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55화 (155/287)

〈 155화 〉 17. 가면 검사 (12)

* * *

"……."

파비아는 문득 그 자리에 멈춰서서 먼 곳을 향해 고개를 쭉 뻗고 있었다.

머리에 붙은 갈색 귀가 꼼지락거린다.

네 다리를 쪼그리고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루이스는 파비아가 갑작스럽게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있잖아, 있잖아. 루이스 언니. 지금……"

"아, 나도 느꼈어. 뭔가 커다란 충격이 저 멀리에서 느껴졌지."

루이스의 시선 역시 파비아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이 빼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감지할 수 있었던 충격이 아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형의 충격파가 먼 곳에서 날아왔다.

저쪽 방향에는 콜로세움이 있다.

즉, 아마도 이 충격파를 일으킨 장본인은……

"나도 보러 가고 싶었는데에……"

"너를 데리고 가기에는 좀 위험한 곳이거든. 선생님도 어쩔 수 없으셨으니까 네가 이해해줘."

"가우우."

물론 지금의 파비아보다 강한 음지의 인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은 조금 미숙하지만 가지고 있는 마력은 출력은 특급에 버금가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음지는 힘으로만 이겨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처세술은 커녕 사람을 실제로 대한 경험도 많지 않은 파비아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장소였다.

이 위치에서 콜로세움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단 하나, 구름의 형태가 부자연스럽게 무너져 있는 위치가 보인다.

아마 그 아래에 콜로세움이 위치해 있을 것이다.

천공의 구름은 전투의 여파에 의해서 일그러진 것일 테니까.

"이제 슬슬 결판 났을 것 같은데……"

"있잖아, 루이스 언니."

"응?"

"사제가 이겼을까?"

파비아가 큼지막한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며 질문했다.

루이스는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애초에 신현이가 싸우고 있는 게 아닌데……?"

"그치만, 사제가 싸우러 나간 거잖아?"

파비아의 머리로는 아직 백신현과 검왕검의 상관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 같다.

루이스는 고개를 잠시 절레절레 흔든 후 살짝 미소를 짓는다.

파비아가 다시 루이스를 바라보며 대답을 보챘다.

"으응? 사제가 이겼을까? 루이스 언니이."

"그야 뭐."

루이스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신현이가 이겼겠지."

* * *

나는 전신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하고 침착한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괜히 초조해하거나 빨리 쉬고 싶은 생각에 서두르지 않았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대기실 문앞에 서서, 문고리에 손을 얹고 돌렸다.

대기실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연금술사가 앉아 있었다.

"수고했어."

"네……. 잠시만 좀……, 쉴게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바로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서 쓰러지듯이 앉는다. 얼굴 피부에 밀착해있던 살색 가면을 떼어내서 바닥에 떨어트린다.

아, 진짜 아프다.

미처 다 흘리지 못한 충격이 체내에 축적되어서 내 전신이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망가진 부분은 없지만 실금 정도는 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군중의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강한 척을 하며 통증을 참아냈지만 나도 이젠 한계였다.

"우……, 후우……"

일정한 호흡을 반복하며 조금씩 고통을 다스린다.

호흡만으로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고통은 아니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금술사는 의자에서 일어난 뒤 문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쪼그리고 앉아서 내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음, 부러진 부분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한계까지 소모된 거 같네. 용케 여기까지 혼자서 걸어왔구나."

"죽을 힘을 다해서…… 허세를 부린 거죠."

"상대가 네 허세를 믿어서 다행이네. 넌 만전의 상태라도 마력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마력이 바닥이 나고 체력이 떨어져도 크게 티가 나지 않지. 그래서 상대가 네가 한계라는 걸 간파하지 못한 것 같아."

"아마도…… 그런 거겠죠."

고통을 억제하며 천천히 호흡을 조절한다.

연금술사는 흰 가운의 주머니에서 종이로 싼 환약을 하나 꺼내더니, 그걸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주었다.

그것을 까득 씹어서 삼킨다.

그 후로 호흡을 몇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몸의 상태가 상당히 안정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금술시의 진통제는 한결 같이 성능이 좋았다. 중독성이 심한 편이라 자주는 못 쓰지만.

"……힘들어보이면서도, 만족스러운 얼굴이네."

"네, 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너무나도 수준 높은 고수들의 공방이라 모든 흐름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오늘의 시합에서 얻은 경험을 절반만 소화할 수 있어도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고수와 고수가 부딪칠 때 발생하는 화학 반응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오늘의 시합에서 내가 얻은 건 크다.

연금술사가 눈을 깜박였다.

"신아, 그 아이는 지금 상태가 어때?"

"……."

그 말을 듣고 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야 끝내주는 기분이죠.」

무척, 들뜬 목소리였다.

「스페트로 이래로 제대로 된 싸움을 한 기분이라서 무척 상쾌해요. 물론 저와 '조' 모두 각자의 사정 때문에 승패를 제대로 가르지 못한 건 아쉬운 점이지만요.」

마그누스는 잊혀진 모양이다.

그와의 대결은 양쪽 모두 한 수씩 접어주면서 들어간 말 그대로 모의전에 가까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불쌍한데.

「이야, 검주에게는 진짜 몇 번을 감사해도 부족하네요. 오랜만에 진짜 스트레스가 확 풀렸어요. 제게 몸뚱이만 있었더라도 검주 어깨라도 주물러 드렸을 텐데……. 진짜 아쉽다…….」

백신아는 콧노래라도 나올 것 같은 목소리로 검왕검을 흔들었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다.

「검주, 몸은 좀 괜찮으세요? 제가 좀 흘린다고 흘렸지만, 아무래도 출력이 부족해서 미처 흘리지 못한 공격이 꽤 있었는데…….」

"통증은 심하지만 움직이는데 크게 위화감은 없어. 부러지진 않은 거 같아."

근육이 조금 손상된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대와 관절은 한 번 정밀검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조'의 그 어마어마한 공격을 흘려보낼 때마다 관절과 인대가 소모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조금만 더 쉬면 연금술사가 부축해주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턱을 살짝 들고, 천장의 얼룩을 하나씩 세어 나간다.

그때, 내가 등지고 있던 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잠시 벗어놨던 살색 가면을 다시 얼굴에 덮어쓴다.

"가면 검사, 나다."

"마그누스 대장……?"

"그래, 오늘 저녁 쯤에 너희 공방에 찾아가서 나누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다. 약속을 잡아줄 수 있겠니?"

"……."

연금술사를 향해 눈짓한다. 그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은 후 문을 등진 채 고개를 살짝 틀어서 대답했다.

"상관 없어요."

"알겠다. 저녁 시간에 찾아가마."

마그누스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나누고 싶은 얘기라는 게 도대체 뭘까?"

"글쎄요. 짐작가는 게 없네요. 제1위가 싸우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한 판 겨뤄달라는 부탁일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1위와 싸운 감상을 듣고 싶은 걸수도 있고…… 일단 확실한 건 1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 뿐이에요."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마그누스와 1위의 격차가 꽤 커진 것 같다.

검술 하나만으로도 백신아에게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였으니까.

현재의 마그누스는 검술만 쓰는 1위를 상대로도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우리와 모의전을 벌였을 때는 어느 정도 실력을 억제한 상태였다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차이가 꽤 있어 보인다.

예전에 있었던 회동에서 제1위는 출석하지 않고 자리를 비워 두었었는데, 그때 마그누스는 그럴 만 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회동에 불참하지 않은 그 기간 동안 뭔가 새로운 심득이라도 얻어냈던 것일까.

마그누스는 근시일 내에 제1위에게 도전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좀 시기상조다.

이기지 못할 승부에 나서는 건 그의 자유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읏……. 하아……."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일어선다. 조금 휴식한 덕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나는 연금술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돌아갈까요."

"조용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음지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 같은데."

"괜찮아요, 올리비아에게 경호를 부탁해뒀으니까."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내 고민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그누스는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면 검사' 님. 준비하십시오."

"너 지금 뭐하냐?"

"실수로라도 네 이름을 입에 담지 않기 위해서지. 이런 건 철저해야 하지 않겠나."

하여튼 꽉 막힌 성격하고는.

하지만 음, 그 정도로 내 부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부서진 가면 대신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또 다른 가면을 살색 가면 위에 겹쳐서 씌운다.

연금술사도 여우 가면을 꺼내서 얼굴에 썼다.

이걸로 준비 끝.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

* * *

파비아가 우는 소리를 냈다.

"있잖아, 사제에……."

"응, 파비아."

"나 진짜 이러고 있어도 돼? 사제, 아프지는 않아?"

"어, 괜찮아. 딱 좋게 압박되는 느낌이라."

하지만 파비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파비아는 내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위치를 잡고 쪼그려 앉은 자세다.

아무래도 허리 근육이 영 뻐근해서 파비아에게 압박을 부탁하고 있었다. 파비아는 보기보다 체중이 나가는 편이라 내게는 딱 기분 좋은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 허리의 뻐근함이 호전되었을 때쯤, 파비아를 내 위에서 물러서게 했다.

아, 이제야 좀 풀리는 느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근육이 놀라지 않게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백신아의 실력이 워낙 빼어난지라 이 정도 수준에 그쳤다.

온갖 강적을 상대로 피칠갑을 해가며 간신히 승기를 잡았던 예전하고 비교하면 많이 나아진 느낌이다.

이제 하룻밤만 푹 자도 많이 나아질 거 같은데.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공방으로 돌아왔다. 루이스는 우리가 복귀할 때까지 파비아를 잘 돌봐주고 있었다.

파비아도 루이스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다. 별 일이 없어도 마구 껴안으면서 막 들러붙고 그런다.

루이스는 마구 애정을 표하는 파비아를 떼어내기 위해서 고생 중이다.

"신현아, 그 사람 왔어."

계속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중, 연금술사가 나를 불렀다. 마그누스가 벌써 방문한 모양이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감탄하면서 침실에서 나온다.

나와 체격이 비슷한 남자, 마그누스가 문앞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오늘은 쉬고 싶었을 텐데."

"아, 괜찮아요. 그럭저럭 버틸 만 하거든요."

"그럭저럭……, 인가."

마그누스는 많이 놀란 얼굴이다.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는지 표정은 금방 수습되었다.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순수한 기량에 있어서 백신아는 제1위조차 아득히 능가하는 영역에 있는 초인이다.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존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튼, 내가 오늘 너희를 찾아온 건 너희에게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보고, 괜찮은 거 같으면 받아들여다오."

"……일단 내용부터 한 번 들어볼까요."

의뢰라.

이상하게도 그 내용이 짐작된다.

"한 달 뒤, 제1위에게 순위 교체를 걸고 도전할 생각인데…… 그때까지 내 수련을 좀 도와줄 수 있겠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