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7. 가면 검사 (8)
* * *
마그누스는 한참 동안 테이블에 앉아서 지친 몸을 회복시키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몸을 회복하는데 바쁜 건 나도 비슷하다. 몸이 부서지지 않는 수준에서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체력을 소모한 기분이랄까.
테이블에 앉은 채, 작지만 영양가가 높은 말린 과일을 하나씩 삼킨다. 야자 같기도 하고 대추 같기도 한 이 과일은 매우 당도가 높아서 힘 없을 때 집어 삼키면 효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으득으득 씹어서 삼키고, 호흡하면서 흡수한다.
잠시 후, 나와 마그누스는 서로 비슷한 타이밍에 체력을 회복했다. 그래도 내가 그보다 훨씬 젊은 몸이기 때문에 마그누스보다는 내가 조금 더 빠르게 기상했다.
"후우……"
마그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난 지하 투기장에 찾아가서 입장권부터 얻어와야 겠다. '가면 검사'와 제1위의 비무를 놓칠 수는 없지."
"대장도 그쪽하고 인연이 있는 겁니까?"
"소싯적에 그쪽에서 수련했지. 양지도 좋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음지의 분위기도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익혀둬야 하는 법이야."
그 점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전도 실전 나름으로, 한 가지 실전만 알아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최대한 많은 환경에서, 다양한 실전을 경험하는 편이 무조건 유리하다.
마그누스와 스텔라는 세트로 몸을 돌렸다.
연금술사는 여전히 스텔라를 오물보듯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왜 그렇게 스텔라를 경멸하는지는 나도 이유를 도통 알 수 없다.
"나는 이 기회에 가면 검사와 1위가 부딪치는 걸 보면서 약점을 분석하든, 아니면 새로운 영감을 얻은 해야겠다. 너희 둘 모두, 내 입장에서 보면 강력한 적수라고 볼 수 있으니까."
"1위를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1위 녀석도 당연히 쓰러트려야지."
마그누스는 무슨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최고의 특급 모험가가 아니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해지는 것이지. 나보다 강한 상대는 용납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내고 말겠어."
그의 말에는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세계 제일.
나 역시 그 자리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마그누스가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사나이로서, 그리고 무술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냐."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이왕 할 거면 최고가 될 수 있게 노력해야죠."
나는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선언했다.
"하지만…… 너무 위만 쳐다보면, 아래에서 쫓아오는 사람에게 발목을 붙잡힐 수도 있어요. 그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그누스는 소리 없이 웃는 기색이었다.
그의 어깨가 한참 동안 들썩거렸다.
"그렇군……. 네 말처럼 너와 루이스는 장래, 나와 1위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적이 될 가능성이 높지."
"지금은 저도 '가면 검사'에게 배우는 입장이지만, 장래에는 더 강해질 겁니다. 제 목표도 대장하고 똑같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되는 것."
난 씨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가면 검사'한테만 신경을 쓰다가 저한테 따라잡히면 곤란하니까 미리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의외로 마음 씀씀이가 좋군."
마그누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해두마. 천하제일인?下?一人의 길을 함께 걷는 동지여."
* * *
"조금 따끔할 거야."
연금술사는 내 피부 위에 소독솜을 문지른 후, 그대로 주사기를 꽂아서 혈액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충분한 양을 뽑으면서도 몸에 위험이 되지 않는 절묘한 수준까지 혈액을 추출한 후 지혈한다.
추출한 혈액은 투명한 팩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나의 혈액을 보관한 책을 연금술사는 몇 개씩 쌓아서 보관하고 있다.
모든 혈액이, 따로 떨어진 상태로 수용액 속을 부유하는 왼팔에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지금까지 추출한 혈액을 왼팔에 주사하면서 연금술사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검은 수용액'을 배출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검은 수용액을 절반 이상 밀어낸 시점부터 묘하게 진도가 늦어지기 시작해서 연금술사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혈액을 충분히 준비한 후 한꺼번에 투입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혈액 대신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검은 용액이 내 왼팔의 괴사를 막고 있었지만, 저 검은 용액이 팔을 타고 체내로 유입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철저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
"아, 출출하네요. 오늘도 철분이 가득한 걸로 먹어야겠죠?"
"한동안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해줘야 하니까."
연금술사가 돌아선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루이스가 들어왔다.
"저 왔어요."
"응, 다녀왔어?"
"가우우아."
"어, 그래. 파비아. 나 왔어."
네 발로 엎드린 채 늘어져라 자고 있던 파비아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도 웃으면서 인사해준다.
"그런데 바깥이 왜 그렇게 난장판이에요? 또 누구랑 한바탕 했어요?"
루이스가 날 향해 손을 흔들면서 질문했다. 연금술사는 한 번 쓴 주사기를 옆으로 치우면서 대답했다.
"마그누스, 그 사람이 '가면 검사'의 정보를 추적하다가 우리를 찾아왔어. 뒷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게 '가면 검사'에 대한 걸 질문하기 위해서였지."
"대장이?"
루이스의 파란색 눈이 크게 뜨인다.
나는 살짝 통증이 느껴지는 왼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
"어. 그런데 내 팔이 외팔이가 되어 있는 것만 보고 바로 정체를 눈치채더라. 가면 검사가 외팔이 검사라는 것까지 알고 찾아왔더라고."
"솔직히 너무 눈에 띄는 특징이긴 하잖아, 그거."
"맞지. 그래서 나도 요즘 돌아다닐 때는 일부러 의수를 하나 붙이고 돌아다니는 중이고."
외팔이라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근데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 소문으로 들려온 '가면 검사'의 실력을 고려하면 너나 나 이외에는 후보가 안 나오는데, 설마 내가 스페트로하고 맞붙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한쪽 팔을 잃었다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우리가 아니라 새로운 고수가 출현한 줄 알고 오셨구나."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올해는 참 빡빡하게 보냈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것만 해도 도대체 몇 번이야. 진짜 더럽게 고생했지.
"그래서 대장하고 한 번 붙은 거야? 내가 없을 때?"
루이스는 자기를 빼놓고 대결을 벌인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손수건만 있으면 그걸 잘근잘근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이다.
"나 있을 때 붙지. 나도 구경하고 싶었단 말이야."
조금 토라진 목소리.
이럴 때 루이스는 실제 나이보다 상당히 어리게 보인다.
나는 살짝 웃으며 루이스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나중에 너 있을 때 한 판 더 붙어보자고 약속 잡아놨어. 내가 이런 일을 하루 이틀 해본 게 아니잖아."
"……제법인데. 하지만 네가 날 너무 잘 알고 있는 거 같아서 오히려 살짝 기분 나빠."
루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 거, 해 달라는 대로 해줘도 난리야.
하지만 이러한 흐름의 대화는 우리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는데."
"뭐야?"
"오늘도 지하 투기장에 가서 시합을 하나 잡았거든. 나한테 도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진짜? 너무 많이 이기는 바람에 이젠 도전해오는 사람도 변변히 없다면서?"
루이스도 가면 검사에 대해서는 전해 듣고 있다.
단기간에 지하 격투계에 암약하던 수많은 고수들을 때려 눕히고 정점에 섰다는 것도.
"그런데 그 도전자가, 아마도 제1위 같아."
"……뭐?"
루이스는 참 알기 쉬운 리액션을 보였다.
의자의 등받이에 걸어놨던 오른팔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고 있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체격이나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는 스페트로나 마그누스 대장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어."
"음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양지의 초고수들 수준의 역량을 가진 사람은 없지. 그리고 이 나라에서 대장에 버금갈 만한 사람이라면 1위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오늘 대장하고 스텔라가 찾아온 이유도 1위 때문이라더라. 1위가 음지의 초고수로 등극한 '가면 검사'에게 도전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뭐야, 진짜 1위가 '가면 검사'를 때려 잡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루이스는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다.
급은 낮아도 루이스는 특급의 영역에 서 있고, 그녀에게 있어서 1위는 일종의 목표나 다름 없다.
그런데 1위 같은 구름 위의 존재가 스스로 가면 검사에 도전하기 위해서 제피로스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루이스는 의자 위에서 다시 한 번 앉은 자세를 고쳤다.
"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승산은 있는 거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가면 검사'에게 도전한 건 현재 이 나라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되는데."
"일단 마그누스 대장은 반반으로 점치더라."
"신아 혼자서 싸웠을 때를 가정한 승산이지? 5분이라는 제한이 있는 상황에서도 승산이 반반이라는 소리야? 신아가 그 정도로 강해졌다고?"
「크흠. 싸우기 전까지 승산을 논하는 건 이르죠.」
그 물음에 백신아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내 허리춤의 검에 시선을 맞춘 채 다시 한 번 인사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짜 1위라면, 아마 스페트로 전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면 모를까, 제게 주어진 5분의 시간으로는 아무래도 어렵죠.」
백신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 뿐이고, 이것을 더 늘리거나 길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빠르게 해치우기 위해서 승부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위험하다. 제1위는 마그누스에 버금가는 최강자. 승부를 서두르는 순간 발생하는 필연적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즐길 생각이에요. 지하 격투계에 몸을 던진 후에도 시시껄렁한 놈들만 잔뜩 만나서 저도 좀 욕구불만이었거든요. 그런데 난데없이 최고 수준의 고수가 알아서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인데…… 후후후, 이 기회를 어설프게 날릴 수는 없죠.」
백신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루이스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으음, 신아야 말할 것도 없고, 1위도 어마어마한 고수니까 아마 엄청 재미있는 대결이 되겠지. 난 뒷세계에 흥미 없었지만, 구경은 한 번 해보고 싶어지는데."
"보고 싶으면 내 도우미 자격으로 출입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어. 한 명 정도는 통과시켜줄 수 있거든."
"그럴까……. 도우미 자격으로 출입하면 관객석이 아니라 경기장 아래에서 볼 수 있으니까 도움도 될 테고."
"그렇겠지."
하지만 루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한 후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래도 괜찮아."
"괜찮겠어?"
"특급 모험가가 음지에 발 들였다가 들키면 어마어마한 스캔들이고, 난 얼굴하고 몸이 눈에 띄는 편이라서 숨기기도 마뜩찮잖아."
그건 사실이다.
성격에 비해서 상당히 아까운 얼굴과 몸뚱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생긴 걸로만 따지면 루이스는 지금도 특급 모험가 뿐만 아니라 모든 모험가 중에서 제일이다.
"제대로 숨기려면 얼굴을 가면으로 숨기고, 머리도 돌돌 감아서 위로 올리고, 옷도 꾸며야 하고…… 이번에는 그냥, 여기에서 파비아나 돌보고 있을게."
루이스의 시선이 바닥에서 눈을 감은 채 잠든 파비아를 바라보고 있다.
"파비아도 선생님하고 네가 없는 동안 많이 심심할 거 같고.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 검왕검 안에 들어가면 신아가 결투를 재현해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괜찮아. ……아, 하지만 내가 없다고 대충 하면 안 된다? 설령 상대가 1위라고 해도 무조건 이겨야 해."
「물론이죠, 루이스 아씨.」
루이스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백신아가 힘 있게 대답했다.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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