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17.5. 한달 분량의 애정
* * *
제1위에게 도전할 생각이라.
뭐, 슬슬 그럴 시기가 됐다고 생각은 했는데.
총 열세 명으로 이루어진 최강의 모험가 집단, 특급.
실력에 따라서 1위부터 13위까지 순위가 가려지고, 하위 순위의 모험가는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상위 등급의 모험가에게 순위 교체를 건 대결을 신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위 교체 신청은 함부로 거부할 수 없다. 일단 대결 신청을 받으면 사회 통념적으로 마땅히 이해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니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규칙이 있다.
공식적인 창구로 대결을 신청한 뒤, 대결장이 정식으로 도전 상대에게 전달되면 그때부터 최대 2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합 날짜를 잡는다.
그리고 이 시합의 결과가 어떠한 형태로 끝이 나더라도, 먼저 시합을 신청한 모험가는 이후 6개월 동안 상위 등급의 모험가에게 도전할 수 없다.
물론 바로 위에 있는 모험가에게만 대결을 신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절차만 밟으면 13위의 모험가가 바로 1위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있을 수 있는 경우고, 보통은 높아봐야 한두 단계 위에 있는 특급에게 도전을 신청하는 게 고작이다.
지금의 1위와 2위도 하루아침에 최고 순위에 올라간 게 아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 그들 또한 같았다.
그리고 마그누스는 지금까지 제1위에게 몇 번씩 도전하면서 그때마다 번번히 1위에게 패배해온 남자였다.
그때마다 일방적인 승부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사무치는 일이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승리를 손에 쥘 수 있는 국면에서 번번히 좌절해왔다.
아마 그는,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2등이었다.
"부탁할 수 있을까? 아,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루이스의 조력도 함께 받고 싶다. 너희 두 사람에게 같이 의뢰하는 거야."
"저도요?"
루이스는 적잖이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의 기량은 아직 마그누스에게 전혀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행 기간이 있어야 한다.
루이스의 재능이 마그누스를 능가하고, 머지 않아 제1위를 위협할 수준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현재의 루이스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루이스가 상위 순위의 모험가에게 도전을 신청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무예가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실력을 노출하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한 세트거든. 두 사람 모두를 끌어들이는 편이 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 같아."
"하, 한 세트라뇨."
루이스가 말을 떠듬었다.
마그누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할 수 있다면 나는 너희 두 사람 모두에게 조력을 받고 싶다. 물론 의뢰비도 두둑하게 챙겨주지."
"돈인가요?"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질문했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니, 너희도 최근 들어 벌이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돈으로 제시해도 그다지 마음이 혹하지 않겠지."
정답이다.
나는 그가 돈으로 의뢰비를 제시하려 했다면 단칼에 물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뢰비를 돈으로 받는 건 그다지 성이 차지 않는다.
마그누스가 검지와 중지만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싶다."
"두 가지라."
"그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될 거라고 확신하지."
마그누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단 첫 번째…… 특급 모험가가 쓸 수 있는 검을 구해줄 수 있다."
"검이라고요?"
루이스가 눈을 가늘였다.
나보다는 루이스가 흥미를 보일 제안이었다.
지금, 녀석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은 루이스의 출력을 감당하기에 적절치 못한 물건이니까.
특급의 출력은 평범한 모험가와 자릿수가 완전히 다르다.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니면 전력을 다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래. 란즈 가주가 구해주기로 했지만, 꼴을 보아하니 아직 구해주지 못한 모양이군."
"……네."
루이스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돈이 좀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 인맥, 그리고 자격.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해야 간신히 손에 넣을 수 있는 무기다. 그마저도 한 자루 이상은 어렵고.
"하지만 나라면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네가 쓸 수 있는 한 자루 정도는 어떻게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첫 번째 의뢰비. 그럼 두 번째는요?"
나는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마그누스의 의뢰와 의뢰비를 저울에 올려둔 채 양측의 가치를 가늠하는 중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무술가의 성지. 니르바나 사원에서 수행할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니르바나 사원……."
나는 일부러 그 이름을 입으로 내뱉었다.
그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다.
문외한에게도 유명하지만 무술가 사이에서의 인식은 훨씬 더 드높다.
마그누스가 표현했듯 그야말로 무술가의 성지나 다름 없는 곳이니까.
"니르바나 사원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원래 소림사少??의 차기 방장 후보들이 수행을 거치는 아주 비밀스러운 장소라고. 하지만 니르바나 사원은 소림의 최중요 기밀이라 문외불출 아니었나요?"
"그래, 소림사를 설립한 조사가 그곳에서 수행한 이래, 소림문파를 이끄는 방장들은 모두 예외 없이 니르바나 사원을 거쳐야 했지. 하지만 꼭 소림사 출신만 니르바나 사원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금시초문이다.
루이스와 연금술사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니르바나."
다만 파비아의 기색이 조금 이상했다.
미간에 주름이 질 정도로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다.
마치, 기억을 되짚고 있는 것처럼.
"소림에게 인정 받은 극소수의 수행자 또한 니르바나 사원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나와 1위도 그렇다. 소싯적에 소림속가의 문제를 해결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니르바나 사원의 출입증표로 이 법구를 받았지."
마그누스의 오른손이 가방 안에 들어가더니, 쇠로 된 손잡이에 전후로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 달린 날붙이를 꺼냈다.
소위 말하는 금강저???라는 무기였다.
물론 무기로서의 가치는 꽝에 가깝다.
장식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 보인다.
"물론 이걸 주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너희를 소림에 소개해서 출입 권한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어."
"……흥미는 좀 동하네. 신현이 네 생각은 어때?"
어느 새 루이스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후, 마그누스에게 역으로 제안했다.
"두 번째 조건은 괜찮은데, 첫 번째 조건은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데요."
"첫 번째 조건……? 내가 검을 구해다 주는 걸로는 부족한 건가?"
"네."
"허?"
마그누스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서 루이스와 시선을 맞춘다. 루이스도 동의한 얼굴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조건을 조금 바꾸죠. 일단 들어보시고, 그 다음에 결정하세요."
"조금 긴장되는군."
"과한 조건은 아닐 거에요."
마그누스는 상당히 긴장한 얼굴로 내 제안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 * *
마그누스와의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마그누스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사본을 제작해서 한 장씩 지참했다.
그를 돌려보내고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여덟 시였다.
오래 대화한 거 같지도 않은데 시간 한 번 빠르게 간다.
"그럼 모레부터 둘이서 수도에 올라가는 건가. 전에는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 때문에 올라갔었었지?"
연금술사는 파비아를 소파처럼 쓰고 있었다. 늘어져라 잠들어 있는 파비아의 허리와 엉덩이를 베개 삼아서 머리를 기댄다.
그녀는 드러누운 채 우리와 마그누스 사이에서 체결된 계약 내용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지금 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고 있다. 파비아는 털이 많이 날리는 타입인지, 바닥에 갈색 머리카락이 가득하다.
"네, 그 이후로 거의 반 년. 시간 한 번 빠르네요."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은 언제 볼 생각이야?"
"사실 지금쯤 참가했어야 했는데, 제가 시험 신청 기간에 혼수 상태로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번 기회도 물 건너 갔어요."
"재수도 없지."
연금술사가 익살맞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하필 그 중요한 시기에 혼수 상태에 빠지다니, 역시 나야.
재수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
하지만 시험에 참가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여유로운 감정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의 나라면 언제라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최근 반년 간 거쳐온 수많은 강적들과 비교 했을 때,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은 그다지 대단치 않은 시련이었다.
눈을 감은 채 도전해도 통과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저희랑 같이 올라갈건지, 그게 아니면……"
"난 여기에 남을래. 조금만 더 하면 루이스의 검을 완성할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런가요?"
연금술사의 공방의 한쪽 구석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상한 금속이 하나 있다.
우리가 뒷세계에서 '가면 검사'로 활동하고 있는 동안, 연금술사의 연구도 비약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 바닷가 마을, 구르제스에서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검왕검에 쓰인 금속을 일부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루이스가 바라던 '검왕검에 지지 않는 검'의 완성이 이제 머지 않았다.
내가 마그누스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도 저 금속 때문이다.
저 금속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루이스의 출력을 버텨내는 무기는 어렵지 않게 제작할 수 있다.
물론…… 연금술사는 이제부터가 진짜 어려운 단계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출장 다녀오고 나면 기념품이나 좀 사와줘."
"알았어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수첩에 연금술사의 부탁을 기록해두고 다시 덮는다.
그런데, 연금술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어, 일단 다가오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연금술사의 양손이 순식간에 내 머리통을 붙잡았다. 힘은 강하지 않지만 필사적인 느낌이라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길고 농후한 입맞춤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후우."
몇 분 후, 입술을 떼어낸 연금술사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재미 없는 일 얘기는 여기까지. 네가 출장을 떠나기 전에…… 최대한 네 정액을 받아놓을까."
이런 상황에 돌입하면 연금술사는 상당히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른손만 써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연금술사의 몸은 가벼웠다.
좋은 냄새를 풍기는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침대로 이동했다.
오늘도 상당히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