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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44화 (144/287)

〈 144화 〉 17. 가면 검사

* * *

흰 바탕에 왼쪽 눈구멍이 있는 부분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박쥐 무늬, 이게 괜찮을 거 같다.

어차피 비싼 가면을 쓸 생각은 없다. 그런 건 구하기도 어렵고 돈도 많이 든다. 제작한다 치더라도 긴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

박쥐 무늬에 마음이 끌린 건 근래 들어 자주 들은 소리 때문이다.

혼수 상태에서 회복한 뒤, 체중이 줄어든 내 얼굴을 보며 내 주변의 사람들은 흡혈귀 백작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가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지금 눈에 띈 이 가면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흰 천으로 싼 가면을 바구니에 넣고 시장을 벗어난다.

『검주, 또 어디 들를 데가 있으세요?』

'응. 양지하고 다르게 음지 격투기는 인맥이 없으면 찾아가기 어렵거든. 지하 격투계를 잘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보려고.'

『어, 검주 지인 중에 그런 분이 계셨어요?』

'올리비아.'

『아.』

백신아도 이해한 눈치였다.

올리비아는 스페트로 일파의 중추에 서 있는 데다가, 지하 격투기에도 빠삭한 인물이다.

음지 격투계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있을 거다.

올리비아가 안 되면, 그때는 내가 알고 있는 루트로 접근해볼 생각이다.

나도 따지고 보면 커리어를 지하 투기장에서 시작한 음지 출신의 격투가이다. 접근할 수 있는 루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검은 존재와의 전투에서 란즈 가주와 올리비아는 임시 거처로 쓰고 있던 폐교회를 잃어버렸다. 지금은 호텔의 방을 빌려서 장기 숙박 중이다.

객실 번호는 연금술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문앞에 도착해서 가볍게 노크한다.

올리비아는 마침 문앞에 서 있었는지,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누구십니까?"

"나야, 백신현."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올리비아는 호텔방 하나를 빌려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분명 숙박까지 겸하고 있는 개인적인 공간임에도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책상 위에 서류더미가 잔뜩 쌓여 있는 걸 제외하면 내놓은 방이라고 해도 믿을 거 같다.

푸른 머리카락의 남장 미녀인 올리비아는 흰 와이셔츠와 군청색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어깨에는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고정하는 멜빵.

정장 상의는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 있다.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깔끔한 방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다. 의식을 찾았다는 얘기는 아가씨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많이 회복한 것 같아서 기쁘군."

"그래, 고마워."

"……왼팔은 접합하지 않은 건가?"

올리비아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이던 중 팔이 떨어져 나간 왼쪽 어깨에서 멈춰섰다.

나는 또 괜한 걱정을 살 것 같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천히 붙여나갈 생각이야."

"그런가……. 그래, 네게도 사정이 있겠지."

가벼운 인사치레 후 올리비아의 호텔방으로 들어선다. 올리비아는 꾸미는데 관심이 없는지, 가지고 있는 옷도 정장과 정장 바지 뿐이다. 색깔하고 디자인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 정도다.

얘는 사생활이라는 게 없는 건가.

란즈 가주의 뒤를 잇는 스페트로 일파의 제2인자인 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내려드려야지. 홍차, 마실 수 있나?"

"아, 홍차는 괜찮아. 그런데 너 차도 내릴 줄 알아?"

고위층의 매너 같은 건가?

"최근 들어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지. 손님에게 대접할 수준까진 아니지만…… 너하고는 편한 사이니까. 시음해줬으면 좋겠는데."

"한 잔 부탁해."

"맛이 없더라도 너무 탓하진 말아줘."

올리비아는 작은 농담을 덧붙인 후 홍차를 내리기 위해서 돌아섰다.

취미로 배운다고 말은 했지만, 올리비아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지 물의 온도나 차를 우리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상당히 숙련된 움직임을 보였다.

물을 따를 적에도 따로 표시된 물통을 쓴 걸 보면 물도 홍차에 맞는 걸 따로 구해서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기대되는데.

"네가 올 줄 알았다면 제과점에서 과자라도 사두었을 텐데, 홍차만 있어서 좀 아쉽군."

"평소에는 손님을 잘 안 받나봐?"

"여기는 내 개인적인 작업실 같은 곳이라 손님을 받지는 않지. 이런 개인적인 공간까지 타인을 들이지도 않고."

"잘 마실게."

올리비아에게 슬쩍 잔을 들어서 보여준 후, 차의 향을 음미하면서 한 모금 삼킨다.

차에 대해서 그다지 정통한 편은 아니라서 콕 찝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맛도 괜찮고 향도 훌륭하다.

적어도 내 수준에서는 하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높은 홍차였다.

"맛있다. 솜씨 좋은데?"

"그렇지? 좋은 찻잎을 일하다 선물로 받았거든. 사실 이 찻잎 때문에 취미로 홍차를 내리기 시작한 거다."

올리비아는 살짝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맛이 나왔는지, 맛과 향을 음미하는 시간이 길다.

호텔방이 홍차의 향으로 가득해졌을 때 즈음 되어서 올리비아가 슬며시 내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있을까? 내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도?"

"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부탁이라. 네게는 이것저것 빚을 진 게 많아서, 도대체 무슨 무시무시한 부탁이 나올지 조금 걱정되는군."

올리비아가 살짝 긴장한 시선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나를 네가 알고 있는 음지 격투계에 소개시켜줄 수 있을까 해서."

"음지 격투계라고……? 왜 갑자기 그런 쪽에 관심을?"

이때, 올리비아는 내 부탁에 "안 된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나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건 틀림없다.

"이 녀석이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나는 허리춤의 검을 들어서 올리비아에게 보였다.

검왕검의 존재는 올리비아도 알고 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군. 정체를 숨기고 그 친구에게 네 몸을 쓰게 할 생각인가."

"맞아, 여기 오는 길에 가면도 하나 샀어."

"그 친구의 실력은 나도 경험해서 알고 있지……. 지하 격투계를 뒤집어버리기라도 할 생각이냐?"

"그런 건 아니고, 이 녀석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같아서 좀 풀어주려고 그래."

"아,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휘두르기 꺼려질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음지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올리비아는 사정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런 사정이라면 내가 소개해줄 수 있어. 마침 이 근처에도 지하 투기장이 하나 있다. 이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활동하는 지하 격투 단체의 지부인데, 내가 거기 명함을 한 장 가지고 있어."

"그런 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음지 단체라고 무조건 음지에서만 활동하는 건 아니다. 양지에서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거대 단체가 지하 조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 우리가 거래하는 상대 중에도 많지."

스페트로 일파는 거대한 조직이면서도 무술 문파의 성질을 겸비하고 있다.

더더욱 그런 환경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올리비아가 가방을 가져와서 총 다섯 개의 명함첩을 하나씩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그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로 집어넣는다.

도대체 가지고 다니는 명함이 몇 개야? 수백 개는 족히 될 거 같은데.

수십 장의 명함이 겹겹이 쌓인 그 속에서 올리비아는 한 장을 뽑아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멋스럽다 못해 화려하게까지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복잡하다.

양지에서 쓸 만한 명함은 아니다. 올리비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뭔가 술집 명함처럼 생겼다.

"이건 내가 그 지하 격투 단체의 유력자에게 선물 받은 명함이다. 혹시 음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보내달라면서."

"그럼 이걸 가지고 찾아가면 바로 등록할 수 있나?"

"아마도.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언제 내가 시간이 날 때 같이 찾아가보는 게 어떻겠나?"

"그건 너무 적극적으로 보일 수 있어서 안 좋을 거 같아."

"아,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올리비아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 명함과 지하 투기장의 위치만 알아도 충분하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면 되니까.

"일단 이 명함을 가지고 내가 혼자서 찾아가볼게. 첫 시합 날짜가 잡히면 너는 그때 관객으로 와 줘."

"내가?"

"응. 지하 투기장은 양지하고 비교해서 도박 배율이 세잖아. 내가 이기는 쪽에 걸어서 너도 한몫 챙기면 일석이조지."

"아하, 그런 의미인가."

올리비아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허리춤의 검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여기에는 최강의 검사가 있으니까."

* * *

「있잖아요, 검주.」

"어, 왜."

올리비아와 헤어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백신아도 집에서는 편하게 소리를 내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작업용 탁자 앞에 앉아서 박쥐 가면을 조각칼로 살살 다듬고 있었다. 내 얼굴과 두상에 맞춰서 조금 깎아댈 생각이다. 안 그러면 다칠 거 같다.

백신아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내 작업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중이다.

「음지 격투가들은 양지와 비교하면 어때요? 더 센가요?」

"넌 머리에 그런 것밖에 없어?"

하여튼 단순무식하기는.

「아, 하지만 궁금하잖아요. 신명나게 칼춤을 출 수 있는 판을 마련해주신 건 고맙지만, 수준이 낮으면 또 김이 샌다구용.」

"평균적인 수준은 양지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야."

「엥? 진짜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백신아가 강하게 반문했다.

「보통 음지가 양지보다 세지 않아요?」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구조적으로 음지가 양지보다 강할 수가 없어."

가면을 들어서 눈 구멍의 위치는 제대로 맞는지, 움직일 때 방해되지는 않을지 꼼꼼하게 따져본다.

근데 이 가면 보면 볼수록 뭔가 정이 드는 느낌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한쪽 눈을 감은 채 가면을 이쪽, 저쪽으로 들어본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음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음지는 음지일 뿐. 유입되는 자본의 크기부터 양지와 음지는 차원이 달라. 음지라는 건 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영역인데, 열심히 수행한 사람이 왜 법도 없고 복지도 없는 음지에서 일하겠어?"

온갖 몬스터와 사건사고로 가득한 이 시대.

무술가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절대다수의 우수한 무술가는 대부분 양지에 몰려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음지에 머무르는 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만요, 검주. 그럼 음지에 가더라도 실력자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 아니에요……?」

"없지는 않지. 그냥 양지보다 숫자가 좀 적다는 뜻이야."

음, 가면은 이 정도면 될 거 같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대 위에는 샤워를 하고 나서 쓰러진 루이스와 파비아가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누울 자리가 없다.

"절대다수의 무술가는 양지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무술가도 있어."

찬물을 컵에 따라서 벌컥벌컥 마신다.

백신아는 나의 목소리에 완전히 집중한 상태였다.

"당당하게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발을 들인 정신병자. 목숨을 건 생사결 속에서 경지를 높이려는 구도자. 양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음지에 몸을 던진 도망자."

테이블에는 조금 전 올리비아에게 건네 받은 명함이 놓여 있다.

녀석의 말에 의하면 이 대륙 제일의 지하 격투 단체라는 소문이 있는.

"음지가 양지에 비해서 선수층이 얇고 평균적인 수준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어디든 최정상에 오른 고수들은 무시할 수 없어. 내가 알기로 특급 모험가 수준에 도달해 있는 인간들도 여럿 존재한다던데."

「기대되네요.」

백신아가 싱그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군침을 다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녀석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려둔 가면을 들어, 제대로 사이즈가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 삼아 얼굴에 써 본다.

착용감은 나쁘지 않다.

나는 가면을 벗어서 테이블 위에 다시 놓아둔 뒤,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처럼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양지 출신의 무술가도 있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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