돈은 잘 못하는 편이지만 이건 좀 심한데.
수행하다가 폐에 구멍 뚫릴 거 같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먹는지 주방은 청결한 편이었다. 먹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수행을 도와주기 전에 이 별장부터 아예 뜯어고쳤을 것이다.
낡은 저택의 2층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1층의 거실로 내려온다. 그의 거실에는 흑백으로 된 낡은 사진이 액자에 보관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젊은 여자와 어린 아이가 보인다.
아,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그누스의 가족인가.
아들인 거 같은데, 마그누스를 크게 닮지 않은 잘생긴 얼굴이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마그누스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내 가족들이다. 지금은 타지에 있어."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네요."
"나도 같은 심정이다. 나를 닮으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는데, 다행히 아내를 닮아줬거든."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이제 돌아가고, 내일 아침부터 나와서 내 수행을 좀 도와다오."
"아,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대장의 실력을 좀 알아보고 싶은데요."
"나의……?"
마그누스가 의문을 표했다.
나는 곧은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마그누스 대장도 아시다시피 저와 이 녀석은 얼마 전에 제1위와 부딪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의 제1위의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있는지도 얼추 알아볼 수 있었죠."
"아,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나와 대결에서 실력을 보겠다는 소리인가."
"네, 대장하고 다시 한 번 붙어보면 좀 더 자세히 가늠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가볍게 턱을 까딱거리며 질문했다.
"어떠십니까?"
"……좋아. 그러면 지금 당장 실력을 한 번 겨루어 보지."
마그누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후, 정확히 5분의 시간이 경과했다.
5분을 일일이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백신아의 활동 시간은 1초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백신아는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마그누스에게 맞섰고, 300초의 시간을 모두 소모한 직후 나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다.
그리고 이 5분의 전투는 단 한 가지의 사실을 증명했다.
그것은 지금의 마그누스가 제1위에게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강하구나. 정말로……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마그누스는 검을 떨어트린 상태로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그의 대검은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제1위에게 승산을 논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그는 '검을 쓰는 제1위'를 상대로도 승산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뒤쳐져 있는 상태였다.
제1위와 2위의 실력 차이는 명확했다.
마그누스가 제1위에게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1%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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