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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45화 (145/287)

〈 145화 〉 17. 가면 검사 (2)

* * *

"이게 올리비아 씨한테 받아 온 명함이구나."

루이스는 침대에 권태로이 누워 있었다. 옆에는 파비아도 있지만, 잠들어 있어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명함을 양손으로 쥐고 천장의 조명에 비쳐본다. 그런다고 비쳐 보이는 건 없다. 무늬가 조금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걸 제외하면 평범하기 그지 없는 명함이었다.

명함의 뒷면에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명목상 음지 단체이지만 위치한 주소지는 도시의 중심지였다.

빛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루이스는 명함에 기재된 주소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것일까.

"여기 적혀 있는 상회 이름 말이야. 선생님 집에 있는 명함에서 본 거 같아. 디자인은 다르지만."

"연금술사 선생님한테서?"

"응. 나는 특급 모험가로서 품위 유지 의무가 있어서 이런 데 함부로 다니면 안 되지만, 선생님은 양지 음지 가리지 않는 편이잖아. 혹시 선생님이 물건 구할 때 쓰는 블랙마켓 같은 곳이 아닐까?"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나도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연금술사의 수발을 든 횟수만 따지면 내가 루이스보다 더 많다. 그녀의 집앞에 배달된 짐을 옮기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단골 가게의 이름 같은 건 아예 외워버렸을 정도다.

루이스의 말을 듣고 보니까 나도 이 이름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블랙마켓이라.

블랙마켓과 연금술사.

소름 돋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물론 그레이 존에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연금술사는 법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니까.

블랙마켓 사업은 지하 격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루이스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헐렁한 옷차림의 루이스가 몸을 빙글 돌리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에게 여쭤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 * *

그리고 다음 날.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집을 나섰다.

문앞에는 연금술사가 서 있다. 검은색 원피스에 흰 가운. 연금술사는 사시사철 언제나 이런 차림이다.

하지만 요즘은 날씨가 차가운 탓에 세부적으로 보면 달라진 점이 보인다.

원피스는 평소보다 조금 두꺼운 데다 끝 부분에 흰털이 달려 있는 겨울용 옷이고, 다리에는 겨울용 스타킹. 슬리퍼 대신 부츠를 신고 있는 데다 검은 머플러까지 감았다.

연금술사가 부츠 끝으로 바닥을 딱딱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

"네. 그런데 파비아는요?"

"집 보기. 그 아이가 보기보다 똑똑해서, 말을 하고 나오면 최소한 집을 어지르지는 않아."

호, 벌써 그 정도로 성숙해진 건가.

완전 금치산자처럼 하고 다닐 때부터 봐서 그런가, 걔가 그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연금술사가 머플러를 조금 느슨하게 풀면서 나를 이끌었다.

루이스가 짐작한대로 연금술사는 블랫 마켓에서 물건을 여러 번 구입해본 경험자였다.

하지만 단골까지는 아니었고, 손님 자격을 한 장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연금술사의 연구 자체가 불법적인 재료를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계열인 데다가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도 있다.

"거기 투자자 중에,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

"할아버지……, 진 노인이요?"

"응.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론 왠지 껄끄러워져서 가기 싫어졌어."

연금술사는 툴툴거리며 나보다 반 발짝 앞서 나갔다.

진 할아버지, 진 노인.

연금술사의 조부인 데다가, 재력으로는 스페트로 일파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나와도 여러 번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인연이 있었던가.

그 노인은 연금술사의 행적에 관심이 많은지 그녀의 주거지 근처에 감시하는 사람들을 배치하기도 했었다.

배치하는 족족 나와 루이스가 쫓아냈기 때문에 지금은 포기한 것 같지만, 요주의의 인물이다.

적은 아니더라도 그 노인의 재력 자체가 상당히 껄끄러운 요소다.

제피로스에는 란즈 가주와의 미팅 때문에 온 거라던데,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진 노인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뭐, 선생님을 잡아가기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요?"

"무서운 건 아냐. 아주 살짝, 껄끄러운 거 뿐이지."

이거나 그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연금술사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라서 조금 신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새삼 연금술사가 나를 따라서 함께 나와준 사실이 무척 기특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불편한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와줄 정도로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절 했는데, 그녀가 고집을 부려서 함께 나오게 되었다.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연금술사는 아무도 못 말린다.

연금술사와 함께 번화가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중 하나, 좌우로 너비가 넓고 높이도 높은데 정작 간판의 갯수는 얼마 없는 밋밋한 건물을 찾아냈다.

출입 자체는 자유롭지만 생각보다 볼 건 없다. 식당 몇 개, 카페 몇 개가 전부.

나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찾아서 아래로 내려갔다.

건물의 지하에는 회원제로 이뤄지는 상회가 하나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상회으로 분류되지만 그 실상은 블랙마켓의 입구나 마찬가지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를 보고 나서, 따로 챙겨온 가면을 얼굴에 쓴다. 연금술사도 코 위로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꺼낸다.

얼굴을 숨긴 후, 손님을 받는 종업원에게 명함을 보여준다.

스무스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삼엄하진 않네요."

"어차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잡지도 않거든. 어중이떠중이를 가려내는 작업에 가까워."

연금술사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처럼, 필요 이상으로 삼엄하게 경계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두꺼운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연금술사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자신의 가느다란 팔뚝을 엮었다.

"혼자서 오니까 쓸데없는 벌레가 자꾸 엮이더라구. 오른팔 좀 빌릴게."

"뭐, 마음대로 하세요."

넓은 내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 익숙한듯,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한 번 맞추고 말았다.

입구에 상회라고 붙여놓은 게 장식은 아닌 듯, 바깥에서도 흔히 판매될 법한 물건들도 제법 보인다.

몇몇 흉흉한 생김새의 상품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상회, 상점이라고 해도 믿겠다.

"가면이 기본 드레스코든가보네요."

"양지 쪽의 사람들도 안 그런 척하면서 자주 들락거리니까."

그런 탓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음지의 공기가 심하지 않다. 양지처럼 맑은 공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는 음습한 공기와도 다른 느낌.

말하자면 그레이 존.

양지와 음지의 경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사고, 흥정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도떼기 시장 같기도 하다.

하지만 블랙마켓은 블랙마켓이다. 양지에서는 법적인 이유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돌아 다니고 있었다.

물론 나쟈의 핵 같은 진짜 희귀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희귀품보다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물건을 주로 취급하는 블랙마켓 같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역시나 나쟈의 핵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긴 희귀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품을 팔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치도 보장 받기 어려운 블랙마켓에서 그런 물건을 취급하는 것도 이상하다.

현실의 블랙마켓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모처럼 블랙마켓에 들어온 김에 구경이나 하려고 좀 돌아보고 있는데, 문득 강력한 마력의 충돌이 피부로 감지되었다. 고개를 돌린다. 유독 블랙마켓에서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구역이 하나 있다.

같은 방향에서 마력의 충돌이 쉬지 않고 연이어 들려온다. 드디어 목적지를 찾은 것 같다.

방향을 잡고 접근하는 와중에도 나는 수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음, 마력의 충격을 완화하는 기구가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네요."

"수준 이상의 실력자들이 부딪치면 마켓 전체에 펑펑 소리가 울릴 테니까. 그걸 막으려고 설치했나보네."

그녀의 말처럼 수준 이상의 실력자들의 격돌은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파괴력을 자랑한다.

그걸 아무런 조치도 없이 내버려두면 블랙마켓을 이용하는 타 고객에도 불만이 생기겠지.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설치한 물건이다.

블랙마켓 주제에 양지의 격투 시설에도 잘 되어있지 않은 기구가 붙어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비싼 물건인데다 교체 주기도 빨라서 은근히 돈이 많이 깨질 텐데, 그 문제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블랙마켓의 수입이 좋은 것일까.

「검주, 검주. 어서 보러 가시죠.」

몸이 달았는지 백신아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나를 재촉했다.

확실히 남의 집 사정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블랙마켓의 손님으로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온 거니까.

연금술사와 함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블랙마켓은 지하 5층까지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고, 투기장은 지하 3층이다. 그걸 지하 1층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바닥이 뚫려 있었다.

추락 방지 펜스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시선을 기울였다.

『호, 생각보다 수준이 괜찮은데요?』

백신아가 조용히 감탄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원형으로 펼쳐진 경기장 위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오른쪽은 가면을 쓴 거한. 왼쪽은 머리를 둘둘 땋아서 늘어트린 조그만 소년이다.

힘과 속도. 두 전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무기를 부딪치고 있었다.

내 기준으로 따졌을 때 그들의 실력은 3급 모험가와 4급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사실 일반인 기준에서는 상당한 고수라고 볼 수 있다. 3급 이상은 양지에서도 일류로 구분되는 경지이니까.

인프라도 안 좋고, 법의 범위에서도 벗어난 음지에서는 보기 드문 고수들이었다.

잠시 동안 이어진 전투 끝에 가면을 쓴 거한이 소년의 몸을 타일 바닥 위에 내리찍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몸이 꿈틀꿈틀 진동하더니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현실의 비무에서는 저 정도로 심하게 확인사살을 하면 모험가 자격을 박탈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음지. 거한에게 쏟아지는 건 칭찬과 박수였다.

허리가 부러진 것 같은 소년이 들것에 실려나갔다.

심판이 다음 경기 시각을 공지한 후 청소부들이 나타나서 핏자국을 지우고 부서진 타일을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야만적이네. 내 취향은 아냐."

연금술사가 내 팔에 몸을 문지르며 조금 전의 비무를 평가했다.

그녀에겐 취향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

『여긴 분위기가 좀 화끈하네요, 완전 내 취향이야.』

물론 이런 놈도 있고.

여기에서 중요한 건 연금술사보다는 백신아의 취향이니까 내게는 성공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나도 이제 슬슬 움직이자. 선수 등록도 해야 하고, 거쳐야 하는 작업이 많다.

"이 명함은 최고 수준의 손님에게만 주어지는 명함이군요.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관리실 앞에 찾아가서 명함을 제시했더니, 그런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오너는 손님의 등급에 따라서 건네주는 명함이 서로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거쳐 내게로 오게 된 지금의 명함은 최고 등급의 손님에게만 주어지는 명함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통과됐는데? 역시 빽이 좋긴 좋구나.

나 혼자서 찾아왔더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통과되지는 않았을 거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관리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나아갔다. 통로의 끝에는 오너가 사용하는 듯한 방이 하나 있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붉은 명함을 소지한 분이십니다."

붉은 명함? 올리비아가 가지고 있던 명함 자체가 특수한 물건이었나?

"들여보내세요."

문이 열렸다.

오너의 방은 벽 하나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투기장의 격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오너라고 불린 남자는 그 유리벽에 찰싹 붙은 자세로 지하의 격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엘프?"

귀가 좀, 길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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